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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는 밥좀 주오”

道雨 2011. 2. 8. 15:34

 

 

 

 

“남는 밥좀 주오” 글 남기고 무명 영화작가 쓸쓸한 죽음
“나는 5타수 무안타” 자조
월세 밀리고 가스 끊긴채 병마와 굶주림에 시달려

 

 

단칸방에는 채 마르지 않은 수건이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온기는 느낄 수 없었다. 이미 가스가 끊긴 지 오래여서 음식을 해 먹은 흔적도 없었다. 마실 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설을 앞둔 지난달 29일, 유망한 예비 시나리오 작가 최아무개(32·여)씨는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의 월셋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미 몇 달째 월세가 밀린 상태였다. 형편을 딱히 여긴 인근 상점 주인들이 외상을 주기도 했지만 최씨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깡마른 상태로 숨진 최씨를 발견한 사람은 같은 다가구주택에 살던 또다른 세입자 송아무개(50)씨였다.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

 

최씨는 사망 전에 송씨의 집 문 앞에 이런 내용의 쪽지를 붙여놓았다.

사정을 딱하게 여긴 송씨가 음식을 챙겨 왔지만, 이미 최씨의 몸은 싸늘해진 상태였다. 최씨가 누운 자리 옆으로 열이 식은 전기장판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동네 주민들도 최씨의 모습을 본 지 사나흘이 지났을 때였다.

송씨의 신고를 받은 안양시 만안경찰서갑상선 기능 항진증과 췌장염을 앓던 최씨가 수일째 굶은 상태에서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씨가 일하던 영화계에 이런 사실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그의 지인들 사이에서는 최씨를 열악한 환경으로 내몬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탄식이 쏟아졌다. 극소수를 제외한 예비 영화인들은 생계조차 이어가기 힘든 대우를 참아내야 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최씨의 선배인 한 현역 영화감독은 “신인 작가들은 2000만원 정도인 계약금의 극히 일부만 받고 시나리오를 일단 넘긴 뒤 제작에 들어가야만 잔금을 받을 수 있다”며 “제작사가 좋은 시나리오를 묶어두기 위해, 기약도 없는 제작 일정까지 작가 같은 약자들에게 부담을 떠넘기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최씨는 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영화과(시나리오 전공)를 졸업한 뒤 실력을 인정받아 제작사와 일부 시나리오 계약을 맺었지만, 영화 제작까지 이어지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려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최씨는 평소 지인들에게 “(영화화된 것으로 보면) 나는 5타수 무안타”, “잘 안 팔리는 시나리오 작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지난 1일, 최씨의 유가족들은 충남 연기군에 있는 은하수공원에서 최씨를 화장했다. 박종원 한예종 총장과 이창동, 김홍준 교수를 비롯해 한예종 영상원 동문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유가족들에게 건넸다.

 

 

최씨를 아꼈던 선후배들은 그가 직접 쓰고 연출한 단편영화 <격정소나타> 상영회와 유작 시나리오 읽기 등 추모 모임을 열 예정이다.

최씨의 작품을 좋아했다는 후배 작가 윤아무개씨는 트위터에 추모글을 남겼다.

“그녀의 <격정소나타>는 단편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내겐 훌륭한 참고서 같은 영화였다. 언젠가 판을 기웃거리면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녀가 구름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행복하시기를.”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

 

 

 

 

                    대나무꽃
 

 

대꽃처럼 귀하면서도 아픈 꽃이 없다.

대나무는 60~120년 일생에 딱 한번 꽃을 피운다. 꽃은 하루에 피고 진다. 그 모습은 생의 정점에서 휘황하게 꽃을 터뜨리는 보통 식물과 다르다.

대나무는 말년에야 겨우 꽃대를 밀어올리고는, 그대로 서서 말라 죽는다. 한 그루가 꽃을 피우면 전염병처럼 꽃이 번진다. 그래서 대밭은 한몸으로 죽는다.

사람들은 예부터 대꽃을 보면 살이 낀다고 했다. 그러나 늘 당당하고 꼿꼿하게 살다가 한순간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갈 줄 아는 대나무의 성정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고대 인도인들과 현대의 일부 힌두교인들은 인생을 네 시기로 나눴다.

자라면서 학문을 익히고 세상을 배우는 범행기, 가정을 꾸리고 사회생활을 하는 가주기에는 속세의 삶에 충실한다. 다음 임서기에 부부는 재산을 자식에게 넘겨주고 숲 속으로 들어가 검소한 종교생활을 실천한다. 생애의 마지막 단계인 유행기에는 모든 것을 주위에 나눠주고 걸식하면서 수행한다. 가진 것은 밥그릇, 지팡이, 물병뿐이다.

 

우린 덜 갖고 덜 먹으며 이웃과 나누며 살자는 다짐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늘 잠깐의 찌질함과 ‘빈티’도 견디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이기심과 욕망으로 오염된 몸과 마음 탓에 양심은 늘 불편하다. 성직자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오늘도 아내 약국 차려주려고 남의 돈 가로챈 큰 교회 목사님 기사가 뉴스를 탄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주일을 지키지 않은 죄가 아니고

십일조를 내지 않은 죄도 아니고

피눈물 흘리는 이웃을 보고도

눈 깜짝하지 않고 밥 잘 먹는

무정(無情)한 죄가 가장 큰 죄라고

눈 맑은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무조건 아멘 했다.”

