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용공(조작) 사건

격침된 반잠수정 안에서 ‘간첩’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道雨 2021. 8. 21. 10:25

격침된 반잠수정 안에서 ‘간첩’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김형민 PD의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역사 덕후’ 아빠가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속 사건과 인물 이야기. 필자는 언젠가 ‘손녀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를 하게 되기를 꿈꿉니다.

 

***************************************************************************************************************



휴전 이후 남북의 첩보전은 치열했다. 북한도 집요하게 공작원을 내려보냈다. 정경희, 이선실, 정수일, 진운방 등은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간첩들이다.

* 2000년 8월15일 ‘무하마드 깐수’ 정수일씨(가운데)가 형 집행정지로 대전교도소에서 풀려났다.ⓒ연합뉴스

 

휴전 이후 남북의 첩보전은 치열했다. 남쪽도 북파 요원 수천 명을 침투시켰고, 북한도 집요하게 공작원들을 내려보냈지. 이들의 주요한 임무는 상대방 내부에 파고들어 그 일원으로 일상을 살면서, 자신들에게 협조하는 조직을 구축하는 일이었어. 그렇다 보니 남북의 ‘방첩(남한 측 표현)’ ‘반탐(북한 측 표현)’ 활동도 불꽃을 튀겼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희생됐다. 없는 간첩이 만들어지고, 뚜렷이 한 일도 없는데 갑자기 잡혀가서,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진 사람들이 엄청나게 생겨났지. 한국 정보기관이 저지른 씻을 수 없는 범죄야.

 

북한도 마찬가지였어. 일제강점기에 가장 견결하게 싸웠던 공산주의자 박헌영을 ‘미제의 간첩’으로 몰아 죽인 것부터 시작해서, 그들 역시 숙청 대상자들에게 걸핏하면 ‘남조선 특무(간첩)’라는 누명을 씌웠다.

 

이런 사정을 충분히 감안하고 기억하면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보자.

그럼 우리가 보고 들었던 수많은 간첩 사건 모두가 조작이고 허위였을까? 꼭 그런 것은 아니야.

 

1960~70년대 간첩 식별 요령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6·25 때 행방불명되었다가 최근에 나타난 자.” 북한은 남쪽에 고향을 둔 월북자들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고, 월북자 중 일부는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돼, 별안간 그리고 은밀하게 고향집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많았지.

 

북한의 연락부장, 즉 남한 내 공작 책임자를 맡았던 정경희는 대구 출신이었다. 전쟁 중 월북한 그녀는 1970년대에 여러 차례 남파돼 비밀공작을 펼친 후 복귀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연락부장 자리까지 올랐다고 해. 정경희가 남한에서 어떤 공작을 했으며 무슨 조직을 꾸렸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어. “할머니로 변장하기 위해 생니를 모두 뽑았다”라는 믿기 어려운 전설만 횡행할 뿐이지.

 

반면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활동한 진짜 할머니 간첩 이선실의 경우는, 1992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중부지역당 사건의 배후였다.

 

이 사건을 두고 조작이라는 말도 많았지만, 2006년 국정원 발전위원회의 진상조사에서 “실체는 있으나 확대, 과장된 사건”이라는 결론이 나왔고, 중부지역당 총책으로 알려진 황인오씨도 “조작 논란은 있으나 없는 조직은 아니다”라고 한 바 있지. 그러니 1917년생 할머니 간첩 이선실이 고희의 나이로 남한에 내려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그 규모가 어떻든 지하당을 만들어냈으며, 북한으로 귀환했다는 사실만은 부인하기 어려워.

 

이선실 역시 남한 제주도 출신이었다. 4·3사건을 겪은 후 월북했던 그녀는, 북송된 재일동포 신순녀로 위장해, 합법적으로 일본에 체류하게 됐다. 이선실은 이를 근거로 재일동포 고국방문단의 일원이 되어 당당하게(?) 한국에 들어온다. 그때 그녀는 제주도를 관광했다는데, 고향 제주도를 ‘관광객’으로 찾아든 감회가 어땠을지 궁금하구나.

 

외국인으로 가장해 남한에 잠입한 케이스로 ‘무하마드 깐수’ 사건을 빼놓을 수는 없지.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서, 신라시대 ‘처용가’의 주인공 처용을 신라에 온 아랍인으로 풀이한 〈신라-서역 교류사〉 등 연구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던, 필리핀 국적의 무하마드 깐수 교수가 북한에서 파견된 간첩 정수일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지.

