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스크랩] 삼별초, 오키나와로 갔는가

道雨 2009. 8. 25. 15:26

[역사추적]


 

 

지독한 싸움이었다. 몽골과 고려 어느 쪽도 포기를 몰랐다. 그러나 결국 전세는 기울었고 끝까지 대항했지만 삼별초는 끝내 제주도에서 1273년 패배하고 만다. 그런데 전멸한 줄 알았던 삼별초가 오키나와에서 다시 부활했다. 13세기 아직 선사시대였던 오키나와 그곳에 문명이 태어났다. 오키나와 문명의 빅뱅. 삼별초는 그 미스터리에 열쇠인가? 


삼별초, 오키나와로 갔는가


아무도 풀 수 없었던 세계의 미스터리 그리고 우리완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오키나와의 역사, 헌데 최근 들어서 삼별초라는 고려의 군사가 오키나와 역사 전면의 등장을 하게 됐습니다. 삼별초 고려의 정예의 부대죠. 1273년 몽골의 의해서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비운의 전사들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13세기 초반 칭기즈 칸이 11개 부족을 통일해서 몽골 고원을 평정하고 그 세력은 한반도의 고려 또한 노리게 됩니다. 고려 정부는 강화도로 천도까지 하면서 저항해 봤지만 끝내 몽골에 굴복하고 말았죠. 하지만 삼별초는 그 후에도 진도에서 제주도까지 필사의 혈전을 이어갔습니다. 제주도에서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사라진 삼별초. 헌데 그런 그들이 오키나와에 나타났다. 먼저 오키나와에서 그 단서를 찾아보겠습니다.


따뜻한 4월의 바다를 건너면 아열대 온풍이 부는 오키나와가 기다리고 있다. 5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 군도. 다채로운 풍물 덕에 사시사철 관광객이 넘친다. 다양한 오키나와의 문화 속엔 한국과 선명히 겹치는 것들이 많다. 돼지고기를 먹는 방식이 우리와 상당히 비슷한데 즐기는 식성까지도 그렇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돼지고기를 먹어요. 돼지 울음소리만 먹지 않습니다. 전부 먹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날씬한 거예요.’

 

 

▶ 이미지 누르면 커집니다.

 

재래가옥이 모여 있는 마을은 마치 제주도 같다. 돌담 사이로 작은 길이 난 모양도 익숙한 풍경이다. 흡사한 모습은 그 뿐만이 아니다. 화장실 겸 돼지우리 변기 뒤쪽마다 일정한 공간이 있다. 배설물이 빠져 나가는 곳에 제주도처럼 돼지를 키웠다. 슈리성. 오키나와 최초의 왕성이다. 오키나와 최초의 왕국 류큐국이 세워진 때는 15C. 그 이전까지 오키나와엔 제대로 된 문명이 없었다. 그러나 류큐왕국(유구왕국)이 세워진 후 19C 말 일본에 편입되기 전까지  류큐왕국은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그런데 뒤늦게 출발한 류큐국의 독특한 역사엔 고려인이 있었다. 류큐국의 왕성인 슈리성에서 출토된 기와. 고려인이 만든 기와였다. 한 치 의심도 필요 없는 확실한 고려인의 기와였다.


우에하라 시즈카 교수 오키나와 국제대학 고고학

“계유년 고려와장조라는 글귀로 뒤집혀 쓰여 있습니다. 위아래에 이처럼 물고기 뼈 무늬를 볼 수 있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선명이 기록돼 있는 기와 고려 와장 조. 고려의 장인이 만들었는데 그 시기는 계유년이다.


“굳이 고려와장 즉 Made in Korea라고 새긴 이유는 한반도 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역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이것을 만들었다는 즉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굳이 이 남도 다시 말해 남쪽 섬에서 고려와장, 고려기와를 만들었다고 ‘자신이 여기에 있었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高麗 瓦匠 造. 고려가 오키나와의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이 기와 한 장 만으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자, 이 기와를 다시 한 번 보시죠. 고려의 장인이 언제 이 기와를 만들었는지 새겨져 있습니다. 癸酉年이라고 돼 있습니다. 바로 계유년입니다. 14C 전후에서 계유년은 1213년, 1273년,  1333년과 1393년 등이 있습니다. 헌데 뭔가 익숙한 숫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1273년. 1273년은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의해서 전멸했다고 알려진 해입니다. 과연 1273년 계유년에 삼별초는 오키나와로 이주했던 걸일까요.

