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신라 왕족은 흉노의 후손이라 했을까
후광 효과와 권력의 정체성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했지만, 흉노족만은 어떻게 하지 못하고, 대신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후 묵특(冒頓, BC 209~174)은 흉노 부족들을 통합해 단일 세력으로 만들었고, 느슨했던 부족연맹체를 강력한 유목제국으로 만들었다.
BC 200년, 한 고조(漢高祖, BC 206~195)는 흉노족을 공격했다.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한 고조에게도 흉노는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묵특의 군대는 평성(平城, 현 산서성 大同)에서 오히려 고조의 군대를 완전 포위했다. 묵특은 고조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놓아주었다. 그 뒤에 한나라와 흉노는 유화정책의 국면에 접어든다. 한나라는 흉노에 공물을 바치고 국경무역을 제공했다. 흉노들은 한나라를 아우의 나라라고 불렀다.
그러나 한 무제는 화친정책이 막대한 비용을 소모시키며, 굴욕감을 준다고 여겨 BC 133년, 흉노와 맺은 유화정책을 폐기했다. BC 117년에는 흉노를 공격해 몽골 북부로 내몰았다. 기원전 99년, 10만 흉노를 5천명 군사로 대적하다가 투항한 한나라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가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기도 한다. BC 108년 한 무제는 흉노의 왼팔을 잘라버린다며, 고조선을 정복했다.
고조선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요하 하류 유역과 한반도 서북쪽에 한사군을 설치했다. 결국 흉노와 고조선은 별개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한 무제의 처지에서 같은 종족으로 보였을 뿐이다. 실제로 흉노의 신앙은 하늘을 받들고, 특정한 산을 신성시했다. 곰 숭배 전통이 있다. 이는 단군신화를 보면 잘 나타나는 점이다.
최근 신라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임을 구체적으로 적은 재당 신라인의 묘지명이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다. 서안에서 최근 알려진‘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이 그것이다. 기록은 신라 김씨들이 한나라 제후였던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것을 담고 있다. 사실 이 같은 발견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김대성, 이종호, 김병모 교수 등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제기되어온 사실이고, 최근에는 KBS ´역사추적´을 통해 영상화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시작은 ‘문무대왕비’였다.
1796년(정조 20년), 경주에서 밭을 갈던 농부가 비석을 발견했다. 그것은 ‘문무대왕비’였다.비문에 적힌 내용은 홍양희, 유득공, 김정희 등을 놀라게 했다. 여기에서 눈길을 끈 것은 문무왕 김법민의 오랜 조상 여섯명에 대한 내용이었다. ´투후(宅侯)가 7대를 전해, ´15대조 성한왕(星漢王)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성한왕은 신라의 태조이며 신라의 태조는 김알지다. 문제의 단어는 ‘투후(秺侯)’였다. <한서>에 이 말이 등장한다. ´김일제전´에 "김일제를 투후로 봉했다(封金日磾爲秺侯)"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김일제(B.C 135년에서~85년)는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 한 무제의 포로가 되었다가 흉노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서한에 귀화한 인물이다. 이른바 김성한은 김일제의 7대손이 되는 것이다. 물론 김성한은 김알지다.
과연 김알지는 김일제의 자손일까? 우선 그들이 한반도에 오게 되는 이유를 살펴보아야 한다. 김알지 = 김일제 후손이라는 주장은 대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나라에서 김일제 일족은 명문세가였다. 중요한 것은 왕망(王莽, BC 45~AD 23)이다. 김일제의 4대손 김당은 왕망과 동복형제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김당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 남편, 즉 김당의 이모부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왕망은 김일제 집안과 일가였다는 말이다. 왕망은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薪)을 세운 인물이다. 나아가 왕망을 내세워 나라를 전복시킨 것이 김씨 일가인 것이다. 유수(劉秀:後漢 光武帝)가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왕망은 부하에게 암살당하고 15년만에 신나라는 망하고 만다.
이때 위험해진 김씨 일파들이 한반도 남부로 건너와서 가락국을 세웠다는 주장이 있다. 그것이 신라 김씨의 뿌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락(駕洛)은 ‘낙양을 정벌(제어)하겠다는 의미라고 보는 소수 의견도 있다. 이대로라면, 한족의 한나라를 무너뜨린 셈이 되고, 민족주의 관점에서 보면, 이민족의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이들이 된다.
