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화성행차와 왕릉 조성
정조 효심의 결정체…개혁세력 결집의 場으로 활용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이 상징적으로 구현된 정조의 원래 왕릉 터가 최근 수난을 겪고 있다. 정자각 터와 재실 터가 발견되어 사적지 지정이 예상되던 이곳에 갑자기 대한주택공사가 아파트 단지 건설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지난 7일에는 경기도 지역 교수들이 중심이 되고, 역사 연구 단체가 연계하여 정조 왕릉 터 보존을 위한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곳은 정조의 첫 왕릉 시설이 확인된 곳일 뿐만 아니라 정조 효심의 결정체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남다른 곳이다.
#1. 정조의 무덤이 옮겨진 까닭은?
정조는 생전에 자신의 무덤 자리를 미리 점찍어 두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현륭원(顯隆園) 동쪽의 한 구릉이었다. 지대가 낮고 습하며 좁아서 왕을 모실 자리가 아니라는 반대가 많았지만 정조는 낮은 곳에서 아버지를 영원히 모시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정조는 유언대로 이곳에 모셔졌다. 그러나 1821년 정조의 왕비인 효의왕후가 사망하면서 정조의 무덤을 옮기려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왕비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장인인 김조순 등이 중심이 되어 정조의 왕릉 터가 협소하다는 이유를 들어, 현재 정조가 묻힌 건릉으로 왕릉을 옮겼다. 원래 현륭원의 동쪽에 있었던 무덤이 서쪽으로 옮겨진 것이다. 정조의 무덤이 옮겨진 것은 '건릉천봉도감의궤'라는 기록에만 전할 뿐 한동안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러다가 최근 융릉과 건릉 사적지 밖 동남쪽에서 재실 터가 발굴되었고, 재실 터에서 북쪽으로 400여m 떨어진 곳에서 정자각 터로 추정되는 건물 터가 발견되어 학계를 흥분시켰다. 그리고 이 지역을 정조의 효심이 구현된 사적지로 지정하자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 이 지역이 주택공사에 매입되었고,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위기의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정조대왕의 왕릉 터는 사도세자 묘소 남쪽 발치에 시묘살이를 하는 형국으로 자리를 잡아 정조대왕의 애틋한 효심과 사도세자 복권의 비원이 깃든 곳이다. 조선왕릉 가운데 유일의 초장 왕릉터이며 왕릉의 내부구조와 제반 시설을 조사할 수 있는 유일의 유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특히 오는 6월 조선왕릉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는 시점에서 오히려 왕릉 지역을 파괴하는 것은 너무나 이율배반적으로 보인다.
물론 한 지역 주민의 생존권과 생활권도 중요하지만, 한 번 파괴되면 그 원형을 회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문화재의 중요성은 더욱 크다.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지극한 효심을 보인 정조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첫 왕릉 터. 이 지역을 보존하여 조선시대 왕릉의 변천 모습을 살펴보고, '효'의 정신을 널리 전파하는 산교육의 장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순간의 경제 논리에 현혹되지 말고, 문화유산의 적극적인 보존에 지혜와 역량을 모아야 할 때이다.
#2. 정조 효심의 구현, 화성 행차
왕릉의 조성에서도 잘 보이듯이 정조는 죽으면서까지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다하려고 했지만, 생전에도 아버지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는 것이 각별하였다. 부모에 대한 정조의 효심이 가장 구체화된 것이 바로 1795년에 단행된 화성 행차였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모신 화성을 자주 방문하여 어버이에 대한 효심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능행길은 현륭원 참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화성을 오가는 길에 백성들의 민원을 살피고 이를 해결하는 기회로 활용하였으며, 지방에 숨겨진 인재를 발탁하여 관리로 등용했다.
또한 경기도 일대를 직접 방문하여 수도권의 방위 체제를 점검하고, 수시로 군사들을 동원하여 단체 훈련을 시켰다. 1795년의 화성 행차는 정조가 그동안 이룩했던 자신의 위업을 과시하고 신료와 백성들의 충성을 결집시켜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기하기 위한 최대의 행차로 준비됐다.
1795년 윤 2월 9일, 창덕궁을 출발한 정조의 행렬은 7박8일간의 공식 일정에 들어간다. 이에 앞서 정조는 1794년 12월부터 행차를 준비하게 했다. 먼저 행사를 주관할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하고, 행사 경비로 10만냥을 마련하였는데 모두 정부의 환곡을 이용한 이자 수입이었다.
환갑을 맞이한 혜경궁 홍씨가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특별하게 설계된 가마가 2개 제작되었고, 1800여명의 행렬이 이동할 수 있는 시흥로(오늘날의 1번 국도)를 새로 건설하고, 한강을 안전하면서도 적은 비용으로 건널 수 있도록 고안한 배다리가 건설되었다.
