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법과 김육
@ 대동법 개요
대동법은 1608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되기 시작하여 1708년에 완성되었다.
호역(戶役)으로서 존재하던 각종 공납과 잡역의 전세화(田稅化)가 주요내용이었다.
대동법에서는 공물을 각종 현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하여 징수했고, 과세 기준도 종전의 가호에서 토지의 결수로 바꾸었다. 따라서 토지를 가진 농민들은 공납의 부담이 다소 경감되었고, 무전 농민이나 영세 농민들은 이 부담에서 제외되었다. 대동세는 쌀로만 징수하지 않고 포나 전으로 대신 징수하기도 했다.
대동법의 시행은 조세의 금납화로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임진왜란 이후 파국에 이른 재정난을 타개할 수 있었다. 또한 공인들의 활동에 의해 유통경제가 활발해지고 상업자본이 발달했으며, 공인의 주문을 받아 수요품을 생산하는 도시와 농촌의 수공업도 활기를 띠었다.
@ 대동법의 시행과 일반적 내용
1608년(광해군 즉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되기 시작하여, 1708년(숙종 34)에 완성되었다.
호역(戶役)으로서 존재하던 각종 공납(貢納)과 잡역(雜役)의 전세화(田稅化)가 주요내용이었으며, 이는 중세적 수취체계에 있어 획기적인 변화였다.
조선정부 재정수입의 하나인 공물(貢物)은, 농민의 생산물량을 기준으로 한 과세가 아니라, 국가의 수요를 기준으로 한 과세였기 때문에, 과세 량에 무리가 있었다. 또한 고을에 따라서는 생산되지 않거나 이미 절산(絶産)된 물품이 부과됨에 따라 방납(防納)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공물의 과중한 부담과 방납의 폐단, 군포부담의 가중 등이 겹쳐서, 농민층의 유망(流亡)이 증가하던 터였다. 그리고 전쟁 후 정부가 재정 파탄을 수습하기 위해 재정수입을 급격히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농민들의 공물 부담이 늘어나면서, 그 징수의 기반마저 붕괴될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폐해를 조정하여 농민의 유망을 방지하면서, 한편 국가 재정수입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동법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동법의 실시는 방납의 폐해를 조정하기 위한 논의 과정에서 점차 구체화되었다.
이 가운데 임진왜란 이전부터 검토되어왔던 것은, 공물을 미곡으로 대신 거두는 대공수미(代貢收米)의 방안이었다. 1569년(선조 2) 율곡 이이(李珥)에 의해 건의된 대공수미법은, 징수된 공납미를 정부가 지정한 공납 청부업자에게 지급하고, 이들로 하여금 왕실·관아의 수요물을 조달케 함으로써, 종래 불법적으로 관행되던 방납을 합법화시켜 정부의 통제 하에 두고, 이를 통하여 재정을 확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방안이 논의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5세기 후반 이후 계속된 유통경제의 성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대공수미의 방안은 당장은 실현되지 못하다가, 전쟁으로 전국의 토지결수가 줄어 재정수입이 감소하게 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다시 제기되면서, 대동법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다.
대동법은 1608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주장에 따라서 우선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시행되었고, 이후 찬반양론의 격심한 충돌이 일어나는 가운데, 1623년(인조 1)에는 강원도에서 실시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중엽에는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순으로 확대되었고, 1708년에 황해도까지 실시됨으로써,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데 100년이란 시간이 걸린 것은, 새로운 토지세인 대동세를 부담하게 된 양반지주와 중간이득을 취할 수 없게 된 방납인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대동법 하에서는 공물을 각종 현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하여 징수했고, 과세의 기준도 종전의 가호(家戶)에서 토지의 결수로 바꾸었다. 따라서 토지를 가진 농민들은 1결 당 쌀 12두(斗)만을 납부하면 되었으므로 공납의 부담이 다소 경감되었고, 무전 농민(無田農民)이나 영세 농민들은 일단 이 부담에서 제외되었다.
대동세는 쌀로만 징수하지 않고, 운반의 편의를 위해서나 쌀의 생산이 부족한 고을을 위해 포(布)나 전(錢)으로 대신 징수하기도 했다. 따라서 충청·전라·경상·황해의 4도에서는 연해읍(沿海邑)과 산군(山郡)을 구별하여 각각 미(米 ), 혹은 포·전으로 상납하도록 했다.
이와 같이 공납의 전세화를 기본으로 하는 대동법은, 지금까지의 현물징수가 미·포·전으로 대체됨으로써 조세의 금납화(金納化)를 촉진했다. 농민들로부터 거두어진 대동미·대동포·대동전은 처음에는 지방관아의 경비로서 절반이 유치되고 나머지는 중앙으로 보내어지다가, 점차 대부분이 중앙으로 상납되었다.
이를 관리하는 전담기관으로서 선혜청(宣惠廳)이 신설되었고, 여기서는 징수된 대동미를 물종에 따라 공인들에게 공물가로 지급하고 필요한 물품을 받아 각 궁방과 관청에 공급했다(선혜청). 따라서 공물의 조달은 선혜청으로 일원화되었다.
