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스크랩] 약봉 서성

道雨 2009. 10. 16. 16:07

 

 
대구 서씨 약봉 서성
1558년(명종13년)-1631년(인조9년) 자 玄紀 호 藥峯 시호 忠肅
약봉 서성은 퇴계 선생의 제자인 함재 서해의 유일한 혈육으로 안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청풍군수를 지낸 고성 이씨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였다. 서해 선생은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서울에서 안동으로 낙향해 아들 약봉을 낳았다. 약봉은 당시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태생이 화려했다.

약봉은 조선 초 명신 양촌 권근의 사위인 서미성의 5대손이요 서거정(徐居正)의 종현손(從玄孫)이다. 조부는 생원과 문과를 거쳐 예조참의에 올랐다. 5대조 이래 대과에 급제한 이가 세 분이다.

약봉의 외가도 명문이다. 그의 외조 이고는 안동의 명절(名節)로 이름난 임청각(臨淸閣) 이명(李水+名)의 아들이다. 또한 약봉의 장인인 광주목사(廣州牧使) 송영(宋寧)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송일(宋車+夫)의 손자다.

하지만 그는 매우 외로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생후 1년 반이 못 되어(명종14년, 1559) 부친이 2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집안에는 25세의 어머니 고성 이씨와 중부(仲父)인 춘헌공 서엄 내외만 있을 뿐이었다. 서엄에게는 아직 자녀가 없었다. 그리고 같은 해 백부인 서대(徐岱) 내외가 몇 달 사이로 별세했다. 그들에게도 역시 자녀는 없었다.

약봉은 세 살 때 모친을 따라 서울로 올라온다. 약봉이 서울살이를 시작한 것은 춘헌공 서엄의 제택(第宅·살림집과 정자를 통칭)이 있던 약현(藥峴)으로(현 서울 아현동 서울역 뒤 중림동 천주교회가 있는 자리) 그곳에서 10여 년간 서엄에게 글을 배웠으며 결혼까지 하게 된다.

약봉의 가문에는 당시 장수한 사람이 드물어 쇠락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엄은 총명한 어린 조카 약봉에게 문명(文名)을 기대했다. 이제 약봉에게 주어진 것은 재명(才名)과 수복(壽福)이었다.

이인(異人)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약봉의 모친은 서울 약현에다 안동 소호리 친정집을 본떠 큰 제택을 먼저 꾸몄다.

단촐한 가족임을 아는 이웃에서는 그 규모 때문에 비난할 정도였다. 하지만 모친은 “우리 집안이 지금은 이렇지만 훗날 창대해져 이 집도 협소할 날이 올 것입니다”고 자신했다. 그 소망은 생전에 실현되었다.

77세의 수를 누린 모친은 칠순 때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53세의 약봉 이외, 중견 문신으로 활동한 37세의 경우(景雨)와 국왕인 선조의 사위인 31세의 경주 등 4명의 손자, 손부 그리고 증손자 8명, 증손녀 1명 등 슬하에 19명의 자손이 가득했다.

이후 모친의 소망은 수백 년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그래서 ‘서지약봉(徐之藥峯)이요 홍지모당(洪之慕堂)’이라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다. 약봉 직계 본손 중에 문과 급제자가 123명이라는 사실은 그것을 증명한다. ‘모당’은 풍산 홍씨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1549-1615)을 지칭한다.

약봉은 어린 시절 중부인 서엄에게 학문을 배워 성장한 뒤 율곡 이이와 귀봉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9세(1586) 때 알성문과에 급제해 관료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학자로서보다 관료로 더 이름을 떨쳤다.

약봉은 경상, 강원, 황해, 평안, 함경, 경기 등 6도의 관찰사와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개성유수, 병조판서를 역임했고 지중추부사 겸 도총관 지의금부사 등의 직도 수행했다. 그리고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은 중신인 고명칠신(顧命七臣)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는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호위하여 함경도와 강원도 등지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함경도 마천령을 넘어 회령으로 들어간 두 왕자 일행은 그곳의 반민(叛民) 국경인 등에 의해 붙잡혀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겨지는 참담한 지경을 당한다. 천신만고 끝에 그 위기를 벗어난 약봉은 왕자 구출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고 북평사 정문부를 장군으로 추대하여 경성, 길주 등지에서 전공을 세운다.