본 행사는 1795년 윤 2월 9일에 시작되었다. 행렬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에 나타난 인원은 1779명이나 현지에 미리 가 있거나 도로변에 대기하면서 근무한 자를 포함하면 6000여명에 이르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새벽에 창덕궁을 출발한 일행은 노량진을 통해 배다리를 건너 노량행궁(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먹었고, 저녁에 시흥행궁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휴식 시간에 간식을 먹거나 정식 식사를 할 때에는 음식의 그릇 수, 들어간 재료와 음식의 높이, 밥상을 장식한 꽃의 숫자까지 표시하였다.
둘째 날에는 시흥을 출발하여 청천평(맑은내들)에서 휴식을 하였고, 사근참행궁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 무렵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는데 정조는 길을 재촉하였고, 이날 저녁 화성행궁에 도착하였다. 행렬이 화성의 장안문을 들어갈 때에 정조는 갑옷으로 갈아입고 군문(軍門)에 들어가는 절차를 취하였다. 셋째 날에는 아침에 화성향교의 대성전에 가서 참배를 하고, 오전에는 낙남헌으로 돌아와 수원과 인근의 거주자를 대상으로 한 문·무과 별시를 거행하여 문과 5인, 무과 56인을 선발하였다. 오후에는 봉수당에서 회갑 잔치 예행연습을 하였다.
넷째 날에는 아침에 현륭원에 참배를 하였다. 남편의 무덤을 처음 방문한 혜경궁 홍씨의 슬픔이 너무 큰 것을 보고 정조는 조급하고 당황해하였다. 오후에 정조는 화성의 서장대에 올라 주간 및 야간 군사훈련을 직접 주관하였다. 화성에 주둔시킨 5000명의 친위부대가 동원된 이날의 훈련은 서울에 있는 반대세력에게 엄청난 시위 효과를 보이는 것이기도 하였다.
다섯째 날에는 행차의 하이라이트인 어머니의 회갑연이 거행되었다. 연회 장소의 좌석 배치와 가구들, 의식의 진행 절차, 잔치에 참가한 여자 손님 13명과 남자 손님 69명의 명단이 발표되었고, 잔치에 쓰일 춤과 음악, 손님에게 제공되는 상의 숫자와 음식이 준비되었다.
여섯째 날에는 화성의 곤궁한 주민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오전에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서울에서 정조와 같이 온 관료 15명과 화성의 노인 384명이 참석하였는데 정조와 노인들의 밥상에 오른 음식이 모두 같았다 국왕의 밥상을 노인들도 함께 받은 셈이다. 양로연을 끝으로 공식 행사는 끝났다.
이후 정조는 휴식으로 들어갔는데, 한낮에는 화성의 축성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방화수류정을 시찰하고, 오후에는 득중정에서 활쏘기 시범을 보였다.
다음날은 서울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정조는 오던 길을 돌아서 시흥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잤고, 마지막날에는 노량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의 묘소가 마지막으로 보이는 고갯길에서 정조는 계속 걸음을 멈추며 부친과의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이후 이 고개는 지지대(遲遲臺:걸음이 더뎌지고 머뭇거리게 된다는 뜻) 고개라 불렸다.
#3. 화성 행차에 담긴 뜻은?
정조의 화성 행차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져 있었다. 먼저 동갑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회갑이라는 뜻깊은 해를 맞아 정조는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표시하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화성의 현륭원을 다녀오기로 결심하고 대대적인 국가행사를 준비한 것이다. 그리고 묘소 참배와 더불어 화성의 행궁(行宮:국왕이 임시로 머무르는 궁궐)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제껏 응어리진 삶을 살아온 어머니에게 지극한 정성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 행차는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효심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정조는 이 행차를 통해 왕권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자신의 친위군대를 중심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자 했으며, 행차와 연계하여 과거시험을 치러 인재를 뽑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직접 활쏘기 시범을 보이는가 하면 어머니와 같은 노인들을 위해서는 성대한 양로연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성을 정치, 군사, 경제의 중심도시로 키워나가려는 그의 꿈과 야망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행차 도중에 격쟁(擊錚·꽹과리를 두드리며 억울함을 호소함), 상언을 통하여 백성들의 생생한 현장 목소리를 들으며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정조는 세손 시절 항시 불안감을 느끼며 갑옷 차림으로 잠자리에 들었을 정도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노론 벽파들에게 심한 압박을 받았다.