 

수사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혐의를 담담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체포 직전까지 열과 성을 다해 진행하고 있던 ‘동서 교류사’ 작업이 중단되는 것을 안타까워했어. 사정을 들은 검사는 정수일의 마지막 원고를 찾아다가 검사실에서 정리할 시간을 주었을 뿐 아니라, 사형을 구형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해. 공안검사 처지에서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겠지. 무려 11개국 언어를 구사하고, 중앙아시아, 이슬람 관련 역사와 동서 교류사의 최고 연구자라 할 만한 인재가 남북 첩보전의 불쏘시개로 쓰인 일만큼 황당하고 서글픈 일이 또 있을까(다행히 그는 전향 후 석방돼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광주항쟁 이후 1980년대 상당수 학생운동 세력은 북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나아가 북한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그 노선에 따라 남한을 변혁하겠다는 이들도 생겨났지. 그중 국내 자생적 주체사상파의 원조라 할 ‘강철’ 김영환은, 몰래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1992년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을 발족시켰다.

 

그런데 민혁당 조직원 가운데 하나였던 김경환은 이상한 일을 겪게 돼.

“어떤 말레이시아인이 자꾸 나한테 접근하는데, 북한 쪽 사람인 것 같다(〈NL 현대사〉).”

그 말레이시아인의 이름은 진운방. 말레이시아 국적의 화교로, 서울 강남에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지. ‘강철’ 김영환이 북한 쪽에 그 정체를 묻자 이런 대답이 왔어.

“그도 (북한의) 사회문화부 소속인데, 서로 라인이 달라 혼선이 빚어졌다.” 즉 ‘강철’ 김영환과 진운방 양쪽 모두 북한과 연결돼 있었던 거야.

진운방은 ‘할머니 간첩’ 이선실이 구축한 중부지역당 소속이었다. 중부지역당 사건이 터지고 수사망이 좁혀오자, 진운방은 가족과 함께 탈출에 성공한다.

 

                                      * 1992년 중부지역당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간첩 이선실’.

 

 

1998년, 6년 만에 다시 나타난 진운방

 

그로부터 6년 뒤인 1998년, 전향을 결심하고 북한 관련 운동에서 손을 떼려던 김경환 앞에, 별안간 진운방이 다시 나타난다. 무너진 조직 선을 이어보겠다는 거였지.

김경환은 민혁당은 이미 해산됐고 지하당 운동을 할 상황이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차마 신고할 수는 없었다고 해.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이였고, 그의 아내와 딸이 북한에 있기 때문(〈NL 현대사〉)”이었어.

진운방은 풍채가 좋은 사람이었는데, 다시 만났을 때는 얼굴이 새까맣고 깡말라 있었다고 해. 위암 말기였다는구나. 한때 식당 주인으로 위장해 고정간첩으로 암약하던 진운방은, 위암 말기의 환자로 처자를 북한에 둔 채 남파됐던 거야. 북한 당국자들은 이걸 ‘혁명을 향한 불같은 투지’로 미화할지 모르겠지만, 생각하면 기가 막힌 일이지. 대관절 그의 인생은 무엇이며 그 아내와 딸은 또 뭐란 말이냐.

 

김경환의 소개로 구 민혁당 관계자들을 접촉한 뒤, 진운방은 전남 여수에서 귀환용 반잠수정에 올랐다. 그러나 이 반잠수정은 우리 군의 감시망에 걸렸고, 거제도 인근 해상에서 격침되고 말았어. 석 달 뒤 인양된 반잠수정 안에서 진운방의 시신이 발견됐다. 그의 딸에게 보내는 김경환의 선물과 함께였지. 좁아터진 반잠수정 안에서 한국 육해공군의 파상공격을 받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남북한 적대 관계가 지속되는 한, 아니 상호 우호 관계가 형성되더라도, 상대방의 정보를 캐내고 자신에게 유리한 정세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간첩들은 존재할 거야. 그들은 ‘통일 사업’이나 ‘자유민주주의’처럼 어떤 고귀한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심대한 범죄자가 되는 운명을 거스르기 어렵다. 본인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인생까지 망치면서 말이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는 민주공화국으로서, ‘김일성 만세’를 부르고 ‘김정은 대장님’을 찬미할 자유도 허용돼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자유를 간첩질의 자유로 착각해서는 안 되며, 그럴 경우에는 한국의 법이 정하는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가 말했던 것처럼, 간첩들은 국가보안법까지 갈 것도 없이 형법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오히려 남북의 평화와 통일에 해악을 끼칠 수 있으니까.

 

 

  • 김형민 (SBS Biz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