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전위에서 멘토로

道雨 2011. 9. 6. 16:52

 

 

 

                  전위에서 멘토로 

 

보수정치의 ‘대안’ 구실 못한 진보정당, 안철수 태풍은 그 공백에서 태어났다

 

 

 

» 진중권 문화평론가
안철수씨가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시사하자 사회 전체가 술렁인다.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고민이 많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한 ‘개인’에 대한 열광은 기존 정당에 대한 대중의 뿌리깊은 불신을 보여준다.

 

안철수 열풍, 그것은 한마디로 보수적 정당정치에 내미는 대중의 ‘레드카드’라 할 수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아직 시정의 방향을 제시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말이 많은 것은 그를 둘러싼 논의가 정책보다는 정치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할 게다.

 

먼저 확인해둘 것은 그가 시장이 되어서 앞으로 어떤 정책을 펼칠까 하는 것.

가령 10·26 보선을 존재하게 한 그 문제, 즉 무상급식 문제를 그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안철수씨는 시장직을 ‘행정직’이라 보지만 시장직을 혼자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집권 여당을 등에 업은 오세훈씨마저도 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한 의회와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좌초하지 않았던가.

선거에서는 기존 정당과 거리를 두는 것이 유리할지 몰라도, 시장직을 수행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정당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풀어야 할까?

 

참신한 인물에 대한 열망 못지않게 강력한 것이 집권 여당의 실정에 경고의 시그널을 줘야 한다는 유권자들의 바람.

 

선거운동이 가열되어 보수결집과 정권심판의 대립구도가 공고해지면, 팬들 중에서 정치색이 강한 이들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따라서 초반의 열기를 온전히 제 것으로 유지하려면 그도 현 정권의 실정에 대해 입장을 밝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안철수 열풍이 갖는 의미를 읽는 것이다.

그로 인해 위기에 빠진 것은 실은 보수정치다.

보수정치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주 오래된 구호다. 바로 그 ‘대안’의 필요성에서 만들어진 것이 진보정당이나, 10년이 지나도록 진보정당은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안철수 태풍은 그 공백에서 태어났다.

 

진보는 재생산에 실패했다.

40~50대가 된 민주화세대와 20~30대인 정보화세대 사이의 다리는 끊어졌다.

젊은 세대라고 정치나 사회에 관심이 없겠는가?

그들 역시 사회와 정치 속에서 자신이 처한 처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이들의 물음에 친절히 대답을 해준 것이 안철수·박경철과 같은 인물이다. 이들을 흔히 ‘멘토’라 부른다.

 

 

운동권의 자기의식은 ‘멘토’가 아니라 ‘전위’에 가깝다.

멘토가 콘서트를 연다면, 전위는 집회를 연다.

멘토가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젊은이들을 위로할 때, 전위는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꾸짖는다.

멘토가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함께 찾아보자고 권유할 때, 전위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이념을 최종적 해법으로 제시하며 받아들이라 강권한다. 대중이 그것을 거부하면 그들을 한심하게 여기며 타락한 세태를 한탄한다.

 

진보는 더 이상 대중에게 던질 ‘메시지’가 없다.

그들의 주장은 오래전에 정보 가치를 상실했다. 들을 가치가 없는 얘기에 왜 귀를 기울이겠는가?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자, 워너비 전위들은 자신을 ‘등대’로 부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등대가 애초에 잘못된 지점에 서 있어 그 불빛을 따라갔다가는 줄줄이 암초에 걸리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안철수는 진보를 졸지에 ‘잉여’로 만들어 버렸다.

그 와중에 진보정당들이 통합에 실패했다는 단신이 지나간다.

도로 민노당이든, 따로 진보신당이든 희망은 없다.

 

진보에는 ‘양적 통합’ 이전에 ‘질적 개혁’이 필요하나, 거기에 관한 논의는 전혀 없다.

‘배신이냐 순결이냐’, ‘생존이냐 고립이냐’의 저열한 싸움뿐.

 

청춘에게 멘토링이 필요하다면, 진보에게는 컨설팅이 필요하다.


< 진중권 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