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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청년을 ‘트위터 악마’로 만들었나

道雨 2013. 5. 23. 16:57

 

 

 

 

  누가 이 청년을 ‘트위터 악마’로 만들었나

보편화되는 내면의 악마성...지금은 인간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
전우용 | 2012-05-05 10:08:39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카메라 기능을 탑재한 휴대전화기는, 사실상 모든 국민을 사건·사고의 상시 관찰자이자 기록자로 만들었다. 스마트폰과 결합한 SNS는 개인들이 관찰하고 기록한 결과물들을 순식간에 전 세계로 확산시킴으로써, 일반대중과 전문기자들 사이의 경계마저도 사실상 허물어버렸다.

 

이 ‘일시적 대중기자’들은 기사가치가 있는 사건을 선별하고, 사실 여부를 추적하며, 사건의 내용을 명료하게 전달하는 능력 면에서는 ‘상시적 직업기자’들보다 뒤떨어지지만, 현장성과 속보성 면에서는 단연 앞선다.

이들이 사건 발생 현장에서 바로 사진을 찍고, 짧은 글을 덧붙여 불특정 다수에게 송고하는 기사들은 거의가 대중의 눈으로 대중 스스로를 고발하고 교정하려는 ‘폭로기사’들이다.

 

근래 ‘막말녀’니 ‘폭행남’이니 ‘담배녀’니 하는 말들이 인터넷 포털 인기검색어 1위로 오르는 일이 잦아졌다. 대중은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대중기자’들의 전방위적 활동에 대해 그만큼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 관심은 종종 ‘낙인찍기’와 ‘마녀사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대중은 어디에서건 긴장을 풀 수가 없다.

 

이제 사람들은 으슥한 곳에서는 CCTV를, 공개된 장소에서는 타인 전체의 시선을 온몸으로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물론 이런 일들은 심각한 인권침해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현대의 대중은 특정한 권력자나 대중 자신의 합의된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용 첨단기기들에 의해 매 순간 감시당하고 기록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는 법이다.

대중은 스스로를 감시하면서, 자기 내부에 잠재해 있는 반사회적이고 비인격적인 면들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그를 치유할 방법을 찾기도 한다. 그래서 자기검열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는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해 또 한 사람이 ‘무개념’의 전형으로 낙인찍혔다.

공개된 사진은 사람이 아니라 달리는 에쿠스 승용차에 목이 매달려 죽은 채 끌려가는 개를 찍은 것이었다.

사진을 보고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눈으로 보고서도 사람이 이토록 잔인한 짓을 일부러 할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분명 무슨 사정이 있을 듯싶어 인터넷으로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관련 내용은 어느새 검색어 1위에 올라 있었고, 그 차의 운전자에게는 ‘에쿠스 악마’라는 무서운 별명이 붙어 있었다.

당사자의 해명에 따르면, 차량 내부가 더러워질까 봐 개를 트렁크에 싣고, 산소 공급을 위해 문을 살짝 열어두었는데, 주행 중 개가 뛰어 내려 벌어진 일이었다.

 

▲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저지 투쟁 1000일을 맞은 지난 2월 15일 오전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비롯한 민주노총 금속노조 조합원들이 집회를 열고, 정리해고 사태를 외면한 총선후보에 대해 낙선운동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 오마이뉴스

 

 

내용을 확인한 순간, 이미 22명의 목숨을 앗아간 쌍용차 정리 해고가 뇌리를 스쳤다. 그 상념을 트위터에 올렸다.

 

“승용차 트렁크에서 떨어진 뒤 매달려 가다 죽은 개의 모습에, 쌍용차에서 밀려 떨어진 뒤 다시 타려고 애를 쓰다, 한 명씩 죽어가는 해고자들의 모습이 오버랩됐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다간 누가 떨어졌는지 모릅니다. 빨리 가려고만 하다간 알아도 다시 태울 수 없습니다. 빨리 가기 보단 함께 가는 사회, 앞만 보기 보단 뒤도 살피는 사회, 개의 죽음에 마음 아파하는 만큼 사람의 죽음에도 마음 아파하는 사회였으면.”

 

잠시 뒤 멘션이 하나 날아왔다. 100여 자밖에 안 되는 짧은 멘션을 보는 사이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 이딴 시체팔이가 다 있나 ㅋㅋㅋㅋㅋㅋㅋ 개는 불쌍하지만 쌍용차에서 난동부린 작자들의 죽음은 정의의 실현이기에 축하할 일일 뿐이다. 하늘이시여, 쌍용차에서 난동부려 쌍용차 임직원 수천명의 목숨을 날리려 한 작자들에게 천벌을 내리소서.”

