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과 놀다 <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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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에서 시작된 새 도읍 공사 | |
2002-01-08 오전 10:04:55 |
이성계는 즉위 후 한 달도 안 돼 도평의사사에 한양으로 천도를 지시합니다. 그러고는 삼사 우복야(右僕射) 이염을 한양부에 보내 궁실을 손질토록 했습니다. 고려 때 한양은 남경이어서 이궁(離宮)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이 평주 온천에 나가 있을 때 시중 배극렴, 조준 등이 임금을 찾아가 천도 연기를 청했습니다.
“가만히 보건대, 한양의 궁궐이 이룩되지 못하고 성곽이 완공되지 못해 호위해 따르는 사람이 민가를 빼앗아 들어가게 됩니다. 겨울이 다가오고 백성들은 갈 데가 없으니, 청컨대 궁실과 성곽을 건축하고 각 관청을 배치한 뒤에 도읍을 옮기도록 하소서.”
그래서 한양 천도는 즉시 이루어지지 않고 다소 늦춰졌습니다.
천도 작업은 즉위 이듬해인 1393년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추진된 것은 계룡산(雞龍山) 천도였습니다.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로 전라도에 갔던 권중화가 연초에 돌아오면서부터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권중화는 당초 임금의 태(胎)를 안치할 태실 자리를 잡으러 남부 지방으로 내려가 한 달 동안 양광, 경상, 전라도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는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에서 좋은 태실 자리를 찾았다며 산수(山水)의 형세를 그린 그림을 바치고, 아울러 양광도 계룡산의 도읍 지도를 바쳤습니다.
임금은 그곳이 마음에 들었던지, 계룡산으로 거둥해 지세(地勢)를 직접 보고 장차 도읍을 정하겠다며 준비를 지시했습니다.
1월 19일, 임금은 개성을 떠나면서 삼사 영사 안종원, 우시중 김사형, 문하부 참찬 이지란, 중추원 판사 남은 등을 데리고 갔고, 도중에 회암사(檜巖寺)를 지나면서 왕사 자초를 청해 같이 갔습니다.
당초 대간 각 한 사람씩과 의흥친군에서 호위해 따르도록 지시했다가 간관이 각 부서에서 한 사람씩 따라가도록 청하자 형조의 한 사람만 대간과 같이 행차에 따라가도록 했습니다.
행차는 한강(漢江) 가에 머물러 약간 지체했습니다. 임금이 편찮아 나흘 동안 묵은 것입니다. 그동안 순군(巡軍)으로 하여금 민가에서 소란피운 자를 잡아 곤장을 때려 군중(軍中)에 보이게 했습니다.
2월 1일 새벽에 임금이 거둥하려고 수레를 준비하도록 지시하는데, 중추원 지사 정요가 서울에서 도평의사사의 보고를 가지고 왔습니다. 현비가 편찮고, 서해도 일대에 또 초적(草賊)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이 불쾌해하며 말했습니다.
“초적은 변방 장수가 보고한 것인가, 누가 와서 알린 것인가?”
정요가 대답을 못하자 임금이 말했습니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세가(世家), 대족(大族)들이 모두 싫어하는 일이니, 핑계대고 중지시키려는 것이다. 재상들은 개성에 오랫동안 살아 뿌리박은 땅에서 다시 옮기는 것이니, 도읍을 옮기는 일이 어찌 그들의 본뜻이겠는가?"
좌우에서 모두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남은이 말했습니다.
“신들이 외람되게 공신에 끼여 은혜를 입었으니, 도읍을 새 도시로 옮긴다고 무엇이 부족하겠으며 개성의 땅과 집이 어찌 아깝겠습니까? 지금 행차가 이미 계룡산에 가까이 왔으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가서 도읍을 건설할 땅을 보소서. 신들이 남아서 초적을 치겠습니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경들도 역시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왕조가 바뀌고 천명을 받은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인데, 지금 내가 서둘러 계룡산을 보고자 하는 것은 내 자신 때에 직접 새 도읍을 정하기 위해서다. 뒷 임금이 뜻을 이어 도읍을 옮기려 해도 대신이 옳지 않다고 막으면 어쩌겠는가?”
그러고는 행차를 돌리도록 지시했습니다. 남은 등이 이민도를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현비의 병도 틀림없이 나을 것이고 초적 또한 염려할 것 없다는 점괘가 나왔습니다. 모두들 모여 의논하고 계룡산으로 가기를 청했습니다. 임금은 정요를 처벌하고 가자고 했으나, 남은이 꼭 처벌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려 임금이 마침내 길을 떠났습니다.