대동법의 시행은 조세의 금납화로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임란 이후 파국에 이른 재정난을 일정부분 타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인들의 활동에 의해 유통경제가 활발해지고, 상업자본이 발달했으며, 또한 공인의 주문을 받아 수요품을 생산하는 도시와 농촌의 수공업도 활기를 띠었다. 공인의 상업 자본가로의 성장과 수공업자의 상품 생산자로의 변신은, 조선후기 사회경제 발전의 일면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한편 대동법 시행에 따른 농촌 수공업의 발전은, 농민층 분화를 촉진시켜, 토지 소유 관계의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새로운 지주층의 성장도 가능하게 했다.
@ 대동법 시행의 세부 과정 및 세부 내용
조선 전기 농민이 호역(戶役)으로 부담하였던 온갖 세납(稅納), 즉 중앙의 공물(貢物)·진상(進上)과 지방의 관수(官需)·쇄마(刷馬: 지방에 공무를 위해 마련된 말) 등을 모두 전결세화(田結稅化:可食米)하여, 1결(結)에 쌀[白米] 12말[斗]씩을 징수하고, 이를 중앙과 지방의 각 관서에 배분하여, 각 관청으로 하여금 연간 소요 물품 및 역력(役力)을 민간으로부터 구입 사용하거나 고용 사역하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 처음 실시된 이후, 1623년(인조 1) 강원도, 1651년(효종 2) 충청도, 1658년 전라도의 해읍(海邑), 1662년(현종 3) 전라도의 산군(山郡), 1678년(숙종 4) 경상도, 1708년(숙종 34) 황해도의 순으로 100년 동안에 걸쳐 확대 실시되어, 1894년(고종 31)의 세제개혁 때 지세(地稅)로 통합되기까지 약 3세기 동안 존속하였다.
제주도에는 그곳이 번속(藩屬)으로 여겨진 연유로 해서 실시되지 않았고, 또 평안도에는 민고(民庫)의 운영과 함께, 1647년(인조 14)부터 별수법(別收法)이 시행되어 이미 대동법의 효과를 대신하고 있었던 때문에 시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에서는 국용의 기반을 전통적인 수취체제에 따라 전세(田稅)·공물·진상·잡세(雜稅)·잡역(雜役: 徭役) 등에 두었다. 그러나 이들 세납의 부과·징수에 따랐던 여러 가지 폐해와, 때를 같이하여 전개된 양반층의 토지점유 확대에 따른 농민층의 몰락은, 이들 제도를 더 이상 존속시키기 어려운 실정에 이르게 하였다.
특히 부과기준이 모호하고 물품이 다양했던 공물상납제도(貢物上納制度:貢納制)에 있어 그러하였으니, 이미 16세기 초부터 그의 폐지·개혁이 논의되고 강구되는 실상을 보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공물·진상은 국가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컸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국왕에 대한 예헌(禮獻)의 의미마저 지니는 것이어서 좀처럼 개혁되지 못하였고, 또 방납인(防納人)들의 이권이 개재되고 있었던 데서 쉽사리 개선되지도 못하였다.
다만, 일부 군현이 사대동(私大同)으로 일컬어지는 자구책(自救策), 즉 군현에 부과된 각종 경납물(京納物)을 관내 전토(田土)에서 균등하게 징수한 쌀(1결에 1말 또는 2말)을 가지고 구입·납부하는 방책을 스스로 마련하여 온 데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공납제의 개혁논의는 임진왜란을 겪기까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개혁론의 주종을 이루어 온 공물작미(貢物作米)의 주장과 위와 같은 사대동의 관행은, 왜란 중인 1594년(선조 27)부터 그 이듬해까지 정부로 하여금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잠시나마 시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왜란 후 국가기틀을 재건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과정 속에서 대동법의 제정·시행으로 이어졌다.
유성룡(柳成龍)의 건의로 실시된 대공수미법은, 각 군현에서 상납하던 모든 물품을 쌀로 환가(換價)하여, 그 수량을 도별로 합산해서 도내 전토에 고르게 부과·징수(대체로 1결에 쌀 2말)하게 하고, 이를 호조에서 수납하여 공물과 진상·방물(方物)의 구입경비로 쓰는 한편, 시급하였던 군량으로도 보충하게 한 것이었는데, 이 법의 편익을 체험한 한백겸(韓百謙)·이원익(李元翼) 등이 그 내용을 한층 보완하여, 광해군 즉위 초에 선혜(宣惠)의 법이라는 이름으로 우선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한 것이었다.
경기도에 처음 실시된 대동법은 그 시행세칙[事目·事例]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단편적인 기록에 따르면, 수세전결(收稅田結)에서 1결당 쌀 16말씩을 부과·징수하여, 그 중 14말은 선혜청에서 경납물의 구입비용으로 공인(貢人:주로 종래의 방납인)에게 주어 납품하게 하고, 나머지 2말은 수령(守令)에게 주어 그 군현의 공·사 경비로 쓰게 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각종 공물·진상으로부터 마초(馬草)에 이르는 모든 경납물을 대동미(大同米)로 대치시켰을 뿐 아니라, 지방 관아의 온갖 경비까지 대동미에 포함시킨 데서 농민의 편익이 크게 도모된 제도였다. 그리하여 대동법은 농민의 열망 속에 1623년강원도·충청도·전라도에도 확대, 실시되었다.