 

한 글자도 안 바꾸고 그대로 인용했다. 인용 원칙에는 어긋나지만 글 쓴 이의 아이디는 밝히지 않겠다. 그가 ‘트위터 악마’로 불리는 건 원하는 바가 아니다.

 

돌이켜 보면 필자 세대만큼 전면적이고 체계적인 ‘반공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도 없다. 어려서는 입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다 목숨을 잃은 ‘이승복 형’을 본받자는 ‘웅변’을 매주 들어야 했고, 내게도 그런 경우가 생기면 ‘이승복 형’과 똑같이 행동하겠다는 다짐을 담은 글짓기를 해야 했다.

중학교 때는 교사나 상급생에게 거수경례를 하면서 매번 ‘멸공’을 큰 소리로 외쳐야 했고, 고등학교 때는 교련시간에 목총을 들고 뛰면서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과업”을 수백 번씩 복창해야 했다.

 

그렇게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을 체질화하며 자랐지만, 이 정도로까지 타인의 죽음을 조롱하는 ‘악마’를 본 적은 없었다.

 

더구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쌍용차 노동자들은 공산주의자도 폭도도 아니었다. 그들은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으려 몸부림치던 사람들이었고, 직장에 다시 되돌아갈 날만 애타게 기다리다 힘이 다한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그들 가족의 삶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거둬내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의 죽음을 두고 ‘정의의 실현’이며 ‘축하할 일’이라고 하다니.

 

멘션을 보낸 사람의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20대 초중반의 ‘평범한’ 젊은이였다.

아이히만에게서 ‘악의 평범성’을 발견한 한나 아렌트도 이 젊은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이히만은 시스템 안에서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지만 이 젊은이는 시스템 밖에서 자발적으로 악마성을 신봉하고 실천하고 있었다.

 


‘뿔 달린 악마’는 지금 여기에 있다. 누가, 도대체 무엇이, 이 평범한 젊은이의 마음에 이토록 잔인한 ‘악마성’을 심어놓았을까?

 

근래의 여러 현상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맴돌았다.

‘나만 아니면 돼!’라며 파편화된 자기를 합리화하는 개개인의 극단적인 이기심, 개인적 욕망의 실현은 선(善)이며 경쟁은 역사 발전의 유일한 동력이라고 강변하는 신자유주의의 메신저들.

더 있다. 신자유주의 비판을 모두 좌파이념으로 단정하고 ‘종북좌파’라는 가상의 거대 집단을 만들어 인권과 민주주의, 분배의 확대를 요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그 안에 억지로 우겨넣는 보수 언론, 대북 관계의 긴장도를 조절하여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 드는 정부.

게다가 이런 현상 속에서 만들어진 불안감, 적대감, 증오감, 공포감 등을 얽어 만든 ‘이념’을 이용하여 권력기반을 강화하려는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그 젊은이는 이 어설프고 비정형적인 ‘이념의 덫’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악마’가 된 게 아닐까?

인간에 대한 예의를 물질에 대한 숭배로 대체하고, 생각과 처지가 다른 자들은 전부 절멸시켜야 할 ‘적’으로 단정하게 되면 저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면의 악마성을 주저없이 드러내는 사람들이 다수가 된 시대의 민주주의를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했다.

히틀러도 민주적 선거로 당선됐다. 악마들의 민주주의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뿐이다.

 

인간의 욕망을 부추겨 시장을 넓히려 드는 자본의 탐욕 앞에서, 탐욕을 ‘이념’으로 포장하고, 그 이념을 경계로 사람들을 분열시켜 자기편을 늘리려 드는 정치권력의 노회한 술수 앞에서, 인간성을 지킬 방법은 없을까?

 

지금은 민주주의 이전에 인간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인 듯하다.

이렇게 커나가는 ‘우리 안의 악마성’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우리 스스로의 인간성이 파괴되고, 타인의 인간성을 파괴할 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까지 죄를 짓게 된다.

이 경우에도 가장 단순한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내 안에 수치심, 타인에 대한 배려, 고통을 겪는 이들에 대한 공감이 살아 있는지 수시로 검열하는 수밖에 없다.

그걸 버리라고 요구하는 이념이 있다면 그것이 좌든 우든 ‘악마의 이념’일 뿐이다. ‘악마의 이념’에서 벗어나야 사람이 된다. 민주주의는 사람 사는 세상을 저절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