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그만 떠나시죠, 인권이 숨막힙니다”

道雨 2010. 11. 26. 12:28

 

 

 

“그만 떠나시죠, 인권이 숨막힙니다” 

- 국가인권위원장에게 보내는 인권위 간부의 공개 서한…
- 독립성 대신 독단을 택한 자격미달 위원장을 지켜보는 참담함에 대하여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은 사퇴하지 않았다. 11월16일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저를 포함한 위원회 구성원들이 위원회의 독립성을 바탕으로 인권 관점에서 토론하고 판단하고자 했습니다. …저에게 부여된 소임을 변함없이 충실히 수행할 것입니다.”

사퇴한 이는 따로 있다. 인권위원 3명, 전문·자문위원 61명. 유남영 상임위원은 물러서며 “현병철 위원장 취임 이후 위원회의 추락의 바닥은 어디인지를 지켜보았다”고 말했다. 334명의 법학교수·변호사, 621개 시민·인권단체도 악을 썼다. “인권위원장 사퇴하고, 대통령은 사과하라.”

누가 옳은가. 인권위 현직 간부가 직접 나섰다. <한겨레21>을 통해 ‘인권위 퇴락’의 진실을 고발했다. 자신이 모시는 대한민국 국가인권위원장의 말이 ‘뻔뻔한 거짓’이라고 조목조목 반박한다. 수장의 거짓은 직원의 수치를 부르고, 수치는 에염이 된다.

빈자리는 금세 채워졌다. 김영혜 변호사가 대통령 추천 몫의 새 상임위원이 됐다. 한나라당 몫의 상임위원에는 홍진표 <시대정신> 편집인이 추천됐다. 독한 농담이 나온다. “이러다간 현 위원장이 가장 인권적이겠다.” 11월25일 인권위가 출범한 지 딱 9년이 된다. 인권위는 충분히 능멸당했다. 출범기념일, 지도부는 대외 봉사활동을 추진 중이다. 기념할 게 없고 반성할 게 없다는 말이다. 인권위가 인권위를 능멸하고 있다. _편집자

 

 

» 지난 11월9일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이 국정감사에 출석했다. 그는 “인권위는 잘 운영되고 있다”고 말했다.한겨레 박종식

요즘 밤마다 가위에 눌립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팔다리가 저려오곤 합니다. 인권위를 만들기 위해 싸웠던 사람, 인권위에 열정을 묻고 떠나간 사람, 침몰하는 인권위를 부여잡고 호소하는 사람들에 파묻혀 불면의 밤을 보냅니다. 그들은 제가 안부를 묻기도 전에,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기도 전에 등을 돌리고 떠나갑니다.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가지만 매번 힘에 부쳐 맥없이 쓰러집니다.

출근길이 괴롭습니다. 신문에서 라디오에서 TV에서 인권위는 끝없이 모욕을 당합니다. 생기가 돌아야 할 일터는 침묵의 터널로 들어선 지 오래입니다. 동료들의 말과 글에서 힘을 얻기보다 조롱과 냉소가 느껴집니다. 지인들은 휴대전화로 안부를 물어옵니다. 힘들 때 의지한 인권지기들도 무더기로 결별을 선언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행여 가족이 인권위 속사정을 물을까 두렵습니다.


 


 

