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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증거·정식심리 없이 ‘1심 무죄’ 뒤집을 수 있나

道雨 2011. 11. 8. 16:32

 

 

 

“추가증거·정식심리 없이 ‘1심 무죄’ 뒤집을 수 있나”

 

한겨레가 만난 사람
   ‘2심 유죄’ 의문제기한 최열 환경재단 대표
 

 

» 최열 대표는 5000회가 넘는 강연을 다니고 수십만부가 넘는 환경 관련 책이 팔리는 베스트셀러 강사이자 필자이기도 하다. 횡령 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는 와중에도 학교, 단체, 지자체의 강연 요청이 줄을 이었다. 환경재단 후원금도 크게 줄어들지 않았고, 후원을 끊는 회원도 없었다고 한다. 강연회에서는 어머니들과 아이들이 환경아저씨라며 책에 사인을 받아 간다. 적어도 시민들과 학생, 환경애호 기업과 단체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셈이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안철수·박원순 바람이 정치권을 강타하던 지난 9월29일 서울고등법원의 한 재판정에서는 “세상에 꼭 알려져야 할” 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환경운동가 최열(62·환경재단 대표)의 알선수재 혐의에 대한 항소심이었다.

 

같은 혐의에 대해 1심에서 무죄를 받은 최열은 이 재판에서 뜻밖에 징역 1년에 추징금 1억3000만원을 선고받았다.

박원순과 함께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쌍두마차라 불린 이 환경운동가는 이 재판대로라면 환경사업을 미끼로 업자한테 돈을 받은 부도덕한 인간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보도자료까지 배포한 재판부는 정작 재판을 하는 동안 피고의 혐의에 대해 이렇다 할 심리조차 하지 않았다.

 

인터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세간의 의혹 속에 1심 재판부가 2년 가까운 기간 동안 18번의 공판 끝에 내린 무죄판결을, 추가 증거도 없이 유죄로 뒤집으면서, 어떻게 피고 쪽에 아무런 방어기회도 주지 않은 걸까? 그런 판결을 왜 재판부는 보도자료까지 만들어 돌린 걸까?

 

최열 대표 인터뷰는 서울시장 선거 다음날인 10월27일 환경재단에서 했다.

 

환경운동가 최열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 9월부터 시작됐다.

보통 고도의 경제사범이나 청와대 ‘하명’ 수사를 담당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나선 이 사건에서 검찰은 두차례나 영장이 기각되는 수모를 당해가면서 수사 개시 7개월 만에 최씨를 알선수재와 횡령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환경센터 건립자금과 환경재단 장학금을 횡령하고, 용도변경을 대가로 업자에게 금품을 받았다는 부도덕한 혐의였다.

하지만 세간에선 이 수사를 놓고 4대강 반대 운동을 사전 봉쇄하려는 ‘표적수사’라는 비난 여론이 일었다.

 

1심 재판은 2009년 4월부터 올해 1월28일 선고까지 1년9개월간의 공방 끝에 검찰이 기소한 3건의 알선수재와 횡령 혐의가 무죄로 되고, 재단 장학금 횡령 부분에는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재판은 사실상 최열의 승리였다.

그런데 지난 9월 열린 2심에서 재판부(서울고법 형사3부 재판장 최규홍, 배석판사 여운국·손철우)는 애초 무죄였던 알선수재 혐의 1건을 검찰의 추가 증거 제시 없이 유죄로 판결했다.

 

 

- 2심 재판에서 유죄가 된 알선수재 혐의는 무엇인가?

“요약하면, 환경재단 대표인 내가 어떤 사업가에게 용도변경을 미끼로 1억3000만원을 받았고 그중 일부는 정치자금이라는 거다. 하지만 경기도 담당 국장도 청탁이나 압력성 전화가 아니라고 했고, 돈을 빌려준 사람도 차용증 주고받은 정상적인 거래라고 하는데, 2심에서는 이걸 믿을 수 없다며 유죄를 내린 거다.”

 

 

1심서 알선수재 혐의 증언·증거 모두 무죄 뒷받침
“2심 재판장, 1심서 무죄인데 변론 필요있냐” 말해
재판부 보도자료 배포에 “외적 영향 받았다” 생각

 



- 당시 재판 상황을 간략히 설명해 달라.

