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품달>의 '역습' ... MBC 최후보루 무너졌다
예기치 못한 방송장악 시나리오 제3탄은 파업
MBC '끝장파업'에 KBS '리셋투쟁' ... 정국 뇌관 되나
3월 5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종로 보신각 앞. 300여 명의 방송인들이 '작은 광장'을 메웠다. KBS, MBC, YTN 방송 3사 공동파업 출정식. 흩뿌리는 빗줄기에 우산을 받쳐 든 이들도 꽤 있었지만, 많은 이들은 1회용 우비로 무장하고 자리를 지켰다.
이날로 파업 36일째인 전국언론노조 MBC본부(MBC 노조)가 주축을 이루고, 다음 날 파업 돌입을 앞두고 있던 언론노조 KBS본부(KBS 새 노조) 조합원 수십여 명, 8일 1차로 3일간 한시파업에 들어가는 언론노조 YTN지부 집행부들이 함께했다. 비까지 뿌리는 쌀쌀한 날씨에 어둠이 짙었지만, 손에 촛불을 든 이들의 표정은 촛불만큼이나 맑고, 가벼웠다.
이들의 구호는 3가지. "낙하산 사장 퇴진", "해직언론인 복직", "공정방송 쟁취"! 이들은 공동파업투쟁 출정문에서 "국민에게 공정한 방송, 국민의 방송을 되찾아 드릴 때까지 결연히 투쟁해갈 것을 약속"했다. 부정한 권력을 제대로 비판하고, 사회의 그늘진 곳에는 온기를 전하는 방송인으로 다시 돌아갈 것임을 다짐했다. 그리하여 "방송을 국민으로부터 빼앗은 권력을 단죄하고, 국민과 함께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방송장악으로 시작한 MB정권, 그 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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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정문에서 밝힌 것처럼 방송 3사 노조가 동시에 파업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이들 방송 3사 노조가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온전히 자신들의 문제로 가두집회를 가진 것 역시 처음이다.
이 정권의 마지막 한 해를 방송인들이 거리 집회와 시위로 열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온갖 무리수와 낙하산 사장 투입으로 시도한 방송 장악 시나리오가 사실상 파탄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들 방송인들이 마이크와 카메라를 놓고 거리로 나서기까지 무슨 일들이 있었던가?
출범 첫 해 뜨거운 촛불민심에 놀란 이 정권이 박차를 가한 것이 바로 방송 장악이었다. YTN에 이명박 대통령의 선거 특보 출신 사장을 보낸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 2008년 7월 17일, 이대통령 특보 출신 사장을 주총 장소까지 바꿔가며 YTN 사장에 앉혔다. YTN 구성원들의 완강한 저항이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해 8월 11일, 정연주 KBS 사장을 배임 혐의 등으로 해임했다. 법인세를 둘러싼 국가와의 소송에서 법원의 '조정'을 받아들여 처리한 것이 '배임'이라는, 황당한 사유였다. 그 후임에 역시 특보 출신 사장을 앉히려 했다가 여의치 않자 KBS 내부인사로 대신했지만 결국 1년여 만에 이 대통령 선거 참모 출신인 김인규 사장이 그 자리를 차고앉았다.
이 정권 출범 직후 선임됐던 엄기영 MBC 사장은 그 풍파를 비켜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 역시 2010년 2월 취임 2년이 채 못 돼 중도하차했다.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가 사장의 뜻과 상관없이 임원인사를 하려 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임원 인사권을 빼앗고 사장을 꼭두각시로 만들려 했던 것. 내내 권력의 압력과 주문에 시달려왔던 엄 사장은 결국 사임했다.
MBC에 대해서는 그 이전에 이미 전방위적 압박에 들어가 있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의 문제점을 따져본 <PD수첩>이 그 첫 번째 타깃이었다.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과 민동석 전 정책관이 제작진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검찰은 '무리한 수사'라는 내부의 이의 제기도 묵살한 채 제작진을 체포 수사하고 기소했다. MBC의 광고 매출은 급감했고, 촌철살인의 멘트로 시청자들의 호응을 받았던 신경민 앵커는 돌연 앵커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엄 사장 후임으로 등장한 김재철 사장은 '특보 출신' 이상의 면모를 보였다. 김 사장이 "(임원 인사와 관련해) 큰 집(청와대)에서 조인트 까"이고 "(MBC에서 좌파를 척결하는) 청소부 역할"을 맡았다는 김우룡 당시 방문진 이사장의 증언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음을 그의 행적이 여실히 보여주었다.
"오늘의 방송 현실 참혹"... 'MB씨 방송', '김비서' 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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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낙하산 사장'들이 들어선 방송 3사의 풍경은 엇비슷하다. 내부의 저항에 대해서는 강경한 징계와 보복조치가 뒤따랐다. YTN에서는 노종면 노조 위원장 등 6명이 해고됐다. 또 노조원 수십 명에게 징계가 내려졌다. <돌발영상> 등 비판적 프로그램 제작진들은 타부서로 전출됐고, 보복성 인사조치도 뒤이었다. MBC에서도 '조인트 까인 사장' 저지 파업 투쟁을 벌였던 이근행 노조 위원장이 해고되고, 백여 명의 조합원들에게 징계가 내려졌다.
KBS나 MBC, YTN 모두 보도와 제작의 주요 간부들은 하나같이 '뜻밖의 인물'들로 채워졌다. 비판적 기자들이나 PD들은 비제작 부서나 지방 등 변방으로 좌천됐다.