8일에 계룡산 밑에 도착했습니다. 이튿날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새 도읍의 산수(山水) 형세를 관찰했습니다. 삼사 우복야 성석린, 문하부 상의 김주, 정당문학 이염에게 조운(漕運)이 편리한지 불편한지, 노정(路程)이 험난한지 평탄한지 살피도록 지시했습니다. 의안백 이화와 남은에게는 성곽을 축조할 지세를 살피도록 했습니다.
삼사 좌복야 겸 서운관 영사 권중화가 새 도읍의 종묘, 사직, 궁전, 저자를 만들 곳의 지세 그림을 바쳤습니다. 서운관과 풍수학자 이양달(李陽達), 배상충(裴尙忠) 등에게 지면의 형세를 살펴보도록 지시하고, 내시부 판사 김사행(金師幸)에게 먹줄로 땅을 측량하도록 지시했습니다.
11일에 행차가 새 도읍의 가운데 높은 언덕에 올라가 지세를 두루 살폈습니다. 왕사 자초에게 물으니,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13일에 임금은 계룡산을 떠나면서 김주와 중추원 동지사 박영충, 전 밀직 최칠석(崔七夕)을 남겨 새 도읍 건설을 감독케 했습니다.
좌시중 조준이 중간까지 마중나와 임금을 행재소(行在所)에서 알현했으며, 세자는 장단(長湍)에서 행차를 맞이했습니다. 27일에 임금이 도성으로 돌아오니, 백관이 용둔(龍屯) 들에서 맞이했습니다. 임금이 숭인문으로 들어왔는데, 임시 궁 문밖에서 탈춤판을 베풀었고 성균관 관원과 학생들은 가요를 불러 올렸습니다.
계룡산 도읍 건설 공사는 농사철을 앞둔 3월 초에 부역나온 백성들을 놓아 보냈고 4월 초에는 기술자들을 놓아 보내 잠시 주춤했습니다. 그러나 3월 말에 계룡산 새 도읍의 기내(畿內) 지역을 81 개 주(州), 현(縣), 부곡(部曲), 향(鄕), 소(所)로 정하고, 8월에는 새 도읍의 기내 토지를 다시 측량해 10 결과 5 결로 등급을 차별해 지번을 만들어 나누어주도록 지시했습니다.
추수가 끝나고 11월에는 다시 공사를 본격화했습니다. 노는 중들을 동원토록 지시했는데, 내원당(內願堂) 감주(監主) 조생(祖生)이 자원자 수십 명을 인솔해 오니 임금이 기뻐하며 조생에게 음식물을 주고 각 종파의 중들에게는 비단과 무명을 내려주었습니다. 좌복야 김주에게 옷과 술을 내려주고 계룡산 새 도읍으로 보내 공사를 점검토록 했습니다.
“가만히 보건대, 한양의 궁궐이 이룩되지 못하고 성곽이 완공되지 못해 호위해 따르는 사람이 민가를 빼앗아 들어가게 됩니다. 겨울이 다가오고 백성들은 갈 데가 없으니, 청컨대 궁실과 성곽을 건축하고 각 관청을 배치한 뒤에 도읍을 옮기도록 하소서.”
그래서 한양 천도는 즉시 이루어지지 않고 다소 늦춰졌습니다.
천도 작업은 즉위 이듬해인 1393년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추진된 것은 계룡산(雞龍山) 천도였습니다.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로 전라도에 갔던 권중화가 연초에 돌아오면서부터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권중화는 당초 임금의 태(胎)를 안치할 태실 자리를 잡으러 남부 지방으로 내려가 한 달 동안 양광, 경상, 전라도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는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에서 좋은 태실 자리를 찾았다며 산수(山水)의 형세를 그린 그림을 바치고, 아울러 양광도 계룡산의 도읍 지도를 바쳤습니다.
임금은 그곳이 마음에 들었던지, 계룡산으로 거둥해 지세(地勢)를 직접 보고 장차 도읍을 정하겠다며 준비를 지시했습니다.
1월 19일, 임금은 개성을 떠나면서 삼사 영사 안종원, 우시중 김사형, 문하부 참찬 이지란, 중추원 판사 남은 등을 데리고 갔고, 도중에 회암사(檜巖寺)를 지나면서 왕사 자초를 청해 같이 갔습니다.
당초 대간 각 한 사람씩과 의흥친군에서 호위해 따르도록 지시했다가 간관이 각 부서에서 한 사람씩 따라가도록 청하자 형조의 한 사람만 대간과 같이 행차에 따라가도록 했습니다.
행차는 한강(漢江) 가에 머물러 약간 지체했습니다. 임금이 편찮아 나흘 동안 묵은 것입니다. 그동안 순군(巡軍)으로 하여금 민가에서 소란피운 자를 잡아 곤장을 때려 군중(軍中)에 보이게 했습니다.