“선고 빼고 3번의 공판 동안 해당 혐의에 대해 한번도 제대로 심리를 하지 않았다. 항소한 검찰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선고 한달여 전 열린 8월23일의 결심공판에서 변호사들이 이 부분에 대해 최종변론을 하려 하자, 재판장이 ‘이미 무죄가 나온 걸 그렇게 자세하게 변론할 필요가 있느냐’고 해 다들 웃기까지 했다.

그런데 정작 선고 공판에서 무죄가 유죄가 됐다.”

 

- 재판부가 재판외적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가?

“재판장이 선고를 하기 전에 말씀하시길 ‘사안이 중요한 만큼 공보실을 통해 보도자료를 배포하겠다’고 했다. 판사가 판결을 하면 됐지 보도자료를 낸다는 게 무슨 뜻인가 싶었는데 유죄가 선고됐다.

그때서야 아, 이거 재판부가 (재판외적인) 영향을 받았구나, 직감했다.”

 

-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때 안철수·박원순 돌풍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주변의 정치를 잘 아는 분들로부터 듣기로는 그런 상황에서 최열까지 무죄를 받아 족쇄가 풀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안철수, 박원순에 이어 최열이 쌍끌이로 나서서 시민운동세력이 정치세력으로 결집하면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한나라당에 큰 타격이 될 수 있다고 본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일단 최열의 발을 계속 묶어놓으려 한 게 아닌가? 그게 아니면 이 상황이 설명이 안 된다.”

 

- 최 대표에게 돈을 줬다는 사업자와는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나? 어떻게 돈거래가 있게 되었나?

“오병순씨는 폐지로 계란판을 만드는 등 친환경 사업을 하며 환경단체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은 분이라 20여년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그분이 환경재단에 들렀을 때 마침 내가 길동 아파트 집이 팔리지 않은 상태에서 도원동 아파트 구입계약을 하게 돼 급전이 필요했는데 그분이 선뜻 나서줬다. 두차례에 걸쳐 7000만원과 6000만원, 1억3000만원을 빌렸다가 나중에 은행 송금으로 갚았다. 검찰은 그 돈이 용도변경 주선을 대가로 주고받은 게 아니냐고 의심했다.”

 

- 검찰이 정치자금이라고 한 건 또 뭔가?

“그 무렵 내가 미래창조연대라는 시민단체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었는데, 오씨가 내게 빌려준 돈 중 7000만원이 그 정치자금이 아니냐는 거였다.

검찰은 그 혐의를 만들기 위해 오씨와 오씨 가족들인 금곡산업개발 오병국 부사장(오씨의 형), 금곡산업개발 이광문 회장(오병순의 매부) 등을 집중 수사했다.

오씨는 1심 재판 때 증인으로 나와 ‘검사가 수사중에 최열이를 털면 나올 줄 알았는데 안 나와서 미치겠다, 최열에게 정치자금 주었다고 하면 회사를 살려주겠다, 인허가 안 나오면 너의 가족 다 죽지 않느냐며 회유했다. 내가 이런 사실을 폭로하려 하자 긴급체포를 해가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또 검찰은 이광문씨가 기소중지된 사실이 드러나자 그 건으로 그를 구속시켜놓고 오씨가 내게 준 돈이 정치자금인 걸 시인하라고 강요했다.

이씨도 재판정에서 검사의 심문에 ‘검사님이 저하고 빅딜하자고 했잖아요? 최열 대표에게 정치자금 줬다고 증언하면 제 재판건하고 인허가건 봐준다고 그랬잖습니까?’라고 오히려 검사에게 따져물어 방청객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 그 사람들이 엉뚱한 화살을 맞은 것 같다.

“이광문씨와 오병순씨는 처남매부간인데 두 사람 다 나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이씨는 수백억짜리 친환경 개발프로젝트가 공중분해됐고, 거의 모든 재산이 차압되는 등 파산했다. 한 집안과 수십년 친환경사업을 해온 회사 하나를 이렇게 파괴시킨 책임은 누가 져야 하나.”

 

-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왜 이른바 ‘최열 비리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고 보나?