 


그 실마리는 제주도에서 찾을 수 있다. 2007년 국립 제주 박물관에서는 탐라와 유구왕국이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오키나와와 제주도 등지에 유물을 전시하는 특별전. 그런데 오연숙 학예사의 눈에 뭔가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수막새 기와가 아무래도 낯이 익었다. 어디서 본 듯한 오키나와 기와의 문양. 확인 결과 그 낯설지 않은 느낌은 진도의 수막새 기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오키나와 기와와 진도의 기와가 똑같이 생겼던 것이다.


“두 곳의 유물을 처음 봤을 때 너무 흡사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용장산성에서 나오는 수막새와 오키나와에서 나오는 수막새가 똑같다는 느낌. 막연한 생각에서 직접 유물을 비교해 봤을 때 아 정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역사 속으로 풍덩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찍어낸 듯한 흡사함에 학자들은 크게 놀랐다. 윤용혁 교수 공주대 역사교육과의 말.


“그걸 보고 아 그동안 이러한 자료를 많이 봤는데 왜 이걸 구체적으로 연결을 시키지 못했는가. 좀 아찔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주도와 오키나와 그것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끈들이 있구나.”


오키나와와 삼별초의 접점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이는 오키나와의 최근 역사와 관계가 있다. 1972년까지 오키나와는 미국령 아래 놓여 있었다. 일본 정부는 27년 동안 오키나와의 통치 전권을 미국에 일임했는데 이 국제법상의 변칙은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망에 의한 것이었다.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간 계속된 광기의 전투로 오키나와는 폐허가 됐다. 철의 폭풍이라 불리는 폭격으로 인해 현민 전체 1/3에 해당하는 1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수백 년 동안 내려오던 유적지도 마찬가지였다.

 


그 잿더미 속엔 우라소에성도 있었다. ‘우라소에’, 선사시대 이은 갑작스런 류큐왕국의 발상지다. 줄곧 수렵, 채집 생활해오던 오키나와는 급작스럽게 중세시대를 맞았다. 우라소에성에 북쪽에 위치한 요도레. 요도레는 13C 에이소 왕의 무덤이다. 1273년 계유년 무렵에 지어진 이곳 요도레에서 고려의 기와가 출토됐다.


“고려기와가 출토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우리들은 이곳을 ‘기와 웅덩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오키나와는 전후 수습으로 유적이 복원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고려기와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슈리성의 기와처럼 우라소에성에서도 같은 글자가 발견됐다. 계유년에 고려의 장인이 만들었다는 계유년 고려와장조. 1273년 계유년. 그때 이곳에 고려인이 있었다. 고려의 장인이 만든 기와로 류큐국에 궁궐이 지어졌고 성이 지어졌다. 그리고 그 핵심부 왕의 무덤에도 역시 고려의 기술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 에이소 왕묘는 류큐왕국 최초의 왕 무덤이다.