2월 1일 새벽에 임금이 거둥하려고 수레를 준비하도록 지시하는데, 중추원 지사 정요가 서울에서 도평의사사의 보고를 가지고 왔습니다. 현비가 편찮고, 서해도 일대에 또 초적(草賊)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이 불쾌해하며 말했습니다.
“초적은 변방 장수가 보고한 것인가, 누가 와서 알린 것인가?”
정요가 대답을 못하자 임금이 말했습니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세가(世家), 대족(大族)들이 모두 싫어하는 일이니, 핑계대고 중지시키려는 것이다. 재상들은 개성에 오랫동안 살아 뿌리박은 땅에서 다시 옮기는 것이니, 도읍을 옮기는 일이 어찌 그들의 본뜻이겠는가?"
좌우에서 모두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남은이 말했습니다.
“신들이 외람되게 공신에 끼여 은혜를 입었으니, 도읍을 새 도시로 옮긴다고 무엇이 부족하겠으며 개성의 땅과 집이 어찌 아깝겠습니까? 지금 행차가 이미 계룡산에 가까이 왔으니, 원컨대 성상께서는 가서 도읍을 건설할 땅을 보소서. 신들이 남아서 초적을 치겠습니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경들도 역시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왕조가 바뀌고 천명을 받은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인데, 지금 내가 서둘러 계룡산을 보고자 하는 것은 내 자신 때에 직접 새 도읍을 정하기 위해서다. 뒷 임금이 뜻을 이어 도읍을 옮기려 해도 대신이 옳지 않다고 막으면 어쩌겠는가?”
그러고는 행차를 돌리도록 지시했습니다. 남은 등이 이민도를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현비의 병도 틀림없이 나을 것이고 초적 또한 염려할 것 없다는 점괘가 나왔습니다. 모두들 모여 의논하고 계룡산으로 가기를 청했습니다. 임금은 정요를 처벌하고 가자고 했으나, 남은이 꼭 처벌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려 임금이 마침내 길을 떠났습니다.
8일에 계룡산 밑에 도착했습니다. 이튿날 임금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새 도읍의 산수(山水) 형세를 관찰했습니다. 삼사 우복야 성석린, 문하부 상의 김주, 정당문학 이염에게 조운(漕運)이 편리한지 불편한지, 노정(路程)이 험난한지 평탄한지 살피도록 지시했습니다. 의안백 이화와 남은에게는 성곽을 축조할 지세를 살피도록 했습니다.
삼사 좌복야 겸 서운관 영사 권중화가 새 도읍의 종묘, 사직, 궁전, 저자를 만들 곳의 지세 그림을 바쳤습니다. 서운관과 풍수학자 이양달(李陽達), 배상충(裴尙忠) 등에게 지면의 형세를 살펴보도록 지시하고, 내시부 판사 김사행(金師幸)에게 먹줄로 땅을 측량하도록 지시했습니다.
11일에 행차가 새 도읍의 가운데 높은 언덕에 올라가 지세를 두루 살폈습니다. 왕사 자초에게 물으니,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13일에 임금은 계룡산을 떠나면서 김주와 중추원 동지사 박영충, 전 밀직 최칠석(崔七夕)을 남겨 새 도읍 건설을 감독케 했습니다.
좌시중 조준이 중간까지 마중나와 임금을 행재소(行在所)에서 알현했으며, 세자는 장단(長湍)에서 행차를 맞이했습니다. 27일에 임금이 도성으로 돌아오니, 백관이 용둔(龍屯) 들에서 맞이했습니다. 임금이 숭인문으로 들어왔는데, 임시 궁 문밖에서 탈춤판을 베풀었고 성균관 관원과 학생들은 가요를 불러 올렸습니다.
계룡산 도읍 건설 공사는 농사철을 앞둔 3월 초에 부역나온 백성들을 놓아 보냈고 4월 초에는 기술자들을 놓아 보내 잠시 주춤했습니다. 그러나 3월 말에 계룡산 새 도읍의 기내(畿內) 지역을 81 개 주(州), 현(縣), 부곡(部曲), 향(鄕), 소(所)로 정하고, 8월에는 새 도읍의 기내 토지를 다시 측량해 10 결과 5 결로 등급을 차별해 지번을 만들어 나누어주도록 지시했습니다.
추수가 끝나고 11월에는 다시 공사를 본격화했습니다. 노는 중들을 동원토록 지시했는데, 내원당(內願堂) 감주(監主) 조생(祖生)이 자원자 수십 명을 인솔해 오니 임금이 기뻐하며 조생에게 음식물을 주고 각 종파의 중들에게는 비단과 무명을 내려주었습니다. 좌복야 김주에게 옷과 술을 내려주고 계룡산 새 도읍으로 보내 공사를 점검토록 했습니다.
이재황/실록연구가 |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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