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리정승 이원익 가문의 가훈 *
無怨於人(무원어인) : 다른 사람에게는 원한을 사지 말고
無惡於己(무악어기) : 자신에게는 악함이 없도록 하며
志行上方(지행상방) : 뜻과 행실은 위를 향하고
分福下比(분복하비) : 분수와 복은 아래에 견주어라
오리정승 이원익(李元翼 : 1547∼1634)
- 3대 임금에 걸쳐 네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청백리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본관은 전주(全州). 서울 출신.
태종의 왕자 익녕군 이치의 4대 손인 이억재와 어머니 동래군 부인 정씨의 아들로 1547년(명종 2년)에 태어났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급제, 1598년(선조 31) 53세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서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건의하여, 경기도·강원도를 비롯한 전국으로 확대 실시, 불합리한 조세제도를 시정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62세로 영의정에 오르고, 1615년(광해군 7)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여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다가 1619년에 풀려났으며, 1623년(인조 1) 77세로 또다시 영의정에 오르는 등,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의 3대에 걸쳐 네 번이나 영의정에 올랐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公州)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이어 훈련도감 도제조를 지내고 치사(致仕)하였다.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여주(驪州)의 기천서원(沂川書院), 시흥(始興)의 충현서원(忠賢書院),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
안주목사로 부임했을 당시, 흉년으로 각 고을마다 도적이 들끓었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원익은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고, 누에치기를 장려하는 한편, 백성들이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들을 구제하는 등의 공으로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기도 했다.
이원익은 호조판서가 되기 전부터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집을 지으려고 목재를 준비해 두었는데, 호조판서로 임명되었다. 호조판서는 원래 국가의 살림살이를 맡은 관청의 우두머리이다. 그래서 집을 짓는다고 하면 '나라의 돈으로 짓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라 하여 집을 짓는 일을 단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높은 벼슬로 끝내 집을 짓지 못하고, 벼슬을 그만 두었을 때는 준비해 둔 목재가 전부 썩어 쓸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고, 원균(元均)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여 죽자, 이원익은 모함으로 파직당했던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인종 1∼선조 31))에게 기회를 주자고 하여, 선조는 이순신을 3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하여, 해전역사에 세계적으로 길이 남을 명랑해전((鳴梁海戰 1597년(선조 30) 9월)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으로 국토가 망가져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는데도 조정은 당파싸움을 계속하며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1542∼1607(중종 37∼선조 40))을 벌주기를 청하자, 오리 정승은 이를 반대하고 유성룡을 변호하며 선조에게 벌을 주지 말도록 간곡히 청하였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7년간의 전쟁동안 나라를 위해 수고한 사람을 버리려 한다하여 오리 정승도 사직을 다섯 차례나 청했으나, 번번히 선조가 허락하지 않아, 병의 악화를 핑계로 마침내 선조 33년 54세때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니, 나라를 걱정하여 실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1608년 2월 선조가 죽고 광해군(光海君)이 왕위에 오르자, '신하 중 믿을 만한 사람은 이원익 대감이니 큰일을 맡기라'는 선조의 유언에 따라 이원익은 영의정으로 다시 임명되니 이때 나이 62세였다.
그 해 광해군의 명으로 선혜청(宣惠廳:대동법을 실시하던 관청)을 설치하고, 대동법(大同法:세금을 쌀로 받는 법)을 실시하여 세금을 감면하는 등, 백성들을 가난에서 구제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이 끈질긴 주청으로 광해군이 형인 임해군(臨海君)과 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 (선조 39∼광해군 6) 어머니는 인목왕후김씨(仁穆王后金氏))을 죽이고(1614년), 계모인 인목대비(인목왕후)를 서궁(西宮:慶運宮(현 德壽宮))에 유폐시키자, 이를 반대하다가 홍천에 귀양갔다가 광해군 12년(1619)에 풀려났다.
오리 정승의 나이 77세에 인조(仁祖)가 왕위에 오르자 영의정에 다시 임명되었는데, 인조가 친히 오리 정승을 맞이하며 "200년 내려 온 종묘사직이 경의 힘을 빌어 유지되려 하오. 내가 경에게 바라는 것은 큰 가뭄에 구름과 무지개를 바라는 것보다도 더 크다오" 하였다.
영의정이 된 오리정승은 많은 사람이 광해군을 처형하자고 하였으나 이를 반대하여 유배에 그치게 하였고,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세자를 호위했고, 그 후에 훈련도감 도제조(訓練都監 都提調) 등 여러 벼슬을 한 뒤, 병의 악화로 사직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금천(현재의 광명시 소하동) 으로 돌아왔는데, 인조가 이불과 요를 주어 받았으나, 집을 준 것을 받지 않았다.
" 경을 위하여 집을 지어 준 것은 백성과 신하들로 하여금 느끼는 바가 있게 하려 함이요." 하며 하사한 집이 지금의 관감당이다. 이 후에도 인조가 편찮다는 소식을 듣고, 86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임금의 곁에서 더불어 지내다가, 병이 낫자 금천으로 돌아갈 정도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였다.
1634년(인조 13) 정월 병이 점점 악화되어, 그 당시의 정승에게 임금을 힘써 받들라는 유언을 남기고, 정월 29일 88세로 숨을 거두었다.
한 나라의 재상이라면, 그것도 4번씩이나 거듭했을 정도면, 대궐 못지않은 으리으리한 집에서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며 좋은 옷에 좋은 음식을 먹고 편히 지낼 수도 있었건만, 스스로 농사짓고 손수 돗자리를 만들어 팔아 생활하였다.
나라를 다스림에 백성을 위하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고 주장하며, 주변의 백성을 위해 베푸는 것이 재상으로서의 당연한 행동임을 외치며, 그 빈곤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해야 백성이 좀 더 편안해 질 수 있고 살기 좋게 해 줄 수 있을까하여, 백성들의 물질적, 육체적 세금 부담을 줄이려 애쓴 점을 짚어 볼 때, 우리가 넉넉지 못해 베풀지 못한다하는 것은 참으로 형편없는 변명이 아닌가 싶다.
남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분명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손해를 보아가면서 남을 위한 행동을 해야 하기까지의 망설임에 비해, 베풀고 난 후의 기쁨, 보람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그 시대에 이원익 정승이 88세까지 장수를 누릴 수 있었음은 아마도 평생 베풀고 나눠주는 삶 속에서 항상 보람과 기쁨을 얻으며 생활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 경기도 광명시에는 오리 이원익이 말년을 보낸 곳에 충현박물관이 건립되어 있다고합니다.
[충현 박물관]
경기도 광명시 소하 2동에 위치한 충현 박물관은 조선시대 3대 임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오리 이원익과
그 후손의 삶의 자취를 그대로 보존해 놓은 곳입니다.
이원익은 황희, 맹사성과 함께 조선의 3대 청백리로 꼽혔을 만큼 청렴결백하다고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박물관내에는 인조가 내린 '관감당'이라는 집이 있습니다.
충현박물관은 13대 직계손인 이승규 교수가, 오리 이원익의 정신을 전승하고자 건립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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