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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공백이 만든 한-일 분쟁의 나비효과

道雨 2019. 10. 1. 11:06




세력공백이 만든 한-일 분쟁의 나비효과

 



“제가 회장 한 지도 20년 되는데, 이런 종류의 지정학적 위기는 처음 맞는 거 같다. 이렇게까지 지오폴리틱스(지정학)가 비즈니스를 흔들어본 적이 한번도 없는데, 그런 정도쯤으로는 느낀다. 이게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거라면 단순간에 끝날 거 같지가 않으니, 여기에 적응하는 방법을 찾아야겠죠.”


지난 19일 미국을 방문한 최태원 에스케이 회장이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사업하는 사람이 지정학적 위기를 이렇게 언급하는 것은, 그만큼 그 위기가 우리 삶에 반영된다는 의미다.

그에게는 한-일 분쟁이라는 지정학 위기에 자신의 사업체를 적응시켜야 하는 것이 구체적 사례일 것이다.


최근 한국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중소업체들은 전례없는 기회를 맞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반도체 수출규제 대상이 된 삼성이나 에스케이는 국내 소부장 업체가 납품을 할 수 있게, 그들의 제품을 자신들의 생산시설에 맞추는 ‘테스트베드’를 열어주고 있다고, 기업 금융을 담당하는 한 시장 관계자가 전해줬다.


국산품 비율을 높이라는 재벌 총수들의 명령이어서, 대기업 임원들이 중소기업 직원들과 밤을 새우며 작업을 일사천리로 진행하고 있다. 대기업 임원들도 국내 기업 납품이 성사되면 자신의 회사 내 영향력과 입지가 좋아지기 때문에 전례없는 적극성을 보인다 한다. 대기업들은 한반도 주변의 지정학 격변 사태에서 국산품 비율을 높이는 헤징(위험회피)이 필요함을 절감한 것이다.


그동안 정부가 나서서 대기업에 중소기업 활성화를 주문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지정학적 격변이 한국의 중소기업에 진정한 기회를 열어주는 결과를 낳고 있다.


한-일 분쟁은 역설적이게도 한반도 평화에도 기회를 열고 있다. 한-일 분쟁 발발 이후 아베 신조 일본 정부의 북한을 향한 구애와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베는 그동안 북한의 일본인 납북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북-일 수교 협상은 없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지난해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발표되자 북한 방문 의사를 밝혔고, 최근 들어서는 조건 없는 북-일 정상회담을 촉구하고 있다.


한-일 분쟁 이후 아베 쪽은 대북 접촉을 구체화하고 있다.

가네마루 신 전 자민당 부총재의 아들 가네마루 신고가 이끄는 일본 민간대표단이 지난 14일부터 북한을 5박6일 방문했고, 일본 의사회 대표단이 28일 북한을 방문했다.


아베는 2002년과 2004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전격적으로 평양을 방문해 발표한 북-일 수교를 위한 평양선언을 무산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당시 북한의 일본인 납북자 문제를 이슈화해서, 북-일 화해 분위기를 깨고 집권에까지 성공했다.

그런 아베가 북-일 화해의 또 다른 상징인 가네마루 신의 아들을 대표로 한 민간인 방북단을 보내고, 자신의 측근의 제안에 따라 일본 의사회의 방북을 성사시켰다.


가네마루와 고이즈미의 북-일 화해 시도가 무산된 기본 이유는, 미국을 앞지른 일본의 대북 접근이었기 때문이다.

가네마루는 방북 뒤 곧 부패 혐의로 실각했다.

미국이 배후라는 소문도 돌았다.


북-일 화해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아베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지정학적 격변, 곧 세력 공백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미국 패권의 주축인 동맹 체제를 전세계적으로 이완시키고 있다.


따지고 보면 한-일 분쟁이 격화되고 지속되는 것도, 동아시아를 규율하던 미국의 패권이 이완되기 때문이다. 과거였다면 한-일 분쟁은 미국에 의해 막전막후에서 곧 조율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

중국이 부상하고, 미국이 한·일에 방위 부담을 떠넘기는 상황에서 벌어진 한-일 분쟁에서, 일본이 취할 길은 자명하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세력 전이가 일어나는 동아시아에서 자신들의 입지와 영향력을 위해 취해야 할 첫걸음이 아닐 수 없다.


일본과 북한의 관계 개선은 한국이 희구하는 한반도 평화체제의 한 구성물이다.

한-일 분쟁이 한국 중소기업에 활로를 열고 일본의 대북 관계 개선을 촉진하는 것은, 지정학적 격변이 가져올 위기와 기회의 불가측성을 말해준다.

기존 관계를 규정하던 힘이 착종되고 공백이 생기면서, 모든 행위자들에게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가져오기 때문이다.


미-중 대결과 미국의 패권 약화로, 동아시아는 지금 기존의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세력 전선이 착종 단계로 들어가고 있다. 곧 세력 공백도 예상해야 한다.

한국에는 정말로 위기와 기회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11474.html?_fr=mt0#csidx724ae84ade683d682541408058086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