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달 만에 법정 나타난 ‘자살시도’ 블랙요원
국정원 간첩증거 조작 사건과 관련해 지난 3월 자살을 시도했던 국정원 대공수사국 블랙요원 권세영 과장이 지난 8일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나왔다. 대형 가림막으로 모습을 감췄지만 4시간이 넘게 계속된 재판 내내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며 비교적 또렷한 목소리로 판사의 질문에 답했다. 불과 석달 전 생사의 문턱을 오가며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사람으로 보기 힘들 정도였다.
증거조작 사건이 불거지며 국정원 직원 등을 대상으로 검찰 수사가 한창이던 당시, 권 과장은 검찰 조사를 받고 나온 직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27년 간 목숨 걸고 일했는데 검찰 조사를 받아 모욕적이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권 과장은 자살을 기도해 위중한 상태로 발견된 바 있다. 그의 자살 시도 후 검찰은 국정원 지휘부에 대해서 수사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하고, 증거 조작을 실무진 차원의 범행으로 결론지었다.
지난 4월 수사결과 발표 당시 권 과장에 대한 기소를 시한부로 중지했던 검찰은 지난 1일 그를 불구속 기소했다.
권 과장, 전직 중국 공안의 허위 진술서 조작 주도
검찰은 권 과장이 허룽시 공안국 명의의 회신 공문과 선양주재 한국영사관 소속 이인철 영사의 확인서 위조에 관여하고, 중국 공안 출신인 임 모 씨의 진술서를 조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임 씨의 진술서 조작은 권 과장이 주도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권 과장은 지난해 12월 국정원 협력자 김원하의 소개를 통해 과거 집안시 변방검사참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임 씨에게 접촉했다. 권 과장은 미리 준비해간 메모를 보여주며 해당 내용을 중문으로 옮겨 써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임 씨는 ‘출입경기록에 없는 기록이 생길 수 없고, 을종 통행증을 통해 여러번 국경을 왕복할 수 있다’는 메모의 내용이 사실과 틀리다고 지적했지만, 권 과장은 메모의 내용을 능통한 중국어로 설명하며, 진술서에 메모 내용을 그대로 옮겨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임씨는 지난 3월 8일 뉴스타파와의 전화 통화에서 당시 권 과장과 일행 2명은 자신들을 ‘검찰 관계자’라고 소개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작성된 허위 내용의 진술서는 유우성 씨 사건 담당 검사를 거쳐 법정에 제출됐다. 하지만 언론 보도를 통해 이 문건이 조작된 것으로 알려지자, 검찰은 뒤늦게 증거를 철회한 바 있다. 당초 검찰은 임 씨를 유우성 씨 사건 재판에 검찰 측 증인으로 내세울 계획이었지만 진술서 조작 의혹이 제기되면서 이 역시 철회했다.
유씨 변호인단의 피해자 진술신청에 검찰 ‘부정적’ 입장
한편 지난 8일 법정에는 증거조작의 피해자 유우성 씨도 참석해 재판과정을 지켜봤다. 유 씨는 이미 많은 진실이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국정원 직원을 보며 착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달 25일 증거조작 사건 재판부에 피해자 진술을 신청했던 유 씨의 변호인단은 이날 재판에서도 ‘수사과정에서 진술의 기회가 보장되지 않아,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재판절차에서 진술 기회가 보장될 필요가 있다’는 신청의 취지를 설명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이미 소환 조사를 통해 유 씨에게 진술할 기회가 충분히 주어졌지만 본인이 거부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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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증인 “검사가 오천만 원 들더라도 유우성 기록 입수 추진 지시” 진술
▲ 유우성 씨 항소심을 담당했던 이문성 (왼쪽), 이시원(오른쪽) 부장검사
유우성 씨 간첩사건 항소심 과정에서, 담당 검사들이 거액이 들더라도 유 씨의 북중 출입경 기록 등의 증거를 확보하라고 국정원 측에 지시했다는 국정원 직원의 진술이 나왔다.
이같은 진술은 지난 15일 국정원 증거조작 사건 3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국정원 직원들의 비공개 증인 신문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확인됐다.
거액을 써서라도 유 씨 관련 기록을 입수하라고 검사가 지시했다는 증언이 사실이라면, 위조를 포함한 불법 행위까지 동원하라는 지시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 무혐의 처분을 받았던 담당 검사들에 대한 책임론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 15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증거조작 사건 공판에서, 국정원 측 변호인단은 증인으로 나온 국정원 대공수사국 소속 직원 김 모 씨와 최 모 씨 등을 상대로, 당시 담당 검사와 국정원이 유 씨 관련 증거 확보에 대해 협의한 내용을 자세히 물었다.