언제인가 중원을 정벌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또한 진(秦)나라 진백 즉 진목공을 선조로 든 것은 여수의 난생설화가 있는 진나라(사기 진본기)와 김알지의 난생설화가 있는 신라의 동일성을 말할 수 있다. 또한 진나라와 신라는 모두 소호씨를 조상으로 본다. 더구나 진백은 하족 그러니까 .임금을 시조로 황제족을 자처하는 오랑캐를 정벌하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虩事蠻夏). 삼국지’ 위지 동은 진한(辰韓)의 6촌 촌장을 ‘망한 진나라의 유민(秦之亡人)이라고 했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도 많다. 그간 이러한 주장에서는 최초로 김씨성을 받은 것이 김일제라고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김일제 이전에도 김씨는 존재했다고 한다. 또한 성(星)은 김일제의 후손으로 5대 투후이다. 따라서 신라의 태조 성한왕을 김일제의 7대손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김일제 후손들은 7대 동안 투후에 봉직했기 때문에 한반도로 이주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들어서 김씨계가 자신들의 가계도를 미화했다는 비판이 가해진다. 무엇보다 전체적으로 직접 자손이라고 명확하게 표현한 부분이 없고, 김일제 이후의 조상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김일제만 언급되고, 그 직계 후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의심스럽다. 마치 족보를 위조한 듯 싶다.
중국 본토에서 한반도에 남쪽 해안에 올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은 여전히 의문이다.‘삼국사기’는 진한 6부가 고조선의 유민이라고 했다. 당시의 교통 수단 상황을 볼 때 고조선 유민이 이동한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김씨부인 묘명에서 왕망의 신이 망하고 요동으로 이주해가서 살았다는 것은 이러한 과정을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요동에 살다가 다시 남하해서 한반도 남부로 이동했다는 경로가 설명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라에서 김씨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은 6세기다. 중국과 적극적인 관계모색을 하는 가운데 김씨 성은 강조되었고, 그전에는 김씨를 내세우지 않았다. 갑자기 신라 후대에 이러한 내용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김씨부인도 9세기의 인물이다. 더구나 묘지명에는 김일제를 휴도 왕자라고 하지 않고, ‘흉노 조정에 몸담고 있었다’고 한 것도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난다.
장약용은 <아방강역고> 권 제3, 졸본고에서 “고구려 시조 주몽의 호를 동명왕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동명이라는 두 글자는 분명히 북부여 시조의 이름이지, 주몽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후대에 동명이라는 호칭을 주몽(추모)에게 붙인 셈이 된다.
이렇게 동명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아무래도 부여가 훌륭한 국가이거나 동명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왕(聖王, ?~554)은 성왕 16년(538년)에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고 고친다. 이 역시 부여가 대단한 나라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정통성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고구려가 부여를 얼마나 계승했는지, 백제가 부여를 얼마나 계승했는지는 따로 보아야 하는 문제다.
신라 김씨 왕족이 김일제의 후손을 자처하는 것도 역시 관념적인 수준이며, 실제보다는 그러한 정통성을 통해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이번에 알려진 산시성 시안(西安)시 곽가탄(郭家灘)의 김씨부인 묘명은 그러할 개연성이 많다. 아무래도 한나라 제후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유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는 전반적으로 한족의 유습을 이은 당나라와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려 했으므로 이러한 김일제 신화화 작업을 강화했을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중원 진출을 하기 위한 명분이었을 수도 있다. 통일신라만큼 활발하게 대륙에 진출한 이들도 드물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시조의식을 구성해낸 것이 후대로 갈수록 명확한 현실로 변했다. 하지만 김일제가 흉노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김씨의 뿌리는 한(漢)족이 절대 아님은 분명하다. 한 무제가 흉노의 왼팔이라며 고조선을 정벌한 것도 이와 같은 공통성을 말한다. 그들이 금을 좋아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금을 좋아한 것은 신라만이 아니었다.
*************************************************************<데일리안/김헌식 문화평론가 2009,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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