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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산업정책의 시대

道雨 2024. 2. 14. 09:29

다시 돌아온 산업정책의 시대

 

 

산업정책의 시대가 돌아왔다. 미국과 유럽을 필두로 세계 곳곳에서 자국의 전략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생산, 투자, 수출에 보조금을 지급하며 각종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규범’과 ‘안보’를 내세워 수출입 통제를 강화하고, 국외 생산기지를 자국으로 옮기는 기업을 지원해준다. 미국의 ‘반도체과학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 유럽연합(EU)의 ‘유럽반도체법’과 ‘그린딜산업계획’이 대표적인 예다. 독일, 프랑스, 중국, 일본, 인도 등도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어 자국의 디지털, 그린 관련 첨단산업을 키우려 하고 있다.

 

산업정책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15세기 중후반 국제무역이 본격화하면서부터 수출 보조, 수입 제한, 산업 보호 등 소위 ‘중상주의’ 정책이 대세를 이뤘다. 18세기 이후 자유무역 이론이 득세하면서 중상주의가 후퇴하는 듯했으나, 후발 주자들에게 국가 개입을 통한 산업 육성은 언제나 매력적인 선택지로 남아 있었다.

미국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의 ‘유치산업 보호론’에 힘입어 미국의 철강, 화학, 기계 분야 제조업이 급성장하며, 19세기 후반엔 산업혁명의 본산 영국을 앞질렀다.

우리나라의 눈부신 경제 성장 역시 산업정책이 작동한 사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없었다면 조선업, 중화학공업, 반도체산업이 주도한 한강의 기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한동안 산업정책은 경제사 교과서에나 나오는 얘기로 취급받았다. 그 옛날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했듯, 재화의 자유로운 교환이 생산을 극대화한다는 시장주의가 대내외 경제정책을 지배했다.

개발도상국들은 선진국과 국제기구에 의해 시장 개방을 요구받았고, 차별적 관세와 산업보조금은 세계무역기구(WTO) 규범에 의해 제한되었다. 산업정책은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을 야기하고, 지대 추구를 유발하며, 쏟아붓는 자원에 비해 효과도 별로 크지 않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분위기가 바뀐 건 비교적 최근이다.

국제분업체계 아래 중국을 비롯한 신흥 제조업 국가들이 급부상했고, 급기야 첨단기술 분야에서까지 선진국의 아성을 넘보기 시작하자, 미국과 유럽에서 위기감이 커졌다.

팬데믹 기간 중 마스크와 백신 부족, 전쟁발 에너지 위기 등은, 적어도 기간산업과 전략산업에선 생산 역량을 자국 내에 갖춰야 한다는 자각을 끌어냈다. 이 자각과 함께, 유행이 끝난 줄 알았던 산업정책이 부활했다.

 

레커 유하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교수에 따르면, 주요국 국제통상 관련 정부 정책 중 ‘산업정책’으로 분류되는 사례는 2010년 34건으로 8%에 불과했으나 2021년엔 1594건(48%)으로 급증했다.

사이먼 이버넷 스위스 장크트갈렌대 교수는 “산업정책”이 언급된 주요 경제지 기사 수가 1990년 1천회 미만에서 2023년 1만6천회로 16배 이상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산업정책의 시대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2023년 한해만 해도 산업경쟁력 강화, 공급망 안정, 국가안보 유지 등 다양한 이유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2천여개의 산업정책이 발표됐다.

지정학적 여건은 개선될 기미가 안 보이며, 첨단산업 주도권 선점을 위한 강대국 간 경쟁 역시 하루 이틀 안에 끝날 문제가 아니다.

자국 산업 보호 정책은 군비경쟁처럼 한쪽에서 시작하면 다른 쪽에서 따라가지 않을 재간이 없다.

 

2주 전 만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고위 관료는 자신들의 경제안보전략을 소개하면서, 유럽연합 설립의 근간은 경제 통합이지만, 미국과 중국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올해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에서 선거가 치러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국 산업에 대한 지원이 더 강해지면 강해졌지 후퇴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2022년 8월부터 ‘국가첨단전략산업법’을 시행하고 있고, 지난해부터 ‘소부장특별법’ ‘공급망기본법’ ‘자원안보법’을 연달아 통과시키며 산업정책의 시대에 대비하고 있다.

하지만 소규모 개방경제인 우리나라의 셈법은 미국, 유럽, 중국과는 다르다. 문을 걸어 잠그고 유치산업을 키울 수도, 그렇다고 문을 활짝 열고 저부가가치산업에 특화할 수도 없다.

급변하는 세계정세에서 중견국으로서 우리나라의 위치를 정립하기 위해선, 이런 큰 그림 속에서 세부적인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이념과 포퓰리즘에 사로잡힌 경제정책을 남발할 여유가 없음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장영욱 l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