그러나 실시되던 해와 그 이듬해에 걸쳤던 흉작과 각 지방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시행세칙의 미비, 그리고 이를 틈탄 지주·방납인 등의 반대운동으로 인하여, 1625년(인조 3)강원도를 제외한 충청·전라 2도의 대동법은 폐지되고 말았다. 대동법의 확대실시는 이로 인해 한때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남방토적(南方土賊)을 비롯한 농민들의 저항이 날로 확산되고, 재정의 핍박이 호란(胡亂)으로 인하여 더욱 가중되자, 대동법의 확대 실시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1654년 조익(趙翼)·김육(金堉) 등 대동법 실시론자들이 시행세칙을 새롭게 수정, 보완하여, 충청도에 다시금 실시하게 되었고, 뒤이어 그 성공적인 결과로 ≪호서대동사목 湖西大同事目≫에 기준한 대동법이 각 도별로 순조롭게 확대되어 갔다.
그리고 앞서 실시된 경기도·강원도의 대동법도 이에 준하여 개정하니, 이에서 대동법은 선혜청(宣惠廳)의 관장 아래 하나의 통일된 재정제도를 이루게 되었다. 다만, 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 대동법이 그 지역적 특성으로 인하여 군현별로 부과·징수를 상정하는 이른바 상정법(詳定法)의 특이한 규정을 두게 되었을 뿐이다.
대동법은 일차적으로 공납물의 전결세화(田結稅化)를 기한 제도이기 때문에, 그 부과는 전세를 부과하는 수조안(收租案)의 전결(田結)을 대상으로 하였고, 징수는 쌀을 수단으로 하였다.
즉, 수조안에 등록된 전결 가운데서 호역(戶役)을 면제하는 각종의 급복전(給復田)을 제외한 모든 전결에서 1결당 쌀 12말씩을 부과·징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면부출세(免賦出稅)의 전결이나 면부면세(免賦免稅)의 전결, 예를 들면 궁방전(宮房田)·영둔전(營屯田)·아문둔전(衙門屯田)·관둔전(官屯田)·학전(學田) 등에는 대동세가 부과되지 않았고, 다만 아록전(衙祿田)과 공수전(公須田)에서만은 지방관아의 경비가 대동미에서 지급됨에 따라 대동세가 부과되었다.
부과된 대동세는 봄·가을로 6말씩 나누어 징수(뒷날에는 가을에 전액 징수함)하되, 산군에서는 농민의 편익을 위하여 같은 양의 잡곡이나 소정의 환가(換價)에 기준하여 무명[(綿布], 베[麻布], 화폐[錢]로 바꾸어 내게도 하였다.
단, 무명이나 베로 납부할 경우에는 5승(升) 35척(尺)을 1필(疋)로 하였는데, 그 환가는 대체로 쌀 5∼8말이었고, 화폐는 1냥(兩)에 쌀 3말 정도였다.
그러나 현종∼영조에 걸쳐 6도의 대동세액(大同稅額)이 12말로 통일되기까지는, 지역에 따라 부과액과 징수액 방법에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고, 또 상정법이 시행된 3도에서는 이 이후에도 다른 도와 매우 상이하였다. 이와 같이 징수된 대동세[大同米, 大同木, 大同錢]는 크게 상납미(上納米)와 유치미(留置米)로 나뉘어 사용되었다.
상납미는 선혜청에서 일괄 수납하여 각 도와 군현에서 매년 상납하던 원공(元貢:二十八司元貢物)·전공(田貢:田稅條貢物)·별공(別貢:別卜定貢物)·진상·방물(方物)·세폐(歲幣) 등의 구입비와 각종 잡세조(雜稅條) 공물·역가(役價)의 비용으로 지출하였다.
유치미는 각 영(營)·읍(邑)에 보관하면서, 그 영·읍의 관수(官需)·봉름(俸廩)·사객지공(使客支供)·쇄마·월과군기(月課軍器)·제수(祭需)·요역, 상납미의 운송, 향상(享上)의 의례(儀禮)를 존속시키는 뜻에서 설정된 약간의 종묘천신물(宗廟薦新物)과 진상물(進上物)의 상납 등의 경비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상납미의 지출은 선혜청이 직접 계(契)·전(廛)·기인(其人)·주인(主人) 등에게 선급(先給)하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해당 관서에 책정된 액수를 주어, 각 관서로 하여금 소정의 공인(貢人)에게 납품에 앞서 지급하게 하였고, 유치미의 지출은 영·읍의 관장(官長)이 용목별(用目別)로 책정된 경비 한도 내에서 월별로 나누어 적절히 쓰게 하되, 그 명세서를 매월 선혜청에 보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그 지역의 특성으로 인하여, 사용 항목과 운영에 색다른 규정이 가하여지기도 하였다.