국정원 측 증인으로 나온 김 씨 등은, 유우성 씨 사건의 수사와 공판을 맡았던 당시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 소속 검사들과 국정원 사이의 업무 연락을 직접 담당했던 직원들로, 지난 3월 검찰 수사 과정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 이재윤 국정원 대공수사국 처장과 이인철 영사
담당검사, 국정원 수사팀장에게 “비용이 오천만 원이 들더라도 유우성 기록 입수 추진”
국정원 측 변호인단은 지난해 9월 이문성 검사가 이재윤 국정원 대공수사국 처장과 통화하면서 “비용이 오천만 원이 들더라도 유 씨의 출입경기록 입수를 추진해야 한다”고 말한 사실에 대해 물었고, 증인인 김 씨 등은 그 같은 통화 내용을 대체로 시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검사가 먼저 국정원에 중국 내 협조자를 통한 유 씨의 출입경기록 입수 추진 상황을 물어왔고, 국정원 수사팀은 여러 곳에서 한꺼번에 확보하려면 비용 문제 때문에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자, 돈이 문제가 아니라며 적극 추진하라는 의사를 전했다는 것이다.
국정원의 간첩증거조작 사건 관련 검찰 공소 사실에 따르면, 국정원 수사팀과 검사들은 지난해 6월 중국 지린성 공안청을 상대로 유 씨의 출입경기록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입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항소심 초기부터 국정원 김보현 과장을 중심으로 중국 내 협조자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추진하고 있었다.
김 과장은 지시에 따라 지난해 10월 중순 허룽시 공안국 명의의 유 씨 출입경기록을 구해왔지만, 결국 발급권한도 없는 기관인데다, 관인도 전혀 다른 위조된 기록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국정원은 이후에도 이 기록이 진본임을 뒷받침하기 위해, 추가로 위조 문서들을 계속 제작했다.
국정원 변호인단, “협조자들 컨설팅 비용 말하는 것”
유우성 변호인단,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증거 위조 지시나 다름없어”
국정원 직원들의 변호인단은 뉴스타파와 전화 통화에서 “돈을 쓰라는 의미는 중국 내 협조자들의 도움을 받고 활동에 필요한 컨설팅 비용을 말하는 것이지, 검사들이 위조를 의미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유우성 씨 변호인 측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입맛에 맞는 증거를 위조해 오라고 명시적인 지시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검사들이 법정에서 공식적인 경로나 정보 협력 차원이라고 주장했던 모든 것이 거짓으로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돈을 들여서라도 추진하라’는 담당 검사의 언급은, 지난해 12월 국정원 김보현 과장을 통해 국정원 협조자 김원하 씨에게도 그대로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김 씨는 싼허변방검사참 답변서를 위조하기 위해 중국 내 도장방에서 문서와 관인 위조에 필요한 4만 위안(당시 8백만 원 가량)을 요청했고, 국정원은 이 돈을 지급했다.
당시 국정원 수사팀은 협조자를 통한 문서 입수 때마다 건 당 천만 원 가량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국정원이 유 씨 항소심 과정에서 문서 위조에 투입한 비용은 적어도 오천만 원에 달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국정원, 진짜 출입경기록 2건도 검찰에 냈지만, 정작 검사들은 ‘위조 증거’만 제출
증거위조를 주도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김보현 과장이, 이미 알려진 허룽시 공안국 외에 단둥시 공안국과 연변주 공안국의 협조자를 통해 유 씨 기록 입수를 추진했다는 진술도 이번 공판에서 나왔다.
이 과정에서 국정원은 유우성 씨의 진본 출입경기록 2건 이상을 확보했지만, 검사들은 이를 법원에 제출하지 않았다.
국정원은 2012년부터 보관하던 유 씨 출입경기록 화면 출력물과, 지난해 10월 중순 연변주 공안국에서 입수한 2006년 출입경기록도 담당 검사에 전달했지만, 검사들은 관인이 없거나 너무 오래됐다는 이유로 법정에 증거로 내지 않았다.
두 기록은 유 씨가 북한에서 중국으로 세번 연속 입경한 것으로 돼 있어, 북한에 재입북한 사실이 없다는 유 씨 진본 출입경기록 내역과 일치한다.
결국 검사들은 진짜 출입경기록은 숨기고, 유 씨의 간첩 혐의를 뒷받침할 수 있는 위조된 기록만 골라서 제출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뉴스타파는 큰 돈을 써서라도 추진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두 담당 검사들의 입장을 들으려 했지만 이시원 부장검사는 답변을 피했고, 이문성 부장검사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국정원 간첩증거조작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두 검사들이 위조를 알았다는 증거가 없다며, 국정원 직원들과 달리 무혐의 처분을 내렸고, 지난 5월 초 확인 조치를 소홀히 한 책임만 물어 정직 1개월을 건의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해당 검사들이 특별변호인을 선임하며 연기를 요청해, 두 달 넘게 징계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 뉴스타파 정유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