비록 왕자 구출에는 실패했지만 반민 일당을 주살하고 그 지역의 여러 군(郡)을 평정하는 데도 큰 공을 세운다. 이런 사실은 지난해 일본에서 반환되어 올해 3월 1일 북한으로 인도된 함경도 의병전승기념비(北關大捷碑)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저술로는 증손자인 서문유가 주선해 간행한 약봉유고(藥峯遺稿)를 바탕으로 중간된 4권 2책이 남아 있다.

 

삼대 정승·삼대 대제학 배출

 
 약봉 서성 선생이 태어난 태실은 특이한 형식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삼대 정승과 삼대 대제학으로 대표되는 명문가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안동시 일직면 소호리에 있는 이 건물은 안채인 태실(一字 구조)과 사랑채인 소호헌(丁字 구조)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호헌은 현재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호리의 약봉 후손들은 안동에서는 ‘소호리 서씨’로 통하는데, 널리 알려진 양반이면서도 영남 남인(南人)의 구심지인 안동에서만은 인정받지 못한 처지다.

그 이유는 첫째 퇴계 문인의 후예였지만 후손들이 대부분 노론 쪽이었고, 둘째 일찌감치 서울로 생활 기반을 옮겨 안동에 뿌리를 공고히 내릴 여건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소호리 대구 서씨들과 마주한 곳에 후대에 정착해 살고 있는 한산 이씨 문중(목은 이색의 10대손이며 서애 류성룡의 외손자인 수은 이홍조가 입향조, 양지마을이라 함)의 경우 약봉가의 성취와 비교할 때 열세지만, 안동에서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을 소퇴계(小退溪)로 부르고 ‘소호리 한산 이씨’를 한 급 높게 친다.

 

귀암서원
귀암서원(龜巖書院)은 대구시 북구 산격동 산79-1에 있는 대구 서씨의 현조인 서침, 서거정, 서해, 서성을 배향한 서원이다.

귀암서원은 대구시 중구 동산동 중심가에 있었으나 번화가는 서원 입지와 잘 맞지 않아 현 위치인 산격동 연암공원으로 옮겨 중창했다.

대구 달성 서씨의 대표적 인물을 배향해 유림의 서원이면서도 대구 서씨 문중의 구심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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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기행 ④] 大丘 徐氏 - 유교적 범절과 德으로 지켜온 '흔들림 없는' 명문가 위상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④
대구 서씨 藥峯 서성 15대 종손 서동성씨, 소년 시절 큰집으로 양자… 중학생 때부터 불천위 제사 모셔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설운리에는 명문가 대구 서씨 약봉 서성 선생의 종택이 자리잡고 있다.
경기도 내에서 종가와 종택 그리고 종손과 불천위 사당을 고루 갖추고,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을 실천해 종가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집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약봉 종가는 이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의정부를 지나 하송우리라는 이정표와 육군 제1291부대 표지판을 보며 종택을 찾았다. 마침 묘소를 단장하고 있는 15대 종손인 서동성(徐東晟, 1955년생)씨를 만났다.

종손은 소년 시절에 백부(伯父)에게 출계(出系·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의 대를 이음)하여 약봉의 종통(宗統)을 이었다.

생가(生家·생부모 집) 부친은 약봉의 14대손인 서기원(徐基源, 1925년생)씨다. 80이 넘은 고령임에도 건강하고 온화한 모습에 절로 경의가 표해진다. 종택에 얽힌 이야기를 요청하자 한국전쟁 때의 수난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 지역의 대표적 종택에 걸맞는 건물 규모 때문에 인민군 사령부로 사용되었고, 펄럭이는 인공기가 목표점이 돼 미군기의 집중 폭격을 받아 전소됐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안동의 소호헌(蘇湖軒·조선 중종 때 약봉의 부친 서해 선생이 서재로 쓰기 위해 지은 별당) 앞에서 고색창연하게 자라던 50여 그루의 노송 역시 이 무렵 폭격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하는 수 없이 묘소 아래의 재실(齋室·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은 집)을 보수해 살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이 집이라고 한다. 첫눈에도 약봉 종택의 위상으로는 다소 미흡한 단촐한 신식 건물이다.

하지만 곱게 단청한 불천위 사당과 재실은 그런대로 규모를 갖추고 있었고 최근엔 신도비의 비각까지 조성했다.