대동법은 이처럼 공납제의 폐해를 극복하고, 또 면세전(免稅田)의 증가로 인한 세입의 감축과 영세 소작농의 증대로 인한 호역의 위축을 극복하고자 한 수취제도이자 재정제도였다.
오늘날 이 법은 ‘봉건체제의 기본적 모순을 은폐하고자 한 편법의 하나’로서 ‘봉건적 특성이 보다 강요된 수취제도’로 평가되기도 하고, 이와는 달리 ‘순정성리학자(純正性理學者)들이 중국 3대(三代:夏·殷·周시대)의 이상사회, 즉 대동(大同)사회를 지향’하여 제정한 정전제(井田制)의 한 형태로 이해되기도 한다.
당시 김육(金堉)의 말에 따른다면 “농민은 전세와 대동세를 한 차례 납부하기만 하면 세납의 의무를 다하기 때문에, 오로지 농사에만 힘을 쓸 수 있는” 민생안전의 조치였고, 또 상업과 수공업을 발달시키고, 고용증대도 가져올 수 있는 제도였으며, 국가는 국가대로 재정을 확보하면서 합리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1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상납미의 수요가 매년 증대되기 시작하자, 대동법은 점차 그 당초의 성과를 잃게 되었다.
원래 상납미는 봄에 징수하는 대동세(대체로 쌀 6말)로, 유치미는 가을에 징수하는 대동세(대체로 6말)로 각각 충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17세기 말엽부터는 해마다 선혜청에서 수조반강(收租頒降:상납미의 소요 예상량을 산정한 다음에 각 군현에서 상납할 수량과 영·읍에 유치할 수량을 책정하여 주는 것)하는 제도가 생겨, 그 수량들이 전적으로 선혜청에 의하여 조정되어 갔다.
그것은 대동법의 실시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가면서, 각 도와 군현들 간의 유치미의 다과를 조절하고, 대동세를 전국적 차원에서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정치가 혼란해지고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에서의 수요가 날로 증대되자, 상납미의 수량만을 거듭 증가시켜 가는 방편으로 전락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치미의 대부분을 서울로 납부하게 된 수령들은, 선혜청의 양해 아래 부족한 경비를 점차 농민에게 부담시켰고, 또 이를 기회로 갖가지 탐학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대동법은 여기서 공납제 시절의 농민 부담에다가 대동세를 더하게 한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비판될 정도로, 그 시행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대동법의 제정 자체가 지니는 의의나 그 실시가 미친 영향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선 재정사(財政史)의 측면에서는 잡다한 공(貢)·역(役)을 모두 전결세화하면서 정률(定率:1결당 쌀 12말)로 하고, 그 징수와 지급을 쌀로 하되, 무명이나 베 또는 화폐로도 대신하게 한 사실에서 여러 가지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즉, 국가의 수취원(收取源)을 부(富)와 수입의 척도였던 전토에 일률적으로 집중시켜, 수익과 담세(擔稅)를 직결시키는 과세상의 진보, 재산과 수익에 비례하는 공평한 조세체계로의 지향, 배부세주의(配賦稅主義)를 폐기하고 정률세주의(定率稅主義)를 채택하는 세제상의 진보 등을 이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징수·지급을 당시 교역의 기준수단이었던 물품화폐(쌀·무명·베 등)나 화폐로 전환시켜 조세의 금납화(金納化)와 화폐재정으로의 전환을 이룩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정부 소요물자를 공인·시인 등에게 조달함으로써, 상·공업 활동을 크게 촉진시켜, 여러 산업의 발달과 함께 전국적인 시장권의 형성과 도시의 발달을 이룩하게 하고, 상품·화폐경제체제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계기를 이루었으며, 나아가 상·공인층의 성장과 농촌사회의 분화를 촉진시켜, 종래의 신분질서와 사회체제가 이완·해체되는 데도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 김육과 대동법
# 민중을 위해 무엇을 할까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은 격동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임진왜란을 겪고, 장년에는 왕이 뒤바뀌는 인조반정을 목격했으며, 늙은 나이에는 병자호란을 맞이했다. 그는 이런 역사경험 속에서 벼슬아치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 인물로 꼽힌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민중의 비참한 생활에 눈길을 돌리며,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까’를 고심했다. 그는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옛 역사를 읽고 싶지 않다네
그것을 읽으면 눈물이 흐른단 말일세
군자는 늘 곤욕을 당하고
소인은 흔히 득지하거든······
저 요순의 아래시대에는
하루도 다스림이 잘된 적이 없네······
생민이 무슨 죄가 있소?
창천의 뜻이 아득하기만 하구려
지난 날도 이러했거늘
오늘의 일이야 어떻겠는가
그의 일념이 어디에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시이다.
