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포항 흥해에서 신라 最古碑로 추정되는 명문 비석 발견

道雨 2009. 5. 15. 11:32

 

 

 

  포항 흥해에서 신라시대 명문 비석 발견         

                        - 신라 最古碑로 추정

(서울=연합뉴스)

 

포항시 흥해읍 학성리에서 최근 발견된 '포항 학성리비(가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기초 조사를 벌인 결과 지증왕 2년(501)에 제작된 신라 최고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2009.5.15 <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 >



 
 

 

                   포항 흥해에서 신라시대 명문 비석 발견

 

  문화재청(청장 이건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성리에서 발견되어 국가에 발견문화재로 신고 된,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비(碑)를 보관하고 있다.

이 ‘포항 학성리비’(가칭)는 2009년 5월 11일, 주민생활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던 도로개설 공사현장(흥해읍 학성리 중앙교회 앞)의 한쪽에 치우쳐 있던 편평한 돌을, 주민(김모씨, 47세)이 집으로 옮겨 사용하려고 세척하던 중, 글자가 있음을 확인한 후 5월 14일 포항시에 신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포항시에서 문화재청에 보고하였으며, 문화재청에서는 이 비의 안전한 관리와 보존처리 등을 위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를 현장에 파견하여 실사한 후 연구소로 이관토록 조치하였다.

‘포항 학성리비’는 부정형의 자연석(화강암, 최대길이 104㎝, 최대너비 49㎝, 두께 12~13㎝, 무게 115kg)으로 한 면에만 음각을 하였다.

이 비가 발견된 지점은, 1989년에 발견된 ‘영일 냉수리비’(국보 제264호)가 발견된 지점에서 동쪽으로 약 8㎞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확인되는 글자는 모두 12행으로, 한 행에는 많을 경우 20자 내외이며, 모두 200자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비의 하단부에 약 20㎝정도 여백이 있을 뿐, 상단부까지 글자가 가득 새겨져 있다. 비의 맨 위쪽 일부가 결실되었으나 대부분 판독 가능한 상태로 양호하다.

내용 중 ‘敎’, ‘沙喙部’, ‘古利村’, ‘道使’, ‘使人’, ‘阿干支’(신라 제17관등 중 6관등), ‘干支’ 등의 글자가 확인되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특히 비문 맨 앞에 나오는 ‘辛巳’는 이 비가 건립된 시기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 비의 내용으로 보아 6세기(辛巳年은 501년, 561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561년에 건립된 ‘창녕 진흥왕척경비’ 등에 ‘阿尺干’, ‘沙尺干’ 등으로 표기되고 있는 관등명이 이 비에서는 ‘阿干支’, ‘沙干支’ 등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보다 이른 시기인 501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포항 학성리비’의 현재 상태는 일부 그을음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이동한 상태로 발견되었고, 주변이 도로 개설로 변형되어 원위치를 찾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포항 학성리비’에 대해 응급 보존처리 작업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향후 관련 절차를 거쳐 적절한 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또한 관계 전문가들과의 검토를 거쳐 비의 상세한 내용을 정리하여 자료집 등 으로 발간하고, 학술심포지엄 등을 개최하여 논의를 확대시킬 계획이다.

 

 

 

경북 포항 흥해에서 제2의 신라 냉수리비(?) 발견

(가칭) 포항 학성리비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성리에서 발견된 신라 고비(古碑)는 여러모로 1989년 경북 영일군(지금은 포항시로 통폐합) 신광면 냉수리에서 발견된 이른바 영일 냉수리 신라비(국보 264호)와 닮았다.

우선 발견된 지점이 같은 포항시 권역인 데다, 정확한 판독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글자체가 전형적인 신라 고비 형식이라는 점이 그렇다.

 

포항시가 문화재청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이 비석은 지난 11일 오후 5시 무렵 학성리 주민생활개선사업 도로 개설 작업 일환으로 이곳 중앙교회 앞에서 공사를 벌이던 중에 이 마을 주민 김헌도(47) 씨에 게 발견됐다.

김씨는 공사 현장에 마침 편평한 돌이 있어 이를 집에 가져와 화분 받침대로 쓰려고 물로 세척하던 중에 글자가 나타나자 당국에 신고했다고 한다.

이에 포항시에서 현장 조사를 벌인 결과 이 비석은 화강암 재질이며, 가로 45-49cm, 높이 104cm, 두께 10cm가량으로 측량됐다.

