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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2>

道雨 2009. 1. 7. 16:44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2>

넘쳐나는 공신들

기사입력 2002-01-02 오전 10:56:33

 

새로운 정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공신 집단이었습니다.
  태조는 즉위 열흘 만인 7월 말에 발빠르게 관제를 개정하고 공신들을 주요 관직에 임명했습니다.
  
  배극렴(裴克廉), 조준(趙浚)을 정승인 문하부 좌 우 시중에 앉힌 것을 비롯해, 이화(李和), 김사형(金士衡), 정도전(鄭道傳), 정희계(鄭熙啓), 이지란(李之蘭)은 정부인 문하부, 남은(南誾), 김인찬(金仁贊), 장사길(張思吉), 정총(鄭摠), 조기(趙琦), 조인옥(趙仁沃), 황희석(黃希碩), 남재(南在)는 군부인 중추원의 고위직에 나누어 앉혔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와 팔위(八衛) 등 군사를 직접 거느리는 기구의 요직도 겹치기로 맡았습니다. 황희석을 제외한 이들 모두는 공신 칭호를 받았고, 공신 가운데 배극렴, 조준, 이화는 백(伯), 나머지는 군(君)으로 임명됐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에는 정식으로 공신도감(功臣都監)을 설치해 제대로 포상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8월 20일에는 공신을 3등급으로 나누어 대상자를 정했고, 9월 16일에는 포상 방식을 확정했습니다.
  
  공신의 부모와 아내를 3~1등급 뛰어 봉작을 주고, 직계 아들을 3~1등급 뛰어 음직(蔭職) 임용하며, 하인들의 벼슬 임용에도 차등을 두어 특혜를 주었습니다. 특히 적장자(嫡長子)는 대대로 녹(祿)을 이어받게 하고, 자손은 인사기록부에 몇등 공신 아무개의 자손이라고 적어 영구히 죄를 용서하도록 했습니다. 이 밖에 땅과 노비를 등급에 따라 주고 배극렴, 조준은 특별히 식읍(食邑) 1천호를 주었습니다.
  
 
  
  공신들은 임금에게, 공신의 부인들은 왕비에게 먼저 잔치를 올렸고, 임금과 왕비는 공신 포상 내용이 확정된 뒤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각기 공적을 적은 교서 1 통과 녹권(공신증), 금띠 은띠, 안팎 옷감 등을 등급에 따라 내려주었으며, 시중 배극렴, 조준에게는 특별히 갓과 장식품 등을 내려주었습니다. 사위인 흥안군 이제에게는 성(姓)을 내려주어 왕실 성을 같이 쓰도록 허락했습니다.
  
  개국공신들이 왕세자 및 왕자들과 왕륜동(王輪洞)에서 모여 충성을 맹세했으며, 개국공신의 아들 손자 동생 사위들이 충효계(忠孝契)를 맺고 왕륜동에 모여 맹세했습니다.
  
  여기서 에피소드 하나. 공신들은 푸짐한 포상을 받고 미안했던지, 왕자들에게 땅을 더 주라고 임금에게 청했습니다. 좌시중 배극렴, 우시중 조준, 문하부 시랑찬성사 김사형 정도전, 중추원 판사 남은 등 핵심 공신들은 왕자와 여러 군(君)들이 의복과 말, 하인 등을 갖추지 않을 수 없어 씀씀이가 부족할 것이라며 본래의 과전(科田) 외에 땅을 더 주자고 청했습니다. 임금은 조용히 즉위 전의 일을 이야기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래의 과전 1백여 결만 가져도 배고프고 추위에 떨지는 않을 것인데, 더 준다면 사람들은 내가 아들들에게 개인적인 은혜를 베푼다고 할 것이오. 더구나 경지 지방의 토지가 한정돼 있으니, 어찌 함부로 줄 수가 있겠소? 경들이 만약 더 주고자 한다면 공신들에게 먼저 더 주고 이를 선례 삼아 왕자들에게 적용한다면 모르되, 왕자들에게만 줄 수는 없소.”
  
  공신들은 과전 외에 땅을 더 받았으니 왕자들에게 더 주어도 된다고 남은이 말하자, 임금이 남은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내가 공신에게 토지를 주었으니 아들들에게도 주란 말인가? 나도 옛날에 신하였을 때 사전을 받았는데, 모두 돌이 많고 메말라서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 공신의 사전은 비옥한 땅을 골라 주어야 할 것이다.”
  
  개국공신을 표창하고 나니 평소에 자신을 따라다니던 측근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사실 개국공신은 자신을 추대한 거사에 직접적인 공로가 있는 사람들의 일회성 공로를 표창한 것이지만, 자신의 주위에서 늘 궂은 일을 해주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자신의 오늘이 있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성계는 즉위 직후 휘하 군관들을 한 등급씩 승진시켰지만 대간에서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자 마음이 상했는데, 바로 이들 부류에 대한 포상을 원종공신(原從功臣)이라는 형태로 해주기로 마음먹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몽주의 처사에 항거하는 글을 올렸던 전 문하부 평리 유만수와 문하부 참찬 최영지, 중추원 상의 황희석 등 20여 명을 원종공신으로 표창했습니다. 중추원 동지사 박영충(朴永忠)은 한양부 윤으로 나가 있었고 상장군 윤방경(尹方慶)은 그때 모친상을 당해 반대 글을 올리는 대열에 끼이지 않았지만 옛날의 공로를 버릴 수 없다며 함께 원종공신으로 포함시켰습니다. 또 윤이 이초 사건 때 자신에게 조언을 해준 정당문학 이염도 추가로 원종공신에 넣었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의흥친군위 첨절제사(僉節制使) 최윤수(崔允壽) 등 2백13 명도 따로 표창토록 지시했습니다.
  
  한편 개국공신도 추가됐습니다. 상장군 조견은 2등공신, 우승지 한상경과 선공감 판사 임언충, 군기감 판사 황거정, 대장군 장사정 한충, 병조 의랑 민여익 등은 3등공신으로 추가됐습니다.
  
  대간은 이를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특히 민여익은 정몽주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으나, 임금은 자신과 일을 추진한 핵심 몇 명만이 내용을 알고 있다며 대간의 반대를 일축했습니다.
  
  민여익은 정몽주가 죽던 날 손흥종과 의논해 급히 공문을 만들어 각 도에 나누어 보내 조준 등을 살려 큰 공이 있으며, 신하가 임금에게 청하지도 않고 대신을 제 마음대로 죽여 부당하다고 말한 것은 당연하다고 임금은 두둔했습니다.
  또 원종공신에 들었던 황희석은 추대 거사 때 마침 부친상을 당해 참여하지 못했다며 개국 2등공신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재황 실록연구가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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