 

          - (조호진 시집 <우린 식구다> 중에서 ‘아멘’)

 

 

그래도 우린 이런 ‘대꽃’ 목사님이 훨씬 많다고 믿는다.

 

<함석진 기자 sjham@hani.co.kr >

 

 

 

 

 

 

 

       예술가의 마지막 말이 굶주림에 관한 것이라니





                                             
 

이 땅에서 최고은이라는 이름으로 어느 분이 살다갔다고 한다. 숨을 거둘 때 그녀는 고작 서른 둘, 삶의 꽃다운 나이였다. 그녀는 단편영화의 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로 밥벌이를 했다.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 얼마나 좋은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가 죽은 뒤 쏟아져 나온 언론 보도를 통해 그녀가 < 격정 소나타 > 의 감독이었으며 이 영화가 지난 2006년 제4회 아시아국제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 단편영화상을 수상하며 그녀가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또 누군가 일찍 죽을 수도 있다. 우리를 새삼 놀라게 하는 것은 갑상선 기능 항진증과 췌장염을 앓고 있던 그녀가 '굶주린 채' 죽어갔다는 점이다.

"그동안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 이것은 그녀가 이웃 주민의 집 대문에 남겨놓았던 쪽지의 일부라고 한다. 저 글귀 중에서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와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사이에 무언가의 말이 빠진 듯 어색하다. 고인에게 누(累)가 되지 않는다면 나는 저 말들 사이에 "너무 배가 고파요!"라는 말을 넣어주고 싶다. 어쩌면 저 말이야말로 그녀가 정말 외치고 싶던 외마디 비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굶주린 채 죽어가는 동안에는 아무도 몰랐고 지난 달 29일 그녀가 죽고 열흘이 지나서야 수십 군데의 언론에서 이 비보를 전하기 시작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생활고에 관해, 저 마지막 굶주림에 대해서 침묵했지만 그녀는 분명 굶주린 채 죽어갔다. 나는 이것만으로도 죄의식을 피하지 못하겠다. 어쩌면 저 굶주린 예술가 앞에서 우리는 누구나 죄인이 아닐까. 그래서 그녀의 죽음 앞에 명복을 빈다는 말조차 쉽사리 할 수 없다.

예술계의 관행? 내가 겪은 두 가지 사례!

그녀의 죽음을 두고 누군가는 내게 '승자독식의 먹이사슬 구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런 구조를 '관행'이라는 표현으로 에둘러 말했다. 동병상련의 심정이었을까. 불현듯 내가 겪었던 두 가지 대비되는 사례가 떠올랐다. 비록 내가 영화 업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문학계도 그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몇 년 전 어느 문학잡지에 평론을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의 일화다. 원고를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잡지사측에서 연락을 해왔다. 원고료를 대신해 정기구독을 받으라는 이야기였다. 문학전공자로서 난생 처음 받은 청탁으로 인해 가졌던 설렘과 긴장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즉각 그 제안을 거절하고 고료를 받았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지금까지도 잡지를 계속 보내온다. 그러나 계절이 바뀔 때마다 도착하는 그 잡지를 보면 반가움에 앞서 씁쓸한 생각이 먼저 든다.

그 잡지가 어떤 악의가 있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또한 이것을 '관행'이라고 일컫는 것은 더욱 경계해야 한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전혀 다른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새롭게 인연을 맺게 된 잡지사에서 보낸 원고청탁서의 일부를 소개한다.

"원고료는 ○회 ○○원입니다. 지금까지는 연재가 끝나는 시점에서 원고료를 드렸는데요, 각 호마다 원고료를 지급할 수 있습니다. 편안하게 말씀해주시면 원고료 지급하는 데 참고하겠습니다." 몇 푼(?) 안 되는 저 원고료를 받기 위해 잡지사에 쭈뼛거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저 말이 참 고마웠지만 오늘에 이르러 최고은 감독의 죽음 앞에서 그 고마움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런 한편, 잡지사의 형편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잘은 모르지만 인쇄비나 유통(배송)비를 제외하면 1만원 남짓한 잡지 값에서 수익을 얻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원고료를 정기구독으로 대신하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일 게다. 또 이러한 궁핍한 현실 때문에 우리의 적잖은 잡지들이 동인지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배고픈 예술가들을 단 한 번만이라도 돌아보자

오늘날 예술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일까. 예술은 꽉 막힌 우리 출근길을 뚫어주지 못한다. 또 수출되는 물류의 운송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도로를 닦고 강에 보를 쌓는 일이 우리의 영혼마저 맑게 해줄 수 있을까? 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서는 예술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삶이 아니라 우리의 내일을 위해 나는 주변의 배고픈 예술가들을 단 한 번만이라도 돌아볼 것을 권유하고 싶다.

쓸쓸히 죽어간 그녀에게 무슨 말이 소용 있을까마는 이 말은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 얼마 전 세상을 등진 고(故) 박완서 선생님께서 죽음을 예비하여 남기셨다는 말씀을 다시 되뇌어본다.

"문인들은 돈이 없다. 내가 죽거든 찾아오는 문인들 잘 대접하고 절대로 부의금을 받지 말라."

 

[오마이뉴스 박성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