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위에 사찰’이 주제인 이 카툰은, 1판에선 ‘사찰’의 얼굴을 쥐로 표현했지만 이후엔 사람 얼굴로 바꿨다. 선글라스는 그대로지만, 풍자로선 본질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지(G)20 포스터에 쥐를 그려 넣었다고 공안기관들이 길길이 날뛰는 상황에서, 이런 수정은 의심받기에 충분했다. <한겨레>마저 권력의 겁박 앞에서 미리 자기검열을 통해 권력에 순응한 것 아닌가.
물론 당치 않은 해석이다. 그런 소지가 있었다면 뒤늦게 끄집어내 화를 자초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상기시키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제 권력의 억압이 추론·연상·상상 등 내면의 활동에까지 장애를 일으키는 단계로 진입했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사실 쥐만큼 이 그림판 주제에 알맞은 매개체는 없다.
쥐는 근면, 다산 등과 함께 어둠, 암약, 엿듣기, 엿보기 따위의 생태적 습성을 보인다.
이 정권이 출범하던 2008년 무자년(쥐띠해) 벽두 정권의 딸랑이들은 쥐의 긍정 이미지를 부각시키며, “전 국민이 부자가 되도록, 쥐의 해야 힘차게 솟아라”라며 환호작약했다.
그러나 긍정 이미지가 아무리 강조돼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처럼 쥐의 생태적 관습적 이미지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쥐는 여전히 간첩 따위를 그리는 데 이용됐다.
<한겨레>가 이런 상투형의 표현까지 바꿨으니 수상쩍지 않을 수 없지만, 그 배경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제 ‘쥐’ 하면 이명박 대통령을 떠올리게 되는 현실이 됐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표현은 이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비하가 될 수 있다! 장봉군 화백도 이를 인정했다.
그러나 화제도 그렇고 그날 1면 머리기사도 그렇고, 쥐 그림에서 이 대통령을 연상하는 건 비정상이었다. 기사는 청와대 행정관으로 파견된 국정원 요원이 야당 당수, 국정원장 등을 사찰했다는 것이었다.
쥐 그림에선 국정원 요원이나 총리실 사찰팀을 연상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현실은 엉뚱한 장면에서도 쥐가 이 대통령을 연상시키게끔 했다.
이 대통령으로선 답답하겠다. 하지만 하소연할 수 없다. 책임은 바로 그와 그 정권에 있는 까닭이다.
생김은 물론이고 전대미문의 사찰 파문 속에서도 짱박혀 있는 따위의 행태적 특성 따위는 제쳐두자.
이 정권은 그동안 미네르바 구속, 피디수첩 기소 등으로, 상상력에 끊임없이 억압을 가했다.
지(G)20회의 포스터에 그린 쥐 그림 사건 수사는 결정타였다. 낙서 수준의 그라피티를 공안사건으로 분류해 관련자를 불법 구금하고, 구속영장까지 청구하기도 했다. 조직 사건으로 확대하려는 조짐까지 보이기도 했다.
5공 시절 전두환씨를 연상시킨다고 대머리 탤런트의 방송 출연을 금지한 것이나, 박정희 시절 민주주의·자유·인권 등의 낙서를 반국가사범으로 징치했던 것보다 더 졸렬하다. 그러나 상상력에 가한 상처는 차이가 없다.
쥐는 이 대통령에 대한 풍자로 등장했다. 지금은 이 대통령이 쥐의 아바타쯤으로 이해된다. 상황이 이 정도라면,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도 함부로 쓸 수 없다.
쥐라고?
대통령이 엿보고 엿듣는다고, 그건 사회질서와 공공의 안녕을 해치는 공안 문제다. 통화 내역 뒤지고, 구금·구속하고, 배후를 뿌리뽑아랏!
G를 ‘쥐’로 읽어 포스터에 쥐를 그린 것이나, 남의 말을 엿듣는 쥐를 함부로 떠드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취임할 때 칭송되던 쥐는 이제 비슷한 그림은 물론 말조차 조심해야 할 금기가 되었다.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엉터리 주술을 풀어야 한다. 치명적인 데 비해 어려운 일은 아니다. 상상과 표현에 대한 억압과 금기를 깨면 된다.
장 화백이 ‘쥐 그림’을 바꾼 이유
» 곽병찬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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