“내가 강연을 할 때도 원고 없이 하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메모를 적어 왔다.

2008년 9월8일 서울지검 특수3부가 환경연합 사무실을 압수수색했을 때 고건 전 총리는 내게 ‘일개 환경단체를 왜 특수부가 수사하나?’ 하며 의아해했다.

친한 검찰출입기자들은 ‘이번 검찰 수사의 표적은 최열이다’고 하고, 박계동 의원은 사건이 나기 몇달 전에 ‘한나라당에선 형(최열)을 대운하 반대 두목이라고 하니 조심하라’고 했다. 그러고 얼마 있다 방송뉴스에서 내가 출국금지됐다는 보도가 나오고 뒤이어 최열의 비리라며 온갖 검찰관계자발의 의혹 보도가 쏟아졌다.”

 

- 사건 일지를 보니 그러고 나서 두달여쯤 지나 검찰이 최 대표를 소환하던데?

“한번은 횡령한 돈으로 자기 딸 어학연수비로 썼다는 등 보도가 나와 이건 너무 심하다 싶어 평소 친분이 있던 당시 임채진 검찰총장에게 ‘항의성’ 전화를 했더니 알아보겠다고 했다.

나중에 임 총장과 나를 다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임 총장이 사석에서 한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최열이 횡령사건 때문에 나도 죽겠다. 위에서 자꾸 흔든다. 엔지오를 치라고 하는데 내키지 않는다. 청와대 민정에서 검찰 지휘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수사검사에게 말해 (검찰 지휘권자로서) 나도 괴롭다’ 이런 이야기였다.

아, 이런 얘기를 다 해도 좋은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분이 총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 식사 모임이 있었는데, 그때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나보고 그랬다. ‘최 대표가 수사를 받을 때 나도 수사받는 심정이었다’고.

 

- 당시 검찰총장까지 괴롭게 만든 이 수사를 누가 왜 시작했다고 생각하나?

“주변 사람들이 많은 제보를 해주었다. 시작은 청와대 민정수석실(당시 민정수석은 검사 출신 정동기씨였다)이었고, 거기서 서울지검 특수부로 ‘하명’이 갔다고 하더라. 그때 내 사건을 맡은 특수3부장 김광준 검사는 ○○일보 기자와 회식을 하면서 ‘최열이는 반드시 구속시켜서 재기불능 상태를 만들겠다’고 호언했다. 그 내용이 그 신문사 내부 정보보고망에 오른 걸 다른 기자가 보고 내게 조심하라며 알려줬다.”

 

내 혐의 관련된 한 집안 풍비박산…누가 책임지나“
임채진 전검찰총장 ‘나도 수사받던 심정’ 후일 토로”
상식밖 판결에 대법원의 정확한 판단 있길 바라

 

- 청와대 민정 지시로 시작했다면 왜일까?

“<신동아>에서도 났는데 3대 죄목이 있다고 했다. 대운하 반대, 촛불시위 배후, 문국현(대선후보) 지지. 거기에다 엠비 개인의 나에 대한 섭섭함, 과거 낙선운동에 대한 여권 인사들의 복수심 등등이 다 얽혀 있는 듯하다.”

 

- 엠비와는 서울시장 시절엔 가까운 사이였다고 알고 있다.

“우린 사실 무척 친한 사이였는데 대선을 치르면서 벌어진 것 같다. 엠비는 내가 선거기간 동안 자기를 괴롭히던 문국현 후보를 배후에서 도와주고 있다고 여긴 것 같다.

나중에 선거기간에 엠비가 도와달라며 곽승준씨를 보냈는데 대운하 공약을 도와달라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다른 건 몰라도 환경운동가로서 대운하 공약을 지지할 수 없다고 했다.

엠비가 대통령이 된 후 창원 람사르 총회장에서 만났을 때는 내가 악수한 손을 놓지 않고 특별면담 하자고까지 했는데 아무 대꾸도 않더라. 그래서 아, 이 사람 나를 아주 섭섭해하는구나, 생각했다.”