시모지 야스히로 우라소에시 교육위원회

“이곳은 현재 요도레의 서쪽 방, 영조왕의 묘실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앞에 돌감실이 있는데요. 저희들이 추측하기에 본래는 이 돌함이 있는 곳에 나무 기둥에 기화를 얹은 건물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자연 동굴을 다듬어서 40제곱미터 쯤 되는 묘실을 만들고 그 안에 세 개의 돌로 된 유골함이 있다. 유골함엔 각각 약 20구의 왕족의 유골이 안치돼 있다. 시신이 부패한 뒤 유골을 다시 수습해 화장하는 것이 류큐의 풍습이었다.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1620년 그전까지는 나무로 건물을 짓고 그 안에 유골을 모셨다. 그리고 이 건물의 지붕에 기와를 올렸는데 그 기와의 문양이 고려의 것을 빼다 박은 것이다. 씨앗을 품는 씨방 주위로 연꽃잎이 둘러싸고 있다. 전형적인 고려의 연화무늬다.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기와는 고려 진도의 기와와 똑같이 생겼지만 일본식 기와와는 확연히 다른 문양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오키나와에서는 일본식 기와가 아닌 진도의 기와와 같은 기와가 만들어 진 것일까. 오키나와 기와와 닮은 고려의 기와는 진도의 용장산성에서 출토됐다. 용장산성. 산맥을 따라 흐르는 선명한 성벽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 아래 산등성이를 등지고 앉아 산성의 보호를 받고 있는 궁궐터가 보인다. 용장산성은 삼별초의 근거지. 이곳에 거점을 두고 삼별초는 몽골에 대항했다. 지난 1989년에 용장산성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그때 다량의 기와가 수습됐다. 역시 전형적인 고려 기와였다.

 

 

고용규 목포대 박물관 특별연구원

“바로 아래 건물지에서 발굴했던 거기에서 출토된 기와들인데 물고기의 뼈와 닮았다고 해서 어골문이라고도 하고 새의 깃털모양이다 해서 우상문이라고도 하는데 이런 것들이 고려시대 기본적인 유행했던 기와들입니다.”

 


용장산성을 발굴한 목포대 박물관에 또 다른 기와가 보관돼 있다. 진도 수막새 기와에 맨얼굴이다. 해바라기 씨를 확대해 놓은 것 같은 연꽃잎과 그 가운데 둥근 씨방,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계유년 고려기와는 400년 고려시대 중에서도 삼별초 항쟁의 근거지 진도의 것과 같은 모양이었던 것이다.


아케다 요시후미 교수 류큐대학 고고학

“1273년은 한반도에서 고려의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망한 때와 일치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저는 어쩌면 이 고려기와는 한반도에서 망한 삼별초 사람들이 오키나와로 건너와 이 류큐의 땅에서 새로운 거주지를 세우기 위해 성을 건설했고 그리고 그 안에 사용된 기와가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려와장조의 1273년과 삼별초 멸망의 해인 1273년. 이 일치는 정말 오키나와의 문명 그 중심에 삼별초가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오키나와 문명의 발상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멕시코의 마야문명, 이스터 섬의 석상처럼 신비롭고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였습니다. 헌데 그 풀리지 않던 답을 삼별초를 통해서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진도에서 발견된 수막새 기와와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수막새 기와입니다. 어떻습니까. 마치 한 사람이 만든 것처럼 똑같이 않습니까. 자 그렇다면 삼별초는 왜 구지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로 가야만 했던 것일까요.

 


무잡히 한 공격이었다. 11번째 공격. 몽골은 끝을 보기 원했다. 고려가 저항한 시기는 무려 39년. 1270년 마침내 고려정부가 항복하고 말자 삼별초는 이에 저항해 진도로 이동한다. 그리고 이곳 진도에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다. 삼별초는 9개월 만에 용장산성을 쌓고 원종의 6촌 친척인 왕온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다. 왕궁은 개경의 것과 흡사한 형태로 지었다. 산비탈을 깎아 계단식으로 조성해 총 23000여 미터에 17개 건물을 지었다. 개경의 왕궁처럼 정전도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다.


윤용혁 교수

“일단은 개경정부가 몽고에 복속했기 때문에 이것은 이제는 괴뢰정부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정통정부는 이제는 삼별초 정부다. 그래서 새로운 고려왕을 옹립하고 또 삼별초 정권이 진도로 내려가면서 새로운 국호를 정한 게 아니라 고려의 정통정부를 자처하고 내려갔거든요. 그런 점에서 개경정부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통정부, 이런 개념으로 삼별초 정권이 수립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77년 도쿄에서 한 특이한 문서가 발견됐다. ‘高麗牒狀不審條條(고려첩장불심조조)’ 삼별초가 일본으로 보낸 외교문서 내용을 일부 옮겨 적어 놓았다. 이시이 마사토시 교수 쭈오대 역사학의 말.


