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백성 버린 선조 비판하려 써
[서울신문]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와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1542~1607년)은, 정계 은퇴 뒤 고향 안동 하회마을에서 수년간 은거하며 '징비록'을 썼다.
임란 한가운데 있었던 류성룡은, '내 지난 잘못을 반성해, 후환이 없도록 삼간다'(징비·懲毖)는 제목 그대로, 선조의 거듭된 정계 복귀 회유도 물리치고, 뼈를 깎는 심정으로 전란의 전말을 기록했다.
과연 류성룡이 '징비록'을 통해 진정 반성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박준호 국립청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최근 출간한 '풀어쓴 징비록, 류성룡의 재구성'(동아시아 펴냄)에서, 류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한 근본적인 의도는, 백성을 버리고 떠난 선조와 위정자들을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놓으려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 직설적인 비판은 불가능했으므로 류성룡은 행간에 이런 의도를 숨겨두었다. 예컨대 징비록에는 서울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치는 선조 임금을 향해 어느 농부가 이렇게 소리쳤다는 대목이 나온다.
"나라님께서 우리를 버리고 가시니, 우리들은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박 연구사는 "전란의 소식을 접하기 힘든 시골 농부가 이런 말을 했다고 보기 힘들다."면서 "류성룡이 농부의 입을 빌려 선조 임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은 것"이라고 말했다.
류성룡은, 임금이 조선 땅을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일본과 결사 항전할 것을 간곡히 청했으나, 선조는 결국 피란을 선택했다.
전란의 참혹함을 온몸으로 겪어낸 이들은 민초들이었다.
박 연구사는 '민심을 버리고 떠난 임금과 위정자들은 특권만을 누렸지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면서 '징비록은 반성과 책임을 모르는 그들을 대신한 류성룡의 반성문'이라고 말했다.
고문서학을 전공한 박 연구사는 2007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서애 서거 400주년 기념 특별전, '하늘이 내린 재상, 류성룡'의 담당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류성룡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됐다.
안동 종가를 드나들면서 문중의 도움으로, 국보 132호인 '징비록'초간본 등 희귀 자료를 직접 눈으로 보고, 종가 어른의 설명을 들으며 유적을 답사하는 기회도 얻었다.
'풀어쓴 징비록'은 징비록의 내용을 토대로 다양한 자료를 취합해 류성룡의 삶과 인생철학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민심을 최우선으로 여겼던 류성룡은 영의정까지 지냈지만, 장례 치를 돈이 없어 주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박 연구사는 "류성룡의 진면목을 알아갈수록 인생의 사표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면서 "민심을 읽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위정자들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진정한 영웅의 표상인 류성룡을 재조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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