그는 청풍 김씨라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5대조 김식(金湜)이 현량과에 합격한 뒤 개혁정치를 하려다가 죽음을 당했는데, 이를 늘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명문가의 아들이 흔히 밟는 과정대로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대북파가 정권을 쥐고 있던 광해군 치하에서 그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는 대북파와 반대되는 서인 집안의 자손이었고, 더욱이 서인의 맹장으로 척화대신 김상헌(金尙憲)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는 대북파의 영수인 정인홍과 문묘배향 문제를 놓고 패기 있게 한바탕 싸움을 벌인 끝에 대과(大科, 벼슬아치가 마지막 보는 시험) 응시자격이 박탈되었다. 젊은 김육은 정인홍의 주장과는 달리 조광조 · 이언적 · 이황을 문묘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 초가 삼간에 살며 농사를 짓다
김육은 씁쓸한 기분을 안고 가평의 고향 마을 잠곡리로 돌아왔다. 거처는 방 둘에 부엌 하나 딸린 초가삼간이었다. 그는 밭갈이할 소가 없어서 남의 소를 빌려 손수 밭을 갈며 살았다.
어느덧 35세의 장년이 되었다. 다음 해에 자격박탈이 해제되었지만, 그는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단념했다. 그리고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서 스스로 호를 잠곡(潛谷)이라 하면서, 본격적으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신익성(申翊聖)이 김육의 집을 찾아왔다. 신익성은 선조의 부마로 귀한 신분의 선비였다. 김육은 신익성과 인사를 나누는 둥 마는 둥 밭 갈기를 멈추지 않았다. 빌려 온 소를 빨리 돌려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김육은 밭을 다 갈고 난 뒤 밭 두덕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익성을 초가삼간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신익성을 방안에 두고 혼자 분주하게 바깥으로 나가더니, 김이 무럭무럭 나는 돼지고기 한 덩이와 막걸리 한 방구리를 들고 왔다.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돌리는데, 아랫방에서 애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아내가 해산을 해서 아들을 낳은 것이다. 신익성이 놀라 일어서려 하자, 소매를 잡으면서 동네 할아범이 국밥을 마련했으니 먹고 가라고 했다. 신익성이 다시 주저앉아 제안했다.
“마침 내게 어린 딸이 있으니 이도 좋은 인연이오. 우리 사돈 맺읍시다.”
두 사람은 웃으며 혼인을 약속했다.
두 집안의 아이가 자라 혼인을 맺어 실제로 사돈 사이가 되었다. 김육이 37세 때 이야기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김육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이런 실천적 삶을 통해 개혁정책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 죽은 사람에게도 세금을 매기는 부정부패
김육은 농사를 지으며 농민들의 생활에 관심을 기울였다. 뼈 빠지게 농사를 짓고도 이 명목 저 명목으로 양식을 뜯겨 끼니를 이을 먹을거리조차 없는 백성들이었다. 그는 현실을 외면하고 성리학과 같은 관념의 세계로 빠져드는 선비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김육은 현실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인조반정으로 대북파가 밀려나고 서인 정권이 들어섰다. 김육은 40대 중반의 나이에 다시 조정으로 불려 나왔다.
그는 1624년(인조 2) 충청도 음성 고을의 원으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하여 가장 먼저 고을의 조세 사정, 아전들의 행패, 농민들의 부담, 토호의 횡포 따위를 조사했다.
음성현은 두 개의 면만을 관할하고 있었는데, 그나마도 백성들이 수탈에 견디다 못해 도망을 치는 바람에 거의 비어 있었고, 논밭도 갈아 부칠 사람이 없어 황폐해져 있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굶주림에 부황이 들고, 역질이 돌아 구렁을 채울 정도로 죽어 갔다. 이런 마당에 온갖 명목의 부세(賦稅)를 독촉하는 문서들이 빗발치듯 날아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 집안의 식구가 도망가고 없으면 가까운 일가붙이와 이웃집에 그 몫을 씌웠다.
현에 도착한 뒤에 경내를 두루 살펴보고 묵은 밭을 알아보았더니, 잡목만 우거진 밭인데도 아직도 조세를 매기고 있었고, 잡초가 무성한 집터인데도 계속 호세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 《음성현진폐소》
김육은 음성현 고을의 실정을 조금도 숨김없이, 그리고 조정대신들의 못마땅한 눈길도 무시한 채, 자기 고을의 나쁜 폐단을 낱낱이 상소하면서 그 대책을 요구했다.
그는 이 따위 부정 정도는 자기 손으로 뿌리 뽑을 수 있으나 제도의 문제만은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음성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행정관할의 불균형도 시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곧 이웃의 충주목은 40여 면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 관할인 죽산 · 진천은 120리나 떨어져 있어 행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백성의 고통도 심하니, 음성 옆에 붙어 있는 두 면을 음성현에 떼어 주면 백성들의 부담을 균형 있게 바로잡고 토호와 대지주들의 횡포도 바로잡을 수 있다고 건의했다.
김육은 자기의 능력을 시험하고 앞으로 조정의 정책을 세우는 데도 하나의 실험으로 건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묵살되었다.
김육은 음성의 비리를 바로잡지 못한 채, 1년도 못 되어 다시 중앙정계로 나왔다. 수령의 임기를 채우지 않고 갈아치우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그 동안 김육은 증광문과(增廣文科) 시험에 장원 급제하여 높은 벼슬아치가 될 수 있는 요건을 갖추었다. 김육은 언관(言官)의 소임을 맡아 조정에서 활동했다.
