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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0>

道雨 2008. 12. 22. 11:29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0>
  매맞아 죽은 우현보의 아들들
  2001-12-28 오전 10:07:37

 

다음은 구세력의 추방입니다.
  사헌부는 개국 직후 구세력으로 고려의 대사헌이었던 문하부 찬성사 김주를 지목해 처벌토록 건의했습니다. 건의 내용에 과거 정도전이 글을 올리자 처벌을 청했다는 얘기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권력 핵심에 있던 정도전이 ‘괘씸죄’로 건 모양입니다. 아무튼 이 경우는 파직 선에서 일단 마무리됐습니다.
  
  구세력에 대한 조직적인 숙청은 즉위 교서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태조는 작당하고 반란을 모의해 먼저 문제를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처형이 건의된 우현보, 이색, 설장수 등 56 명을 살려주겠다고 인심을 쓰면서 이들을 등급에 따라 처벌토록 했습니다.
  
  ‘거물급’은 역시 우현보, 이색, 설장수였습니다. 이들은 관리 임명장인 직첩을 빼앗고 서민으로 떨어뜨려 섬으로 귀양보낸 뒤 종신토록 관리 신분을 박탈케 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렇게 처벌했습니다.

  
  
  이들 구세력 추방 내용이 포함된 즉위 교서는 정도전이 지었습니다. 실록은 정도전이 우현보와 오랜 원한이 있어 우씨 일문(一門)을 모함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으나 속시원히 되지 않자, 이때 여러 사람을 함께 끌어들여 극형에 처하려고 마지막 조항을 얽어서 바쳤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도승지 안경공을 시켜 이를 읽게 하다가 놀라서, 이들이 어찌 극형 감이냐며 모두 논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정도전 등이 등급을 낮추어 처벌할 것을 다시 청했습니다.
  
  임금이 이색, 우현보, 설장수는 감형하더라도 형벌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하자, 정도전 등은 다시 나머지 사람들에게 곤장을 칠 것을 청했습니다. 임금은 곤장을 맞고 죽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겨 굳이 말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도평의사사에서는 교서의 후속 조치로 귀양지를 무릉도(武陵島, 울릉도), 추자도(楸子島)와 제주(濟州) 등지로 하자고 청했습니다. 임금은 교서에서 이들을 가엾게 여긴다고 해놓고 섬으로 귀양보낸다면 말을 뒤집는 셈이라며, 다른 지방에 나누어 귀양보내도록 했습니다.
  
  우현보는 해양(海陽, 사천), 이색은 장흥부(長興府), 설장수는 장기(長鬐, 포항), 그 나머지 사람도 모두 바닷가 지방으로 귀양가게 됐습니다.
  
  교서가 내려왔을 때 정도전은 이색을 경기 바다 자연도로 귀양보내려고 경기(京畿) 계정사(計程使) 허주(許周)에게 압송케 했습니다. 허주가 자연도에는 사람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고 둘 곳을 물으니, 정도전이 대답했습니다.
  
  “섬에 귀양보내자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넣자는 거야!”
  
  조금 뒤에 이색을 장흥으로 귀양보내라는 명령이 나와 정도전의 계획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곤장은 귀양지에 가서 집행하게 됐습니다. 집행 관원으로 양광도에는 상장군 김노, 경상도에는 상장군 손흥종, 전라도에는 군기감 판사 황거정, 서해도 서북면에는 군자감 판사 장담, 교주강릉도에는 예빈시 경(卿) 전역(田易)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돌아와서 경상도에 귀양간 이종학, 최을의와 전라도에 귀양간 우홍수, 이숭인, 김진양, 우홍명, 양광도에 귀양간 이확, 강원도에 귀양간 우홍득 등 여덟 명이 죽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화를 내며 곤장 1백 대 이하를 맞은 사람이 모두 죽었으니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습니다. 정도전 등의 사주로 이들이 곤장을 심하게 쳐 죽인 것이었습니다.
  
  죽은 사람 가운데는 우현보의 아들이 셋이나 포함돼 있습니다. 실록은 이를 정도전의 복수라며 그 내막을 적어 놓았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전에 우현보의 친척으로 김진(金戩)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중으로 있으면서 종 수이(樹伊)의 아내를 몰래 범해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김진의 집안에서는 모두 수이의 딸이라고 했으나 김진만은 자기 딸이라며 몰래 사랑하고 보호했습니다.
  
  김진은 나중에 환속해 수이를 내쫓고 그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 딸을 선비 우연(禹延)에게 시집보내고는 노비, 토지와 집을 모두 주었습니다. 우연은 딸 하나를 낳아 정운경(鄭云敬)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여러 벼슬을 지내고 형부 상서에 이르렀던 정운경은 아들 셋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바로 정도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도전은 외할머니가 천출(賤出)이었던 것입니다.
  
  정도전이 처음 벼슬자리에 나서니 우현보의 자제들이 모두 그를 경멸했습니다. 관직을 옮겨 임명할 때마다 대간에서 고신(告身, 임명장)에 서명해주지 않자, 정도전은 우현보의 자제들이 시켜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해 일찍부터 분개하고 원망했습니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우홍수의 아들 우성범(禹成範)이 부마(駙馬)가 되었습니다. 정도전은 우성범 등이 세력을 이용해 그 근본을 까발릴까봐 우현보 집안을 모함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은 짓이 없었습니다.
  
  개국할 때 우성범을 모함해 죽이고는, 마침내 우현보 부자(父子)를 모함해 죽이려 했습니다. 또 조준이 이색, 이숭인과 사이가 나빴으므로 이색, 이종학 부자와 이숭인을 얽어 함께 죽이려 했습니다.
  
  즉위 교서를 지으면서 백성을 편안케 하는 일들을 나열하고는 계속해서 우현보 등 10여 사람의 죄를 논해 극형에 처하게 했으나 임금이 막아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에게 등급에 따라 곤장을 치도록 청해 허락을 얻었습니다. 정도전과 남은 등은 몰래 집행 관원인 황거정 등에게 말했습니다.
  
  “곤장 1백 대를 맞는 사람이 살아서는 안 된다.”
  
  황거정 등은 이들을 곤장쳐 죽이고 돌아와서 곤장을 맞아 병으로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것입니다. 실록은 이 일이, 정도전이 임금의 총명을 속이고 개인적인 원한을 갚은 것이며 임금이 처음에는 몰랐다가 나중에 그들이 죽은 것을 듣고는 크게 상심하고 탄식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태종 때인 1411년 가을에 이 문제가 불거져나와, 황거정과 손흥종 등이 임금을 속이고 멋대로 사람을 죽였다며 소급해 죄를 다스렸습니다.
  
  한편 죽지 않고 각지로 귀양갔던 사람들은 몇 달 뒤 상황이 안정되면서 풀려납니다. 태조는 이해 10월 11일 자신의 생일을 빌미로 이들의 처벌을 완화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그 이튿날 바로 우현보, 이색, 설장수 등 30 명은 지방 아무 곳에나 살 수 있게 하고 이첨, 허응 등 30 명은 서울이든 지방이든 자유롭게 거처토록 해주었습니다. 이듬해 설날에는 지방으로 거주제한했던 사람들도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이재황/실록연구가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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