정조가 자신과 학문, 정치를 함께할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규장각을 건립한 것이나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세운 것도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갖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화성 건설과 화성 행차를 통해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의 구현과 함께 오래도록 자신을 짓눌러오던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훌쩍 떨쳐 버렸다. 화성 건설과 화성 행차에는 부모에 대한 효심과 함께 개혁정치의 완성을 보고자 했던 정조의 정치력이 압축되어 있었다.
5월은 어버이날이 포함되어 있는 달이다.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던 정조의 효심이 잘 표현되어 있는 수원 화성과 화성행궁, 그리고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 정조의 무덤인 건릉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신병주 :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이 상징적으로 구현된 정조의 원래 왕릉 터가 최근 수난을 겪고 있다. 정자각 터와 재실 터가 발견되어 사적지 지정이 예상되던 이곳에 갑자기 대한주택공사가 아파트 단지 건설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지난 7일에는 경기도 지역 교수들이 중심이 되고, 역사 연구 단체가 연계하여 정조 왕릉 터 보존을 위한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곳은 정조의 첫 왕릉 시설이 확인된 곳일 뿐만 아니라 정조 효심의 결정체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남다른 곳이다.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 서쪽에 자리하고있는 정조의 무덤 건릉. |
정조는 생전에 자신의 무덤 자리를 미리 점찍어 두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현륭원(顯隆園) 동쪽의 한 구릉이었다. 지대가 낮고 습하며 좁아서 왕을 모실 자리가 아니라는 반대가 많았지만 정조는 낮은 곳에서 아버지를 영원히 모시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정조는 유언대로 이곳에 모셔졌다. 그러나 1821년 정조의 왕비인 효의왕후가 사망하면서 정조의 무덤을 옮기려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왕비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장인인 김조순 등이 중심이 되어 정조의 왕릉 터가 협소하다는 이유를 들어, 현재 정조가 묻힌 건릉으로 왕릉을 옮겼다. 원래 현륭원의 동쪽에 있었던 무덤이 서쪽으로 옮겨진 것이다. 정조의 무덤이 옮겨진 것은 '건릉천봉도감의궤'라는 기록에만 전할 뿐 한동안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정조의 초상. |
물론 한 지역 주민의 생존권과 생활권도 중요하지만, 한 번 파괴되면 그 원형을 회복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문화재의 중요성은 더욱 크다.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지극한 효심을 보인 정조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첫 왕릉 터. 이 지역을 보존하여 조선시대 왕릉의 변천 모습을 살펴보고, '효'의 정신을 널리 전파하는 산교육의 장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순간의 경제 논리에 현혹되지 말고, 문화유산의 적극적인 보존에 지혜와 역량을 모아야 할 때이다.
#2. 정조 효심의 구현, 화성 행차
왕릉의 조성에서도 잘 보이듯이 정조는 죽으면서까지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다하려고 했지만, 생전에도 아버지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는 것이 각별하였다. 부모에 대한 정조의 효심이 가장 구체화된 것이 바로 1795년에 단행된 화성 행차였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모신 화성을 자주 방문하여 어버이에 대한 효심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능행길은 현륭원 참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화성을 오가는 길에 백성들의 민원을 살피고 이를 해결하는 기회로 활용하였으며, 지방에 숨겨진 인재를 발탁하여 관리로 등용했다.
◇경기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 |
1795년 윤 2월 9일, 창덕궁을 출발한 정조의 행렬은 7박8일간의 공식 일정에 들어간다. 이에 앞서 정조는 1794년 12월부터 행차를 준비하게 했다. 먼저 행사를 주관할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하고, 행사 경비로 10만냥을 마련하였는데 모두 정부의 환곡을 이용한 이자 수입이었다.
환갑을 맞이한 혜경궁 홍씨가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특별하게 설계된 가마가 2개 제작되었고, 1800여명의 행렬이 이동할 수 있는 시흥로(오늘날의 1번 국도)를 새로 건설하고, 한강을 안전하면서도 적은 비용으로 건널 수 있도록 고안한 배다리가 건설되었다.
본 행사는 1795년 윤 2월 9일에 시작되었다. 행렬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에 나타난 인원은 1779명이나 현지에 미리 가 있거나 도로변에 대기하면서 근무한 자를 포함하면 6000여명에 이르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에 행차했다가 시흥로를 통해 돌아오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
둘째 날에는 시흥을 출발하여 청천평(맑은내들)에서 휴식을 하였고, 사근참행궁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 무렵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는데 정조는 길을 재촉하였고, 이날 저녁 화성행궁에 도착하였다. 행렬이 화성의 장안문을 들어갈 때에 정조는 갑옷으로 갈아입고 군문(軍門)에 들어가는 절차를 취하였다. 셋째 날에는 아침에 화성향교의 대성전에 가서 참배를 하고, 오전에는 낙남헌으로 돌아와 수원과 인근의 거주자를 대상으로 한 문·무과 별시를 거행하여 문과 5인, 무과 56인을 선발하였다. 오후에는 봉수당에서 회갑 잔치 예행연습을 하였다.