# 공물의 폐단을 바로잡아야 나라가 산다
김육이 서울에 온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후금과 충돌을 빚다가, 1636년에는 청나라 군사들이 대규모로 침입해 와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병자호란(조청전쟁)이 일어나던 해, 그는 동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그는 북경에서 꺼져 가는 명나라 조정을 보았고, 오랑캐라 얕보던 여진족이 청국을 세워 무서운 기세로 중국을 제압하는 국제질서의 판도를 목격했다. 조선은 청나라와 군신의 관계를 맺는 굴욕을 당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는 1638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두 번의 난리를 겪고 난 뒤의 농민생활은 그가 현감으로 일할 때보다 더 비참했다. 전쟁으로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자, 농민들에게 지워진 부담 또한 늘어 갔다. 그 부담은 토지에서 받아 내는 전세와, 군대의 경비를 대는 군정, 국가의 일에 동원되는 부역, 그리고 특산물을 관아에 바치는 공물 따위가 중심을 이루었는데, 그중에서도 공물의 폐단이 가장 컸다.
공물의 폐단은 늘 비정으로 꼽혔다. 공물이란 특정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인데, 특산물이 아닌 것을 바치게 한다거나 분량을 과중하게 매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두어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제주도에 전복이 나지 않는 데도 전복을 그곳 공물로 지정해서 전복의 생산지인 남해안 일대에서 사서 바쳐야 했고, 순천부 관할의 율촌은 밤나무를 많이 재배해 지명까지 ‘밤골’로 불렸는데, 밤을 수확할 때에 구실아치들이 싹 쓸어 가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의 손에는 남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이 때문에 괴로움만 당한다고 여긴 마을 사람들이 아예 밤나무를 다 베어 버렸다.
공물은 비록 지방특산물을 바치는 것이나, 농민들은 제때에 내기 어려워 중간상인들에게 의뢰했다. 중간상인들은 관권과 결탁하여 방납(防納, 공물을 대신 바치고 그 대가를 받는 것)을 일삼았는데, 그 중간 이익이 열 배를 오르내릴 정도였다. 김육은 이 공납을 쌀과 베로 환산해서, 한 가구마다 베 한 필, 쌀 두 말로 통일할 것을 건의했다. 이것을 대동법이라 한다. 대동법은 광해군 시기에 제정해 경기도 · 강원도 등 일부에서만 실시하고 있었다.
김육은 대동법을 충청도만이 아니라 전라도 · 경상도 등지로 확대해 실시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그는 조세의 불편, 방납의 폐단, 대지주와 토호와 상인들의 비리를 조금도 주저함 없이 지적했다. 그러나 당시 대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던 김집(金集) 등의 벼슬아치들은 늘 그의 주장을 가로막았다.
그의 경제정책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용전론(用錢論)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돈의 전면적 사용으로 농산물 · 공산품의 유통을 원활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나라에서 받는 물품도 돈으로 환산해서 받아들여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리고 주로 시골에서는 물물교환의 형태가 성행하는 것을 막고 현물로 받는 국가공납의 폐단도 줄게 되는 이점을 역설했다. 또한 길을 잘 닦아 말이나 사람으로 짐을 나르기보다 수레를 이용할 것을 줄기차게 내세웠고, 원활한 관개를 위해 수차(水車)의 전면적 보급을 주장했다. 그리고 백성의 굶주림을 풀어 주기 위한 방책을 적은 《구황촬요(救荒撮要)》, 돌림병을 막는 처방을 적은 《벽온방(辟瘟方)》등을 편찬하여 간행해서 보급했다.
그는 또 청나라를 쳐서 원수를 갚자는 북벌론이 효종과 송시열 등에 의해 제기될 때에,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국가재정을 튼튼히 하지 않고서는 한낱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그의 경제적 혁신정책은 번번이 묵살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주의 이익을 옹호하는 세력들과 현상유지를 내세우는 벼슬아치에 밀려 벼슬을 빼앗기고 조정에서 쫓겨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양주에서 1년 남짓 숨어 살다가, 효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조정에 나왔다. 그의 몇 가지 정책이 효종의 인정을 받아 부분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는 70세가 넘은 나이에 마침내 영의정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가 줄기차게 주장하던 대동법이 충청도에서 실시되었고, 일부 돈으로 국가의 공납을 받아들이는 제도도 만들어졌다. 돈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일반인에게 주전(鑄錢, 규격에 맞게 돈을 만드는 것)을 허가하기도 했다. 참으로 집념과 정열로 이룬 성과였다.
두 번째 영의정이 된 1654년, 그는 대동법의 확대 실시를 위해 더욱 노력했다. 이어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조목조목 적어 전라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하게 하려고 효종에게 바쳤다.
