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전쟁, 혹은 진실의 순간
진부한 말이지만, 전쟁은 악 그 자체다. 특히 침략 전쟁을 그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다. 그 침략을 미국이 범하든 러시아가 범하든, 같은 태도로 침략에 대한 반대를 외치는 것은 타당하다. 한데 범죄인 전쟁은, 동시에 ‘진실의 순간’이기도 하다. 여태까지 각종의 선전 등으로 가려진 부분들이 전쟁의 순간에 그 진면목을 드러낸다.
가령, 미국의 이라크·아프간 침공은, 미국의 상대적인 군사적 우위와 함께 총체적 헤게모니의 쇠락도 동시에 여실히 보여주었다. 미군은 정규군의 저항을 격퇴하고 이라크·아프간 거점들의 점령에 성공했지만, 그 두 국가에서 안정적 친미 정권의 수립에 실패하여, 결국 점령을 종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두 전쟁 덕에 우리는, 미국이 비록 여전히 세계 군사 최강대국이지만, 북미와 유럽, 그리고 일본·한국 등 그 핵심 영향권 이외의 중동 같은 주요 지역에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헤게모니를 행사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이미 3주 이상 지속된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
첫째, 러시아군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다. 총동원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다르겠지만, 징병제와 모병제의 혼합으로 운영되는 상비군은, 우크라이나와 같은 세계 22위의 중간 규모 군대도 속전속결로 이기지 못하고, 불가피하게 소모전에 들어가야 할 정도로 그다지 우수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비록 정확한 숫자는 아직 없지만, 서방 각국 군사 전문가들의 추측을 종합해보면, 지난 3주간의 러시아 쪽 인명 손실은 이미 약 5천명 정도나 됐다. 이는 8년간의 이라크 침공이 초래한 미군 인명 손실 규모와 비슷한 숫자다. 즉, 러시아군은 여전히 ‘기술’보다 병사들의 ‘희생’에 더 기대는, 20세기 중반과 같은 ‘구식’ 군대다. 침략 전쟁의 명분도 매우 약해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돼 있다는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우리에게 중요한 포인트는, 이와 같은 군대로 러시아가 추가적 영토 팽창을 도모한다는 게 아마도 극히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이 전쟁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러시아의 주요 동반자인 중국 역시, 이 침략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러시아를 관찰하고 나서는, 대만 침공 등 군사 모험주의 노선을 좀처럼 쉽게 선택하지 못할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이 최근 미국의 경쟁국으로 부상했다지만, 그 군사력은 여전히 미국에 크게 밀리는 편이다.
둘째, 군사력 차원에서 많은 약점을 드러낸 러시아가, 외교전에서는 과연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는가? 러시아의 군사력은 생각보다 우수하지 못한 반면, 침략에 대한 외교적 반응은 생각보다 획일적이지 않았다. 이 차원에서 지난 2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규탄 결의를 둘러싼 유엔 총회의 투표 결과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가 그 결의를 지지했지만, 중국과 인도, 이란, 남아공 등 주요 비서구권 대국 내지 중진국들이 기권을 했다. 즉, 러시아와 서방 사이의 힘겨루기에서, 한국과 일본, 싱가포르를 제외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의 주요 국가들은 차라리 ‘중립’에 더 가까운 입장을 취한 것이다.
러시아가 역사상 ‘최고 수위’의 서방 제재에도 불구하고 계속 대서방 대결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는, 중국이나 인도 내지 터키나 아랍에미리트, 이스라엘, 남미 등을 통해서 제재를 ‘우회’할 수 있을 것으로 여전히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과 같은 미국의 동맹국마저도 대러시아 제재에 불참했다는 것은 꽤 의미심장하다고 하겠다.
즉, 군사적으로는 밀리지만, 다극화돼 가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 미국의 경쟁국들이 상당히 높은 수위의 대미 ‘도전’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 전쟁에서 눈으로 확인했다.
셋째, 정보전이나 여론전에서 러시아는 완벽하게, 여지없이 완패했다. 독재국가에서 권력에 대한 ‘아부’나 ‘비위 맞추기’ 효과라고나 할까? 지도부와 국가의 ‘수령’이 기다리고 기대했던 이야기, 즉 우크라이나 군대와 민간인들이 친서방 정책에 염증을 느껴 러시아군을 ‘해방군 대접’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정보요원들이 아낌없이 상부에 제출했던 모양이다. 알고 보니 저들이 작성한 ‘분석’이나 ‘보고서’들은 그저 ‘소설’ 수준이었다. 차라리 러시아 침공을 예고한 서방 정보기관들이 훨씬 더 높은 전문성을 드러냈다.
러시아의 전쟁 프로파간다는, 그 정보력만큼이나 믿지 못할 정도로 초라했다. 홀로코스트 피해자를 가족으로 둔 유대인을 대통령으로 뽑은 나라를 “탈나치화”하겠다든가,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자적 존재를 부정하는 발언을 한다든가, 아니면 “미국 전문가들이 우크라이나에 실험실을 차려 오로지 러시아 민족만을 겨냥한 특수 생물학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는, 공상과학소설(SF) 같은 이야기는, 애당초에 서방권이나 한국과 같은, 개방돼 있는 여론 시장에서 먹혔을 리가 만무했다.
러시아의 국가 선전기관들이 주로 유치한 소설 쓰기나 하는 이유는, 그들의 국내 여론 시장이 준폐쇄 시장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일부 고학력 중산층은 서방 등 외국 매체를 종종 인터넷으로 접하지만,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한다는 60~65%의 러시아인들은 주로 러시아 매체에만 노출돼 있다.
마찬가지로 국내에서 정보의 거대한 캡티브 마켓(captive market), 즉 경쟁자들의 접근이 불가능한 독점 시장을 가진 중국의 국가 프로파간다도, 서방이나 한국에서는 거의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역시 권위주의 국가들의 주요 약점 중의 하나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미국 패권 쇠락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군사적으로 미국보다 열세지만, 미국의 주요 경쟁국인 중, 러 가운데 비교적 약세인 러시아는, 이제 미국과 유럽의 하위 파트너를 직접 군사적으로 침략할 정도로, 미국 패권의 상대적 약화에 고무된 것이다.
전세계의 부정적 여론, 그리고 서방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이 침략이 경제적으로 가능해진 이유는, 다극화된 세계에서 서방을 대체할 만한 파트너들을 구할 수 있겠다는 러시아 쪽의 기대 때문이다.
이 국면에서 세계 시민사회에 절실한 것은, 헤게모니 다툼의 어느 한 ‘편’을 드는 것보다는, 자기 조국을 용감히 지키는 우크라이나 사람들, 그리고 반전과 독재 타도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투쟁하는 러시아 활동가들을 지원하고 지지해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푸틴의 침략을 격퇴하고 독재를 끝장낼 힘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국의 민중에게만 있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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