“1268년 외교문서에는 (몽골 원나라의) 연호가 쓰여 있었다. 그런데 이번 1271년의 문서에는 연호가 쓰여 있지 않다.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연호를 제정한 자에 대한 복종과 종속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원나라의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원나라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삼별초가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종속을 거부하고 자립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원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삼별초와 달리 원에게 굴복한 개경정부는 연호를 사용했다. 기와 장에 선명한 원의 연호 천력 3년 그리고 연우 4년 역시 원나라의 연호다. 연호를 쓰지 않고 계유년이란 연도만 표시한 삼별초의 기와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삼별초의 항전의지는 또 다른 문서에서도 확인된다. 삼별초는 일본에 병력과 식량을 요청했다.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으려 한 것이다. 필사의 의지였다. 이시이 마사토시 교수


“이 ‘길속기’와 ‘고려첩장불심조조’의 몇몇 조문을 종합해보면 삼별초는 일본에 협력을 의뢰하여 함께 원나라 병사에 맞서 싸우자고 요청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당시 국제정세에 밝지 못해 삼별초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무런 응답도 보내지 않았다. 결국 삼별초는 홀로 몽골에 맞서게 된다. 진도에서 계속된 전투, 삼별초의 격렬한 저항은 1년 동안 계속됐다. 그리고 1271년 5월 15일 여몽연합군의 총공세 결국 새 왕으로 추대된 왕온 마저 죽음을 맞게 된다. 삼별초는 진도를 마지막으로 이대로 꺾이는 듯  싶었다. 738년 전 핏빛으로 흥건히 물들었을 진도의 땅. 삼별초는 그 땅에 자신들의 왕을 묻었다. 진도의 그들의 한을 새겼다.


곽의진 삼별초 역사문화 연구회 이사장.

“진도의 그런 역사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삼별초 정신이라고 말을 한다. 삼별초 정신이 깃든 진도 이렇게 얘기하면서 어떤 의로운 정신을 갖고 있는 진도”


백성들도 먼저 간 왕의 뒤를 따랐다. 몽골의 수중에 놓인 진도에선 살아도 죽은 몸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수의 아녀자들이 그들의 왕과 그들을 지켜주던 전사들을 따라 몸을 던졌다.

 


박주언 진도 향토사학자

“퇴각을 하면서 여자들은 못 따라 가니까 몽고 군한데 잡혀서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여기서 자결을 하자 마음먹고 전부 둠벙에 빠져 죽었다. 이 부근에는 귀신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여기 만길 고개가 아주 무서운 곳이었다. 그리고 비가 오려고 하면 여자들 울음소리가 난다고 해서 해가지면 사람들이 별로 동행을 못하던 그런 곳이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진도에 이은 새로운 근거지는 바로 제주도. 삼별초는 바닷가를 따라 환해장성을 쌓으며 전열을 재정비한다. 다시 항몽의 시작이었다.


김일우 박사 제주문화 예술재단

“이 삼별초에서 군대를 보내서 결국 제주를 항몽의 배후 거점으로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제주도가 삼별초가 장악하게 되자 개경정부 관군이 쌓던 환해장성의 축성을 이어 받아서 계속 이제는 삼별초가 이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 방지하기 위해 계속 쌓게 되는 것이다.”

 


제주도 해안가 곳곳에서 발견되는 이 독특한 돌담이 삼별초가 쌓은 성이다. 환해장성으로 제주도 외곽의 방어선을 두르고 삼별초는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도 제주도에서는 삼별초의 흔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역시 어골문이 선명하다. 몽골군대가 상륙했던 함덕리 바닷가. 김병석 제주 함덕 노인회장.


‘(여몽연합군이) 여기로 상륙했습니다. 이 밑이 전부 백골이 있는 데에요.’


과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불과 몇 십 년 전만에도 이 일대는 여전히 생생한 몽골과 삼별초의 전투 현장이었다.