이에 대해 조정에서 다시 격렬한 논의가 벌어졌다. 애석하게도 그가 이 논의 중에 죽자, 대동법의 전국적 실시는 보류되었고 다른 개혁정책들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 유형원에게 이어진 개혁사상
그는 민중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생애를 바쳤던 사람이다. 조선조의 벼슬아치들 대부분은 특권을 누리는 데에만 열중하고, 자기들의 세력을 길러 정권을 잡는 데에만 정열을 쏟았다. 또 이(理)니 기(氣)니 공리공담을 벌이며 도학자로 자처하면서, 민생문제를 외면하는 썩은 유생들도 많았다. 김육은 기득권을 버리고 몸소 민중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그 개선방안을 끊임없이 찾았다. 이러한 인물을 역사에서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그의 주장들이 점진적인 개량에 초점을 두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는 없다. 그는 전면적인 제도 개혁을 내세우지 못했고, 체제 자체의 모순구조에 대해서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조선조의 신분구조에 따른 특권, 토지를 독점하는 원인들에 대해서 그리 명석한 견해를 보이지 못했다는 점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도 그는 공리공담을 일삼지 않았고, 국가와 사회의 이익을 위해 헌신했다. 그의 저서들은 사변의 것이 아니요, 현실 문제를 다룬 것들이 대부분이다. 더욱이 그는 책들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활자까지 새로 만들어 인쇄해 돌렸다.
그의 개혁사상은 그보다 40여 년 뒤에 태어난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에게로 이어졌고, 실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유교이론을 적당히 베껴 명망을 얻던 시대에 살면서, 백성을 위한 실질적인 개혁방안을 만든 업적으로 역사에 빛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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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
대동법을 실시한 실리적 개혁가
김육은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조선 시대 백성이 국가에 내는 세금은 기본적으로 전세(田稅), 공물(貢物), 역역(力役, 군역과 요역)이었다. 전세는 인종 때 영정법(永定法)으로 정해졌고, 공물은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제도로 국가가 필요한 물건을 매년 배정하는 상공과 각 지방의 특산물을 수시로 배정하는 별공이 있어 백성들의 부담이 컸다. 게다가 산간 지방에 바닷가의 생물을 진상하게 하거나, 산 것으로 진상해야 하는 공물도 있다 보니 구하기 힘든 물품에 대하여는 중간 상인들이 대신 납부하는 방납이 유행했다.
백성들이 이런 세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치자 농지는 황폐화되고 국가 재정도 궁핍해졌다. 이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한 것이 대동법으로 공물 대신 쌀로 통일해 납부하게 한 세금 제도이다. 대동법은 일찍이 조광조가 처음 제기한 이후 이이 등 여러 사람이 시행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00년 이상 논쟁의 대상이 되어 온 제도였다. 대토지 소유자들인 고위 관리들의 조직적인 방해 때문이었다.
김육은 일평생 오로지 백성을 잘살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 매진하면서 헛된 이론에 몰두하기보다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추구해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자세를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다.
김육은 조광조와 함께 개혁 정치를 추진하다가 죽음을 맞은 ‘기묘명현’ 중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4대손이다. 아버지 김흥우(金興宇)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성혼과 이이에게서 수학하고, 김상용, 김상헌 등과 교류한 인물로 서인의 정통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김육은 다섯 살에 《천자문》을 익혔으며, 열두 살에 《소학》을 통달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란을 떠났으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어머니와 할머니, 세 동생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 중에도 책을 외우면서 다녔으며, 가문을 일으키고 술을 입에 대지 말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평생토록 지켰다.
김육은 1605년(선조 38)에 사마 회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1609년(광해군 1)에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1611년 당시 집권 세력의 영수인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서 출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자, 김육은 성균관 재임으로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할 것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광해군은 노하며 김육을 비롯한 성균관 학생들을 모두 그 자리에서 쫓아냈다. 성균관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해 관직에 나갈 수 없게 되는 것을 뜻한다. 김육은 이덕형과 이항복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지만, 광해군의 조정에 나갈 뜻을 접고, 1613년 가평의 잠곡 청덕동에서 10여 년간 은거했다. 이곳에서 그는 화전을 일구고 숯을 구워 팔아 생계를 이어 갔다. 호를 잠곡이라 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자 인조는 광해군 시절 박해받던 인물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김육도 부름을 받고 올라와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다. 마흔네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간 것이다. 그러나 죄인 압송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관직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파직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파직된 다음 해에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한성이 반란군에게 점령되자 인조는 공주까지 피란을 가게 되었고, 이때 김육도 왕의 피란길을 따라갔다. 난이 평정되자, 피란 시절의 공으로 그는 음성 현감에 제수되었고, 그해 9월 중광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고위직 진출을 위한 자격을 얻기도 했다.
그는 비록 작은 고을이기는 하지만 음성 현감으로 일하면서,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현실을 목격하게 되었다. 특히 각종 세금 중에서 공물의 폐단이 제일 컸다. 그는 민생고의 원인과 타개책을 고민한 뒤 인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현실과 동떨어진 세금과 요역 징발이 민폐의 원인이므로 이를 감해 줄 것과, 이웃 충주가 관할하기 어려운 죽산과 진천의 행정구역을 음성현 소속으로 바꾸어 달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년여의 임기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온 그는, 사간원 정언, 병조 좌랑,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충청 감사에 제수된 그는 다시 한 번 목민관이 되었다. 충청도에 부임한 그가 현지의 사정을 살펴보자, 전쟁을 겪고 난 터라 음성 현감 시절보다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 있었다. 그런데도 각종 세금으로 인한 수탈은 한층 극심해져 견디기 힘든 형편이었다. 특히 공물의 폐단이 제일 컸다. 그는 시급히 대동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동법은 광해군 때 이미 경기 일원에서 시범적으로 실시되고 있었고, 인조 때에는 강원도에까지 확대 실시되고 있었다. 그는 대동법의 유용성이 이미 확인되었으므로 충청도에서도 실시할 것을 주장했고, 나아가서 충청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기득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하는 권문세가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지속적으로 건의했다.