인권 문외한의 한심한 발언들

공무원이 조직을 향해 쓴소리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직원이 기관의 장을 직접 겨누고 진퇴를 거론하는 건 초유의 사태입니다. 세계가 부러워할 만한 국가인권기구를 만들었다고 한껏 자부심에 들떴던 게 불과 2년여 전인데, 그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왜 시민사회는 “이럴 바엔 차라리 인권위 문을 닫으라”고 외치는 걸까요? 저는 오늘 그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지난해 7월 현병철 위원장님이 취임하셨습니다. 적잖은 사람들이 “친일파의 후손이다. 연구 실적이 전혀 없고 그나마 몇 편의 논문도 중복 게재나 표절이다. 인권 분야 활동 경력이 전무하다”는 등의 이유로 부정적 평가를 내놓았습니다. 당시 인권위 내부에서는 “전임 위원장이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 차기 의장국 선임을 염두에 두고 물러났는데 영어도 못하는 사람을 임명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비아냥까지 나왔지만, 저는 크게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조직이 21%나 강제 축소되고 국민 기본권이 총체적으로 후퇴하는 현실 앞에서 어떤 위원장이 오더라도 사태의 심각성에 공감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위원장님이 당장은 인권 문외한이라는 멸시를 받더라도 차츰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2개월 뒤 위원장님은 국회에 출석하셨습니다. 그날 위원장님의 ‘인권위 독립성 부정’ 발언은 인권위 전체 구성원을 충격에 빠트렸습니다. 위원장님은 여당 의원의 질의에 답하면서 “법적으로 독립기구이기는 하나 행정부에 속하는 조직”이라는 취지의 발언에 동의했고, 더 나아가 행정안전부가 강행 처리한 인권위 조직 축소에 대해서도 “이유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독립성을 생명으로 여겨온 인권위는 이 순간 ‘공권력의 감시견’이라는 위상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지난 11월16일 위원장님은 언론과 시민사회의 비판에 대한 해명 자료를 발표했습니다. 이 자료에서 위원장님이 인권위의 독립성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음을 확인하고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위원장님은 “국가기관으로부터의 독립성뿐 아니라 사회세력이나 단체로부터의 독립성도 포함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엔이 채택한 파리원칙에서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적 위상이 중요한 의제로 들어간 것은, 인권위가 해야 할 본연의 기능이 공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원장님은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할 인권 공동체를 향해 “압력에 좌지우지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위원장님을 비판하는 시민·인권단체들이 아무리 밉더라도 그 발언은 과녁을 한참 비켜간 것입니다.

 

“정치적 파장이 크다… 안 하면 안 되겠나”

» 인권위 파행 일지

지난 11월10일 국가인권위원회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가 있었습니다. 인권위 직원들은 하루 종일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위원장님의 발언을 지켜보았습니다. 상임위원 두 분이 사퇴하고 조직이 술렁거리는 시점에서 위원장님이 사태를 잘 수습해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그러나 국정감사가 시작되자마자 여기저기서 한숨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메신저와 내부 게시판에 울분을 토하는 글들이 이어졌습니다. 위원장님이 일부 의원한테서 “안드로메다에서 왔느냐? 득도한 분이냐?” 등의 조롱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위원장이란 분이 인권위가 처한 현실을 몰라도 어떻게 저렇게 모를 수 있을까? 직원들은 의심하고 또 의심했습니다.

위원장님은 국정감사 답변과 해명 자료에서 자신이 취임한 이후 위원회의 실적이 오히려 좋아졌다는 취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근거로 제시한 결정들을 살펴보면 단순한 숫자 부풀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원장님은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위원회 설립 이후 17건의 권고 중 7건이 취임 이후에 나왔다고 주장했지만, 해명 자료에는 어이없게도 표현의 자유와 무관한 전자메일 압수수색이나 불온서적 사안까지 담겨 있습니다. 그나마 제시한 사례들도 대부분 위원장님이 편법을 무릅써가며 기능을 위축시키려 했던 상임위원회의 결정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표현의 자유 안건이 상정될 때마다 담당자에게 “정치적으로 파장이 크다. 이거 안 하면 안 되겠느냐”고 말한 기억조차 머리에서 지우신 건가요? 위원회 내부에서 위원장님이 표현의 자유에 민감하다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그러다 보니 간부들은 집회·시위의 자유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위원장 결재를 받는 것조차 꺼리고 있습니다.