‘모래가 날려버리고 하면 거기에서 뭘 주워오냐 하면 엽전도 주워오고 고려 때 숟갈도 주워다가 엿장수에게 사탕도 바꿔먹고... 그렇게 했다고요.’

‘4·3하고는 상관이 없나요?’

‘상관이 없어요. 4·3때는 불과 사람 죽었다고 해야 불과 몇 명씩 데려다가 사살한 것 뿐이지 우리가 어렸을 적에 봤던 그런 백골하고는 완전히 다르죠. 단검도 나왔어요. 칼, 창 같은 것’

 


삼별초가 제주도에 주둔한 2년 동안 항전의 거점이었던 항파두리성.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 안쪽이면서 방어에 유리한 최적의 지형을 갖추고 있었다.


김일우 박사

“제주도의 항몽의 거점을 설정했을 때 어떤 지형이 적합했는가, 그때부터 아마 항파두리성이 이쪽 지형이 항몽의 거점으로 또 올랐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기적으로 봤을 때 3년 이상의 제주도 자연 지형을 파악한 결과 마지막 항몽의 거점은 항파두리성으로 정하자고 그런 계획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하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제주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항전의 흔적. 목숨은 끊겼을지언정 뜻은 꺾지 못했다. 1273년 봄. 삼별초는 제주도에서 전멸했다. 역사 속에서 그들의 자취는 더 이상 없다. 삼별초는 사라졌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믿었던 사실이었다.


김일우 박사

“그 도망간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회유하고 돌아오라고 사면령이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려에서는 강제로 찾아내는 기구를 설치하게 되는데 그다지 커다란 효과를 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봤을 때 삼별초의 탈출병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반드시 죽음을 당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아마 보다 멀리 있는 지역 한반도 지역보다는 보다 더 멀리 오키나와나 큐슈 지방이 더 그들이 선호하는 피난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사라져 버린 줄로만 알았던 삼별초는 2년 전 예상치 못한 단서를 내놓았고 역사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제주도와 오키나와 사이 삼별초의 새로운 바닷길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지속해서 표류민이 발생해 왔습니다. 조선시대 후기를 예로 들면 약 270년 간 1020건으로 10037명의 표류민이 발생을 했습니다. 헌데 특이한 것은 특히 겨울철에 표류민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실록을 토대로 통계를 뽑아보면 10월부터 1월까지 월평균 40건의 평균 표류가 발생하는데 비해서 4월부터 8월까지는 0.5건에 불과했습니다. 삼별초가 진도와 제주도에서 진압된 것은 각각 4월과 5월. 삼별초는 잔잔한 바닷길을 따라서 그리 힘들이지 않고 오키나와도 의도적으로 이주를 했던 것 같습니다. 고려군사 삼별초는 어떻게 오키나와로 이주했을까요. 자 다시 오키나와입니다.


봄이 되면 오키나와의 해안으로 쓰레기가 떠내려 온다. 한국에서 흘러간 것도 꽤 발견된다. 부산에서 버리면 오키나와에서 줍는다는 말도 있다. 떠내려 온지 꽤 오래된 것 같은 소주병도 보인다. 노를 젓지 않아도 얼마든지 도착할 수 있는 잔잔한 봄 바다의 해류다. 바닷길은 그렇다 치더라도 삼별초는 왜 익숙한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를 선택하게 됐을까. 오키나와 본 섬에서 9시간 일본 본토를 향해 가면 가고시마현의 도쿠노시마에 도착한다. 오키나와 열도에 속한 도쿠노시마. 이곳에 단초가 있다.


도쿠노시마에서 1983년부터 가무이야키라는 도기를 굽던 가마가 발굴되기 시작했다. 오키나와 열도에서 가장 오래 된 가마유적이다. 신자토 아키토 도쿠노시마 이센초 교육위원회


“여기에는 7개의 가마가 파여 있었습니다. 산의 사면에 구멍을 파 도자기의 가마를 만들었습니다. 가마의 밑에는 나무를 태운 후 숯이 나온 터가 발견되었습니다.”