그러던 1651년, 마침내 조정에서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또한 두 번이나 전라도 지역에서도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상소를 올린 덕분인지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도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의 숙원이던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을 끝내 보지 못한 채 다시 조정으로 올라왔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동법을 찬성하는 김육 등을 ‘한당’이라 하고, 반대하는 김집 등을 ‘산당’이라 했다. 김집은 송시열, 송준길 등 당대의 문재들을 거느린 서인의 영수격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는 막을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고, 효종이 즉위하면서 충청도와 전라도에 실시된 이후 함경도(1666년), 경상도(1677년), 황해도(1708년)까지 확대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한 이후 전국으로 확대 정착되기까지 꼬박 10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대동법의 실시로 가난한 백성들의 부담이 줄어들고 국가의 재정 수입은 증가되어 사회는 안정되었다. 또한 대동법은 수공업과 산업 발달을 촉진시켰고, 초기 형태의 산업 자본가들이 등장하면서 이후 신분 제도의 변화와 사회 발전을 주도할 수 있었다.
김육은 대동법 실시 외에도 후기 조선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643년과 1645년에 중국에 다녀오면서 화폐를 만들고 유통시키는 방법과 수레를 만들고 보급하는 방법, 그리고 청나라의 역법에도 관심을 가졌다.
당시 조선은 300년에 걸쳐 만들어진 《칠정산내외편》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절기가 맞지 않는 등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때문에 농업 활동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정확한 역법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1645년 관상감 제조로 일하던 김육은 중국의 신역법에 관한 책을 연구해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기로 하고, 중국에 사람을 보내 그 방법을 배워 오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1653년, 조선의 달력인 시헌력을 만들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 시헌력을 공식 책력(冊曆)으로 채택했다. 이때 만들어진 시헌력은 1896년(고종 33)에 태양력이 사용될 때까지 조선의 공식 달력으로 사용되었다.
* 십전통보. 1651년 김육의 건의로 만들어진 십전통보는 일반인의 화폐에 대한 인식 부족에 주전 원료의 부족으로 인해 결국 5년 후 유통이 중단되었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의 학문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편찬된 최초의 백과사전 《유원총보(類苑叢寶)》, 일종의 견문록인 《잠곡필담(潛谷筆談)》 등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책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직접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사업은 하나의 가업으로 자손에게 계승되어 우리나라 주자(鑄字)와 인쇄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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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결
<조선시대의 쌀 생산량>
연암 박지원은 면천군수로 있을 때 조사한 농촌의 실상을 『한민명전의(1799년)』에 기록했다. 연암은 토지 보유 상한선을 규제하는 한전론을 주장하기 위해 『한민명전의』를 썼으나, 나는 쌀 생산량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박지원은 한 가구의 식구가 다섯 명 이상은 되어야 농사에 종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면천군의 전결을 5인 가구 수로 나누어 가구당 생산량을 계산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한 가구의 땅은 1결 2부 8속에 불과했고, 연간 39석 12말 5승의 곡식을 생산했다. 20말이 1석인 대곡으로 계산하면, 한 가구의 수확량은 792말이다.
여기에 토지세인 전세로 72말을 내고, 종자로 50말을 제하면 670말이 남는다. 당시 자작농은 열에 한둘 밖에 없다고 연암은 기록했다. 수확량 절반인 396말을 지주에게 내고 나면, 이 가족에게는 275말이 남는다. 총 수확량의 35퍼센트만 남은 셈이다.
토지 1결은 수확한 벼 100부를 말한다. 줄기를 포함한 벼를 한 줌 잡은 양을 파(把)라 한다. 10파를 1속(束, 단)이라 하는데, 어른이 옆구리에 끼고 들 수 있는 양이다. 벼 10속, 즉 열 단을 1부(負, 짐)라 한다. 1부는 손으로 들지 못하고 등짐을 져야 하는 양이다. 그 등짐이 100개가 되는 양을 1결이라 부르는 것이다.
연암은 1등급 1결의 면적을 사방 100보라고 하였으니, 1보를 150센티미터로 계산하면, 면적은 22,500제곱미터이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조선 후기의 1결(10,800제곱미터)보다 두 배가 넘는 면적이다.
18세기의 1말은 6리터였다. 면천군의 땅 1결에서는 조곡 660말이 생산되었으니 리터로 치면 3,960리터다. 무게로는 3,300킬로그램이다. 200평 한 마지기당 조곡 97킬로그램의 생산량이다.
[출처] 『토지』의 생활상; 쌀 생산량|작성자 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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