권력 비판적인 시사프로그램은 하나 둘 자취를 감췄고, 불편한 진행자들이나 출연자들에 대해서는 '블랙리스트'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김미화씨, 김제동씨, 김여진씨, 시사평론가 김종배씨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KBS <심야토론> 진행자였던 시사평론가 정관용씨, MBC <100분토론> 진행자였던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도 교체됐다.
언제부턴가 이들 방송사에선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보도는 사라졌다. 최소한 기본은 해야 할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 검증도 어물쩍 넘어갔다. 한미FTA나 무상급식, 혹은 반값 등록금 같은 사회 주요 현안에 대한 심층 보도는 가뭄에 콩 나듯 했다. 민간인 사찰 사건이나 내곡동 사저 논란과 같은 권력형 비리 사건은 단순 중계로 그치거나 해명 위주로 보도해 권력의 대변자인가 싶을 정도였다.
뉴스 시간은 그저 그런 '맹탕뉴스', '화젯거리'로 채워졌다. 반면 정부 홍보성 기사나 프로그램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MBC는 'MB씨', KBS는 '김비서'라는 오명이 붙었다. 급기야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이들 방송사 기자들은 모욕적인 언사는 물론 폭행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방송 3사 노조는 이날 출정문에서 이 같은 방송현실을 "참혹하다"고 표현했다. 낙하산 사장들의 위력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컸지만 "정권의 탓만으로 돌리기에는 방송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자신들의 나태함과 비겁함 또한 컸다고 자책했다. 올해 초 MBC 기자들이 보도본부장 등 보도책임자의 문책을 요구하면서 급기야 '제작거부'라는 극단적 행동에 돌입한 배경이다.
"방송사에서 알아서 할 일"... 청와대, 이제 와 강 건너 불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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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방송 3사 노조가 공동파업 출정식을 가진 5일 국회에서는 이계철 방송통신위원장 내정자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다. MBC와 KBS 파업 상황에 대한 질의에 대해 이계철 내정자는 "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은 지켜져야 한다"면서도 "전적으로 방송사 내부의 문제인 만큼 방통위가 나설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정연주 전 KBS 사장 해임 등 방송 장악 시나리오를 주도했던 최시중 전임 위원장의 행적에 대해서 '나 몰라라' 한 것이다. 최 전 위원장이 정연주 KBS 사장 축출을 진두지휘한 것은 여러 증언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일. 그런데도 이 내정자는 시치미를 뚝 뗐다.
김재철 사장을 불러 '조인트'까지 깠던 청와대 역시 <한겨레>의 취재에 대해 "각 언론사에서 풀어야 할 일로, 청와대는 일체 관여하고 있지 않다"고 발뺌했다. 의례적인 '선 긋기'일 수도 있겠으나, 청와대가 더 이상 달리 사용할 '카드'도 없다는 점에서 사실상 구경꾼 신세로 전락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가능하다.
한때 회사에도 나오지 않고 외곽으로 돌던 김재철 MBC 사장은 연일 강경 대응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박성호 MBC 기자회장에 이어 5일에는 이용마 노조 홍보국장을 추가로 해고했다. 보직을 사퇴하고 파업에 참여한 최일구 앵커 등에 대해서도 정직 3개월 등의 징계를 때렸다.
노조 집행부를 업무방해와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데 이어 노조와 집행부를 대상으로 3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냈다. 노사쟁의 사업장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카드를 다 사용한 셈이다.
그러나 오히려 역풍이 더 세다. 보도국은 물론 경영과 송출 등 거의 모든 부서의 보직간부들도 속속 보직사퇴서를 내는 등 김 사장을 버리고 있다. 6일에는 <해를 품은 달> <신들의 만찬> 등 MBC 드라마 6편 가운데 4편의 제작을 책임지고 있는 PD들도 파업에 합류했다. 김재철 사장이 최후의 보루로 삼았던 드라마의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기자 166명은 집단 사직을 결의, 배수진을 쳤다. 2년 동안에 무려 7억 원이나 집행한 김 사장의 법인카드 사용(私用) 의혹은 같은 편도 그냥 넘기기 어려운 '뇌관'이 되고 있다.
'끝장파업'에 '리셋투쟁'... 정국 뇌관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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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파업 돌입을 앞두고 KBS 사측은 '불법파업'이라며 엄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날 오후 2시 30분 파업 출정식을 가질 예정이었던 본관 앞은 '차벽'으로 막았다. 건물 출입구 곳곳도 셔터를 내려 봉쇄했다. "새 노조 조합원은 기껏해야 전체 직원의 20%도 안 된다"며 "파업의 여파는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신관 앞으로 장소를 옮겨 가진 파업 출정식에는 7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당초 500~600여 명 정도가 모일 것으로 보았던 노조 집행부의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50대 후반의 머리 희끗희끗한 조합원에서부터 이제 2~3년차인 새내기 조합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울산으로, 광주로, 또 그 다른 지방으로 유배당했던 기자와 PD들도 상경했다.
예상은 했다면서도 서로가 서로의 '결집'에 조금은 놀라워했고, 즐거워했다. 한 나이 든 조합원은 "수없이 파업을 해봤지만, 이번처럼 뜨거운 열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권력의 폭압에 속절없이 무너졌던 자신들의 침묵과 냉소에 대해 시청자와 국민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국민의 방송'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리셋 KBS'를 외쳤다. 판을 갈아엎겠다는 것. MBC 노조의 '끝장파업'에 KBS 새 노조의 '리셋투쟁'이 가세한 셈. MB 방송 장악 시나리오의 예기치 않았던 마지막 3막 '저항의 무대'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작용이 컸던 만큼 반작용도 커 보인다. 자연의 법칙은 여기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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