이를 배용일 포항대학 명예교수 등이 기초 판독을 벌인 결과 "6세기경 신라비로서 귀족들의 재산분쟁이 발생하여 중앙정부에서 현장 방문하여 분쟁을 해결하고 다시는 재산 분쟁이 없도록 하며 향후 분쟁이 발생할 시에는 중죄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로써 본다면 냉수리비와 유사한 것으로 판단되고  신라때 고어(이두)가 있어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문화재청은 국립문화재연구소 관계자들을 현장에 급파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2009.5.15>

 

 

 

 경북 포항 흥해에서 발견된 '포항 학성리비'(가칭)는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 금석문 중에서도 가장 빠른 영일 냉수리비(504년 추정)보다도 빠른 신라 최고비(最古碑)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학성리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이 비석을 옮겨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기초조사 결과 이 학성리비가 부정형 화강암(최대길이 104㎝, 최대너비 49㎝, 두께 12~13㎝, 무게 115kg)을 이용해 한 면에만 글자를 음각했다고 15일 말했다.

이 비는 1989년 냉수리비(국보 264호)의 발견 지점에서 동쪽으로 약 8㎞ 떨어진 곳에서 지난 11일 도로공사
도중 발견됐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글자는 모두 12행이며, 한 행에는 많을 경우 20자 내외를 새겼으며, 전체 200자 정도가 확인된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비 하단부에 20㎝ 가량 되는 여백이 있을 뿐, 상단부까지 글자를 가득 새겼다.

비문 시작 지점인 맨 위쪽 일부가 결실되긴 했지만 글자는 대부분 판독 가능하다.

 

비문에서는 왕의 교시를 의미하는 '敎(교)라든가 신라 6부 중 하나인 사탁부(沙喙部), 촌락 이름일 '고리촌'(古利村), 관직 중 하나인 '도사'(道使)라든가 '사인'(使人), 신라 17관등 중 6번째인 아간지(阿干支), '간지'(干支)와 같은 글자가 확인된다.

이로 보아 이 비문은 냉수리비나 524년 법흥왕 시대에 만든 울진 봉평 신라비처럼 어떤 특정한 사안에 대해 신라 왕실, 혹은 신라 조정이 결정한 판결문이나 법령을 새긴 것으로 짐작된다.

연구소는 "특히 비문 맨 앞에 보이는 '신사'(辛巳)는 비문이 제작된 시기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며, 비문 내용으로 보아 (비문 제작 시기는) 6세기로 추정된다"면서 "이 경우 신사년은 지증왕 재위 2년인 501년과 진흥왕 22년인 561년 중 하나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연구소 박종익
학예실장은 "다만 561년에 건립된 창녕 진흥왕 척경비에는 신라 관등이 '아척간'(阿尺干)이나 '사척간'(沙尺干) 등으로 표기된 데 비해 이 학성리비에서는 '아간지'(阿干支), '사간지'(沙干支) 등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561년보다 501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되면 이 학성리비는 냉수리비보다 3년 정도가 빠른 신라 최고비로 등극하게 된다.

연구소는 "이 학성리비는 현재 응급 보존처리 중이며 관계 전문가들과의 검토를 거쳐 비의 상세한 내용을 정리해 자료집 등으로 발간하고 학술심포지엄도 개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김태식기자>

 

 도로 굴착과정에서 포크레인에 의해 이 비의 일부가 훼손되는 바람에 글씨 한 줄 정도가 알아 볼 수 없게 됐으며 일부 그을음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주변이 도로 개설로 이동한 상태로 발견되어 원위치를 찾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듯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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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비석 보자' 학계 행렬에 곤혹

 

최광식 중앙박물관장도 경주硏에 들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15일 종일토록 시달렸다.