넷째 날에는 아침에 현륭원에 참배를 하였다. 남편의 무덤을 처음 방문한 혜경궁 홍씨의 슬픔이 너무 큰 것을 보고 정조는 조급하고 당황해하였다. 오후에 정조는 화성의 서장대에 올라 주간 및 야간 군사훈련을 직접 주관하였다. 화성에 주둔시킨 5000명의 친위부대가 동원된 이날의 훈련은 서울에 있는 반대세력에게 엄청난 시위 효과를 보이는 것이기도 하였다.
다섯째 날에는 행차의 하이라이트인 어머니의 회갑연이 거행되었다. 연회 장소의 좌석 배치와 가구들, 의식의 진행 절차, 잔치에 참가한 여자 손님 13명과 남자 손님 69명의 명단이 발표되었고, 잔치에 쓰일 춤과 음악, 손님에게 제공되는 상의 숫자와 음식이 준비되었다.
여섯째 날에는 화성의 곤궁한 주민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오전에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서울에서 정조와 같이 온 관료 15명과 화성의 노인 384명이 참석하였는데 정조와 노인들의 밥상에 오른 음식이 모두 같았다 국왕의 밥상을 노인들도 함께 받은 셈이다. 양로연을 끝으로 공식 행사는 끝났다.
이후 정조는 휴식으로 들어갔는데, 한낮에는 화성의 축성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방화수류정을 시찰하고, 오후에는 득중정에서 활쏘기 시범을 보였다.
다음날은 서울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정조는 오던 길을 돌아서 시흥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잤고, 마지막날에는 노량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의 묘소가 마지막으로 보이는 고갯길에서 정조는 계속 걸음을 멈추며 부친과의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이후 이 고개는 지지대(遲遲臺:걸음이 더뎌지고 머뭇거리게 된다는 뜻) 고개라 불렸다.
◇정조의 1795년 화성 행차 관련 그림 중 노량진 배다리를 통해 한강을 건너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
정조의 화성 행차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져 있었다. 먼저 동갑인 어머니와 아버지의 회갑이라는 뜻깊은 해를 맞아 정조는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표시하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화성의 현륭원을 다녀오기로 결심하고 대대적인 국가행사를 준비한 것이다. 그리고 묘소 참배와 더불어 화성의 행궁(行宮:국왕이 임시로 머무르는 궁궐)에서 어머니의 회갑연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이제껏 응어리진 삶을 살아온 어머니에게 지극한 정성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이 행차는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효심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정조는 이 행차를 통해 왕권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자신의 친위군대를 중심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자 했으며, 행차와 연계하여 과거시험을 치러 인재를 뽑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 또한 직접 활쏘기 시범을 보이는가 하면 어머니와 같은 노인들을 위해서는 성대한 양로연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성을 정치, 군사, 경제의 중심도시로 키워나가려는 그의 꿈과 야망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행차 도중에 격쟁(擊錚·꽹과리를 두드리며 억울함을 호소함), 상언을 통하여 백성들의 생생한 현장 목소리를 들으며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정조는 세손 시절 항시 불안감을 느끼며 갑옷 차림으로 잠자리에 들었을 정도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노론 벽파들에게 심한 압박을 받았다.
정조가 자신과 학문, 정치를 함께할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규장각을 건립한 것이나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세운 것도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갖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화성 건설과 화성 행차를 통해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의 구현과 함께 오래도록 자신을 짓눌러오던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훌쩍 떨쳐 버렸다. 화성 건설과 화성 행차에는 부모에 대한 효심과 함께 개혁정치의 완성을 보고자 했던 정조의 정치력이 압축되어 있었다.
5월은 어버이날이 포함되어 있는 달이다.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던 정조의 효심이 잘 표현되어 있는 수원 화성과 화성행궁, 그리고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 정조의 무덤인 건릉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신병주 :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역사, 인물 관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신라에 불교를 전한 검은 피부의 이방인들 (0) | 2009.05.11 |
---|---|
[스크랩] 왜 신라 왕족은 흉노의 후손이라 했을까 (0) | 2009.05.06 |
소호금천씨와 김일제, 그리고 신라김씨 (0) | 2009.04.27 |
신라에선 승려가 무당? (0) | 2009.03.31 |
전쟁의 포화 속에 화엄사를 지켜낸 차일혁 총경 (0) | 2009.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