아직도 불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실제로 이곳에서 구운 도자기입니다. 가무이야키라 불립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1000년 전 즉 11세기에서 14세기까지 300년 동안 제작되었습니다. 물고기 뼈 문양의 스탬프입니다. 이것이 한국의 도자기와 매우 흡사합니다.”

 


도쿠노시마에서도 고려의 어골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자기란 뜻을 가진 가무이야키. 고려의 도자기 장인이 건너온 것일까.


‘고려 사람이 그럼 여기에 온 겁니까.’

‘이 문양과 고려 시대 도자기의 문양이 매우 흡사합니다. 그 시기 도쿠노시마 사람들은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는 기술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돌연 이러한 도자기가 제작되었다는 것은 고려인이 이곳으로 건너와 이 도자기 기술을 가르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흙을 빗어 구어 그릇을 만드는 방법도 알지 못했던 10C. 이 일대 주민들은 신석기시대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오키나와는 12C 초까지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는 사회였다. 도쿠노시마엔 150여개 고려 가마터가 있어 상당한 양의 도기를 생산했을 것이다. 그 시기 도쿠노시마는 오키나와 열도의 유일한 도기생산지였기 때문에 오키나와 전역에 그릇을 공급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도기는 1273년 이전 고려가 오키나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케다 요시후미 교수

“13C 후반 다시 말해 1200년대 후반에 오키나와사회는 큰 변화를 겪습니다. 각지에 성을 축조하여 점차로 류큐왕국으로 묶이는 움직임이 발생하였습니다. 저는 오키나와에 다양한 사람들이 외부에서 건너왔다고 즉 중국, 한반도, 일본과 같은 곳에서 사람들이 많이 건너오면서 오키나와사회가 변화를 겪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삼별초 사람들이 오키나와로 건너와 오키나와 사회 변동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11C 선사시대에서 패총시대로 넘어가며 멧돼지를 사냥하며 조개를 줍는 채집생활을 하던 오키나와. 패총시대를 지나 류큐왕국이 세워질 즘 오키나와는 비로소 철기를 사용하며 서서히 농경사회를 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삼별초가 이주한 것으로 보이는 13C 1273년 이후 오키나와엔 갑자기 백여 개가 넘는 성이 생기기 시작한다. 외부의 자극 없이 이런 정도의 갑작스런 문명의 발생은 거의 불가능한 일.


“오키나와 역사를 살펴보면 대략 고려의 삼별초가 무너진 시기와 동일한 시기에 오키나와에서는 구스크라는 성이 많이 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구스크의 석벽은 일본 본토의 석벽과 달리 지형에 따라 탄력적으로 변화시켜 쌓았습니다. 이렇게 쌓는 방법은 한반도의 고려시대 성 혹은 그 이전인 삼국시대의 성의 축조 방법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오키나와 구스크의 석벽에 고려의 기술이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13C부터 성을 쌓기 시작한 오키나와는 14C 우라소에에서 슈리성으로 왕성을 옮기며 국가의 모습을 갖춰 나간다. 그리고 해상무역을 키워나가며 급격한 발전을 이루는 류큐왕국. 15C는 명과 일본의 독점권을 따내 대교역의 시대를 열었고 16C엔 대만, 베트남, 인도네시아와도 교역 고려와 같은 해상왕국이 됐다. 삼별초, 고려를 위해 싸우다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이제 다시 고려의 기개로 오키나와의 문명의 당당함으로 일어서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736년 전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전사들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 우린 그들에 존재를 종결이란 이름으로 단정 지었고요. 삼별초는 어느 한 시기 한반도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져 버린 고려의 군사로 남게 됐습니다. 말 그대로 단절이었지요. 어쩌면 1273년 이후 삼별초는 수차례에 걸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린 과거로부터 전해져 오는 메시지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정이라는 눈가리개를 벗어버린 지금 우린 이젠 비로소 과거와의 대화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려의 정예군사 삼별초의 귀환입니다.



※ 저작권은 KBS <역사추적>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출처 : 책을 벗 삼아
글쓴이 : 문화재지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