 

- 이야기를 종합하면 결국 발단은 4대강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후 광우병 촛불집회를 겪은 뒤 4대강 사업마저 밀리면 주도적인 정국운영이 어렵다고 본 듯하다. 환경운동연합은 전국 50여개 조직을 가진 단체이니 이걸 마비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듣기로는 저쪽의 공격목표가 1번 최열, 2번 박원순이었다고 한다. 최열 집어넣고 나면 다음 차례는 박원순이었는데, 그만 내 사건이 생각대로 잘 안된 거다. 그래서 박원순은 국정원이 맡아서 온갖 음해와 공작을 다 하지 않았나?

최열을 파렴치범으로 만들면 시민운동의 도덕성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 되고 그 여세를 몰아 박원순도 넘어뜨린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 아무튼 대법원까지 갔다. 법원에 하고픈 말은?

“이 사건의 특징은 피해자나 피해사실이 없다는 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이다. 그 정치적 목적 때문에 나는 둘째 치고, 정치와 아무 관련이 없는 한 집안이 쑥대밭이 됐다.

2심에서는 이렇다 할 심리 한번 없이 한 환경운동가에게 감옥살이 형을 선고했다.

내가 법률가는 아니지만, 이는 상식도 정의도 아니다. 우리나라 정의의 심장부인 대법원에서 정확한 판단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 판결과 관계없이 환경운동가로서의 남은 꿈은?

“환경운동가로서 남은 목표는 두 가지다. 기후변화에 따른 전지구적 환경위기를 계속 제기하는 것이다. 특히 탈원자력 자연에너지 네트워크를 한·일 공동으로 만들 계획이다. 개인적으로는 환경 전문가 및 운동가 양성을 위한 대학원대학과 자녀들을 위한 장학기금을 조성하고 싶다.”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일개 환경단체 대표 한 사람을 걸어 넣기 위해 1995년부터 2008년까지 13년간의 행적을 7개월여 동안 먼지를 털듯이 뒤졌다. 그 기간 동안 검찰 조사를 받은 사람은 김문수 경기지사를 비롯해 환경재단이 확인한 것만 89명이다.

1심 재판은 1년9개월을 끌고서야 사실상 무죄판결을 내릴 수 있었고, 2심 재판은 피고 쪽이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무죄가 유죄로 뒤바뀌었다.

 

발단부터 전개, 그리고 종국에 이르는 현재까지 이 사건에는 권력의 그림자가 넘실대고 있지만, 89명의 참고인과 증인들, 보이지 않는 많은 환경운동 후원자들 가운데 피고에게 불리한 진술이나 증언을 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이 소극이 얻은 가장 큰 위안일지 모른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대법원을 바라보고 있다. 더 많은 변호사들과 더 많은 시민들이 그 대열에 함께 서기를 바란다.

 

최열 대표는

» 최열 환경재단 대표

1세대 환경운동가…“정치는 나의 길 아니다”

 

1세대 환경운동가로서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80년대 이후 한국 시민운동의 쌍두마차로 불렸다. 1949년 대구에서 태어나 춘천고, 강원대 농화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시절 박정희정권의 3선개헌에 충격을 받고 학생운동에 나서 1975년 명동 가톨릭학생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안양교도소 수감 중 선후배 학생운동가들이 모두 노동운동을 지향할 때 그는 공해반대운동 투신을 결심했다.

1982년 국내 첫 민간환경단체인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세운 이래 30년간 환경운동가의 길만 걸었다.

 

1995년 환경분야의 노벨상이라는 ‘골드만 환경상’을 받아 상금 7만5000달러 전액을 환경센터 건립기금으로 내기도 했다. 2002년 환경재단을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최 대표는 박원순이 지리산 종주를 하면서 서울시장 출마 결심을 할 때 맨 먼저 전화로 알린 사람 중 하나다.

최 대표는 박 시장에 대해 “박원순에겐 외골수 기질이 있다. 그래서 주변에서 좋은 사람, 사심 없이 자기 일에 충실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역할을 배분하라고 충고할 참이다. 나는 자원봉사만 한다. 무슨 자리나 장을 맡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는 지금까지 “와이에스를 포함해 7~8번 제안을 받았지만 최열의 길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고건, 오세훈, 문국현, 박원순 등과 한때 모임을 같이 하며 ‘뜻’을 키우던 시절이 있었는데 최 대표만 빼고 모두 정치와 인연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