고대사학계 저명인사들이 연구소로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날 언론보도를 통해 발견 사실이 공개된 포항 학성리 신라고비(古碑)를 보기 위해 연구소를 찾은 것이다. 이 행렬에는 고려대 교수로서 신라사 전공자이기도 한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도 포함됐다.
연구소는 포항시를 통해 문화재청에 '학성리비'가 발견된 사실을 보고받고, 14일 현장에 출동해 비석을 연구소로 옮겨다 놓았던 것인데 이 소식을 접한 고대사학자들이 너도나도 비석 실물을 보자고 몰려든 것이다.
연구소 한 직원은 "어떤 중진학자는 방문 전에 미리 전화를 걸어와 연구소로 들른다고 하기에 막을 수는 없어 오시라고 했다. 혼자 오시는 줄 알았더니 제자나 다른 사람들을 잔뜩 데리고 나타나셨다"면서 "아무리 비석이 궁금해도 그렇지, 기본 예의는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직원은 "유물을 보겠다고 하면 우리가 그것을 막을 명분은 없다"면서 "하지만 종일 학계인사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연구소 업무는 마비되다시피 했다"면서 "기초조사와 유물 보존처리 등이 완료될 때까지는 이런 방문은 삼갔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점에서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산하 기관도 아닌 문화재청 산하기관에 나타난 것도 눈총을 받고 있다.
최 관장은 이날 연구소에 들러 포항 학성리에서 비석이 발견된 당시 포항공대 모 명예교수가 해 놓은 이 비석 탁본을 내놓고는 실물 비석과 비교해 가면서 판독 작업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최 관장 본인이 효성여대 교수 재직 시절 울진 봉평비라든가, 영일 냉수리비 판독에 참여한 전력이 있고, 또 신라사 전공자로서 이번 학성리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면서도 "그렇지만 기초조사도 하지 않은 유물을 보러 다른 기관에 나타난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이 관계자는 "박물관에서도 기초조사나 보존처리가 끝나기 전 유물은 원칙적으로 공개를 미루지 않느냐"고 덧붙이기도 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우리가 그 비석을 조사해야 하는데 왜 연구소가 가져갔느냐"는 식으로 문화재연구소에 따지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2009.5.16>

 

 

 

 

 

[조유전의 문화재 다시보기]

 <5> 인부가 발견한 신라최고 비석

 

옛 비석이 발견되면 문헌사학자들을 흥분을 감추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학자들은 비석에 새겨진 문자를 통해 그때까지 몰랐거나 의심되었던 당시의 일들을 해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항 중성리신라비(浦項中城里新羅碑)의 발견은 극적인 우연이었다.

이 비는 5월 포항시가 흥해읍 중성리 도로개설 작업장에서 주민생활개선사업을 벌이다 발견되었다. 도로변의 흙을 덤프트럭에 실어 나르고 있었는데 흙에 묻혀 함께 나온 이 비석은 그대로 길 옆에 방치돼 있었던 것이다.

 
이 마을에 살면서 일용 잡부로 일하던 김헌도씨가 이 돌의 모습이 비교적 평평하고 길이도 1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아 조경돌로 쓸모가 있겠다는 생각에서 새끼줄에 묶어 집으로 끌어다 놓았다.

그런데 비가 내려 빗물에 표면이 일부 씻기면서 글자가 보였다. 그래서 묻어 있는 흙을 물 조리로 뿌려가면서 빗자루로 쓸어 비문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두 200자가 넘는 글자가 새겨져 있음을 확인하고 대학 교수에게 부탁해 판독하도록 했다.

이 결과 이 비가 늦어도 서기 501년 아니면 그 이전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로써 포항중성리신라비는 1,500여년의 긴 잠에서 깨어 우리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만약 김씨가 집으로 옮겨다 놓지 않았다면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옮겨져 다시 땅속에 묻혔거나 아니면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철렁해 진다.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비석으로는 집안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가 있지만, 신라 진흥왕비는 북한산, 창녕, 마운령, 함초령에 척경비를 세웠다는 기록대로 모두가 확인됐다. 그러나 북한산순수비를 제외하고 비가 서 있었던 정확한 곳은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다.

그 뿐 아니라 삼국시대의 비석으로 경주 남산신성비, 영일 냉수리비, 울진 봉평비, 단양 적성비 등 신라비와 중원고구려비, 백제사택지적비가 있지만 하나같이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중성리신라비의 내용을 보면 한마디로 재산 분쟁에 따른 소송의 판결문인데 빼앗긴 재산에 대한 진상을 조사해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후세에 본보기를 삼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당시 화강석에 한자를 새길 수 있는 사회였다면 분명 문서로 기록하면 되었을 것인데 왜 굳이 어렵게 돌에 새겨 보관했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은 모두가 하나같이 자신들의 역사서가 있었음이 알려져 있어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기록서가 없어 질 것을 미리 알고 돌에 새겨두는 선견지명을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