약봉 종가는 서기원씨의 백씨(伯氏)인 서세원씨(1917년생)가 무남독녀를 남긴 채 일찍(25세) 세상을 떠나면서 종통의 맥이 끊길 위기를 맞았다. 당시 서기원씨는 열세 살의 어린 나이였다고 한다. 종가를 지키기 위한 고단한 여정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부친은 60세 전에 돌아가셨지만 아들들에게 평소 명문가라는 가르침과 경조 사상에 대해서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했다.

묘소를 수호하고 상대(上代)의 묘사 날짜를 조정하는 문제, 대종회와의 협조, 종친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 생전에 세세히 알려주었다.

종통을 잇기 위해 아들을 양자로 보낸 서기원씨의 처지를 영남지방에서는 보통 ‘대원군’이라 칭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400여 년을 사이에 두고 되풀이된 약봉가의 역사 순환엔 참으로 묘한 기분마저 든다.

춘헌공 서엄, 가풍 잇게 한 일등 공신

오늘날의 약봉가는 당연히 약봉 서성 선생의 성취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그 기반에는 약봉의 부친인 함재 서해, 그리고 그의 부인인 고성 이씨, 약봉의 중부(仲父)인 춘헌공(春軒公) 서엄(徐山+奄)의 뒷받침이 있었다.

특히 춘헌공은 약봉을 학문의 길로 인도했고 명문가 규수를 배필로 맞게 했다. 그는 또한 장래에 가문을 일으킬 인물임을 알아본 지인지감(知人之感)을 지녔고 지속적으로 도움도 주었다. 말하자면 후견인, 시쳇말로 멘토(mentor)인 셈이었다.

필자는 책으로만 보았던 춘헌공의 역할을 오늘날 약봉 종손의 부친인 서기원씨를 통해 다시 확인했다. 종통의 끊어짐은 종가의 문을 닫는 것을 의미한다.

그 위기의 순간에 서기원씨가 심사원려(深思遠慮)를 발휘했다. 종가에서 종손이 후사를 잇지 못하면 당내(堂內) 또는 근친 간에서 양자를 구하게 된다. 종손으로 양자를 가게 되면 자신은 종손이지만 생가의 부친은 종손이 아닌 ‘대원군’인 것이다.

안동 지방의 대표적 명문 광산 김씨 양간공파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 선생의 종가 역시 그러한 경우다. 김준식씨가 종손이고 생가 부친인 죽초(竹肖) 김택진(金澤鎭)씨는 ‘대원군’이다.

역사상 대원군으로 가장 유명한 흥선대원군의 경우 소위 수렴청정을 통해 정사에 적극 개입했다. 왕가가 그러할진대 사가(私家)의 종가 역시 생가의 부친은 종가의 일에 개입할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그 개입이 정도(正道)를 넘어 욕심에서 나오면 이는 흥선대원군이 나라를 그르친 이상으로 나쁜 폐해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약봉 종가의 생가 부친인 서기원씨는 문중의 학덕이 높은 어른인 문장(門長)과 같은 역할을 했다.


 
 
 

종손 서동성씨(52세)가 받았을 중압감은 일반인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렵다.

중학교 1학년 때 약봉 선조의 불천위 제사를 모셨다는 그는 이미 그때 문중사나 의례에 익숙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중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밖에 못나왔다고 말하지만, 그가 보인 예의와 언사 등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 이상으로 예사롭지 않다.

“제가 늦둥이를 보았는데,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그 녀석도 제사 절차에 대해선 훤히 알아요”라는 말에서 명문가는 역시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그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닌 것이다.

종손의 맏아들은 올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재료공학부에 입학했다. 그의 이름은 상덕(尙德)이다. 상덕은 퇴계 선생을 모신 도산서원의 사당 이름과 같다.

약봉의 부친인 함재 서해 선생이 젊은 시절 안동의 퇴계 선생을 찾아가 학문을 배워 크게 인정을 받았던 일이 오버랩된다. 역사의 반복을 또 한번 느낀다고나 할까.

 

약봉가의 가훈 - 勿怠爲善

 약봉은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여러 아들들에게, "나라 일이 이지경이 되었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너희들은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글을 읽고 선(善)을 행하도록 하여라. 가화(家禍)가 있다고 해서 상심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지금도 약봉가는 이 말을 요약해 '勿怠爲善(물태위선)'을 가훈으로 쓰고 있다. "착한 일을 하는 데에 게으르지 말라"는 뜻이다.

 

 
 
 

출처 : 양성이씨 정절공 종회
글쓴이 : 28世 玲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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