위원장님은 혹시 잊으셨을지 모르지만, 지난여름 유엔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외교통상부를 통해 세 차례에 걸쳐, 위원장님을 방문할 때 상임위원도 함께 만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위원장님이 끝내 그 부탁을 거절하자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은 정해진 오찬까지 취소하며 위원회를 떠났습니다. 그는 한국 체류 일정 마지막 날 기자회견에서 “인권위가 중요 사안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이 실망스럽다”며 혹독하게 비판했습니다. 인권위 출범 이후 최대의 모욕이라 할 수 있는 장면이 불과 몇 달 전에 벌어졌는데도 위원장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표현의 자유를 성과로 거론하시더군요. 이런 걸 두고 세상 사람들이 염치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독재라도 할 수 없다”는 인권위원장

» 서울 무교동 국가인권위에선 현병철 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는 진보단체(오른쪽)에 맞서 위원장을 지지하는 우익단체가 맞불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한겨레21 류우종

인권위 직원들은 위원장님이 해명 자료에서 성과로 제시한 내용을 접하며 황당함을 감추지 못합니다. 진정 건수 증가가 위원장님의 취임 이후 실적과 무슨 관계가 있던가요? 진정 사건 처리 일수 단축은 부족한 인력에도 야근을 마다한 조사관들의 공으로 돌려야 마땅하지 않은가요? 국제 무대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요? ICC 승인 소위에 참석해 홀로 분투하고도 위원회를 떠나야 했던 유남영 전 상임위원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나요? 물론 누군가 써준 걸 그대로 읽으셨겠지만, 역대 어느 장관도 흉내내지 못할 경지로 보입니다.

위원장님의 근거 없는 낙관과 달리 인권위 직원들은 근래 엄청난 벽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이미 보고를 받으셨겠지만 오랫동안 준비해온 사회권 심포지엄과 정보문화 향유권 토론회는 발제자와 토론자의 집단 사의 표명으로 무산됐습니다. 또한 조사관이 인권 현안에 대해 전문가의 조언을 구할 때 거절당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조사관들은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할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나오는 피진정기관과 고통스럽게 맞서야 합니다. 공문으로 자료를 요청해도 맘대로 하라는 식으로 버티는가 하면, 인권위 권고를 대놓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피진정기관이 ‘검토 중’이라는 이유를 달아 사실상 거부하는 사안까지 감안하면, 위원장님 취임 이후 권고 수용률은 40%대에 머물고 있습니다.

인권위는 다른 어떤 기관보다 민주적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원장님 취임 이후 인권위는 합의제 기구를 무색하게 하는 독단과 독선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상임위원과 국·과장급 간부들이 정기적으로 업무를 점검하던 월간 업무보고가 일방적으로 폐지됐고, 상임위원의 의안제출 권한까지 막았습니다. 문경란·유남영 두 상임위원의 사퇴는 결국 위원장이 원하면 언제든 상임위 안건을 전원위로 넘길 수 있는 운영규칙 개정안 상정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이는 1인1표제를 기본으로 하고, 입법·행정·사법 3부에서 고루 추천해 운영되는 합의제 위원회 조직의 근간을 뒤흔드는 반민주적 행태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내부 조직 운영은 또 어떤가요? 대다수 간부들은 위원장에게 찍힐까 무서워 입을 다물고 삽니다. 그 틈에서 위원장을 보좌하는 분들은 인사와 평가를 무기로 숨통을 조입니다. 지금이 구한말도 아닌데 인권위 내부에 ‘대원군’이니 ‘대원군 형님’이니 하는 볼썽사나운 호칭이 나도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위원장님이 듣고 싶은 얘기만 듣고, 불편한 사람들은 가까이 두지 않는 데서 비롯됐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얼마 전 어느 칼럼에 “인권위원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라는 내용이 실렸습니다. 요즘 언론과 자료를 통해 위원장님의 숨겨진 모습이 하나둘 드러날 때마다 정말 아무나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되새깁니다. 내부에서 들리는 바대로라면, 어떻게 인권위원장이 다문화사회를 설명하면서 ‘깜둥이’란 표현을 쓸 수 있나요? 어떻게 한 나라의 인권을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독재라도 할 수 없다”고 윽박지를 수 있나요?

 

직원들 박수 받으며 떠날 수 있기를

제가 처음 공직에 들어설 때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공직에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의 마음가짐이 한결같아야 한다’는 문구입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나아가되 그곳이 자신의 자리가 아니다 싶으면 기꺼이 물러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수많은 학자·법조인·인권활동가·종교인이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위원장님이 직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떠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밤 꿈에서는 꼭 그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 현직 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