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홍범도 흉상을 육사에서 뽑아내려는 자들의 배후

道雨 2024. 2. 15. 12:41

홍범도 흉상을 육사에서 뽑아내려는 자들의 배후

 

 

 

윤 정권의 반공주의 탓으로 단순치부해선 곤란

분단구조 재강화 통해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

일본과 2차대전 이전처럼 경쟁적 협력관계 부활

홍범도 등의 반제 반식민투쟁 눈엣가시일수밖에

 

*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내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2023.8.28. 연합뉴스

 

 

 

일본군이 중국 본토를 본격적으로 침략(중일전쟁)하기 시작한 다음해인 1938년 10월 무렵 일본 육군의 총병력은 34개 사단이었고, 그 중 32개 사단(94%)이 중국에 배치돼 있었다. 3년 뒤인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함대 기지를 기습 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일본 육군의 총병력은 51개 사단이었고, 그 중 35개 사단(70% 이상)이 중국전선에 투입돼 있었다. 미국과의 전쟁에 동원된 일본군 병력은 일본 총병력의 20%도 되지 않았다.

 

 

중국전선이 2차 세계대전 향방에 영향

 

2015년 10월 12일 성균관대 초청으로 서울에 온 중국 역사학자 후더쿤 우한대 국제문제연구원장은 일본군의 주력이 그렇게 중일전선에 발이 묶여 있었던 상황이 태평양전쟁 및 2차 세계대전의 향방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2015년 10월 12일 성균관대 초청 강연) 중국인들이 당시 일본 침략군에 맞서 싸운 공이 크고, 그만큼 많은 희생을 치렀다는 얘기다.

예컨대 유럽 동부전선의 독일-소련 전투(독소전)의 명암을 가른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 공방전(1942년 8월~1943년 2월) 때 히틀러는 당시 같은 ‘추축국’이던 일본에게 소련을 동시에 공격하자고 집요하게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했다. 중국전선에서 병력을 뺄 수 없었기 때문이다. 2차대전 중 가장 처참한 전투로 기록된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서 수백만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소련군이 승리했고 독일군의 상승세가 꺾였다. 2차 대전의 전환점이었다.(‘포츠담에서 샌프란시스코로-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의 삼중 분단구조’. 서재정 국제기독교대학 교수. <동아시아와 샌프란시스코 조약체제>에 수록, 우석대 동아시아평화연구소 서승 소장 책임편집. 진인진)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이후 유럽 동부전선(소련의 서부전선)의 이런 전세 역전의 대전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일 당시 일본군이 히틀러의 요구대로 중국에서 대병력을 연해주를 비롯한 소련 동부 시베리아 지역으로 빼돌려 침공했다면 소련군 전력이 분산돼 유럽전선의 전세가 달라졌을 것이다. 후더쿤 원장에 따르면 일본군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일본군 주력이 중국전선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1904~5년의 러일전쟁,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뒤의 시베리아 ‘출병’(침략) 등으로 끊임없이 소련 견제 및 시베리아로의 영토확장을 시도했던 일본이 그때 히틀러의 요구를 물리친 것은 1939년 5~8월 몽골 국경지대에서 펼쳐진 노몬한(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에 대패한 경험 등도 작용했겠지만, 중국전선에서 병력을 뺄 수 없었던 사정이 컸다. 만주지역 주둔 일본 관동군 병력만 한때 100만에 이르렀고, 패전 직전인 1945년 8월에도 관동군은 보병 22개 사단을 유지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배했던 동남아와 서남아, 중동지역으로의 일본군 침략이 제약당한 것도 중국전선에서 대규모 병력을 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55차 촛불대행진이 참가한 시민들이 지난해 9월 2일 광화문 광장을 행진하고 있다. 2023.9.2. 이호 사진작가

 

 

 

백선엽의 간도특설대도 관동군 산하

 

박정희와 백선엽 등 일본이 만주국에 세웠던 만주군관학교 조선인 출신들이 동포 조선인 항일독립운동가들을 ‘사냥’했던 ‘간도특설대’ 등도 관동군 산하였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노래>로 잘 알려진 항일독립운동가 김산(장지락)이 맞서 싸운 주적이 바로 이 일제 관동군과 장제스의 국민당군이었다.

1905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항일 학생운동에 가담했던 김산은 1919년 3.1 봉기와 임시정부 수립 뒤 중국으로 가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임시정부에서 일하다 중산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1924년 광저우에 설립된 중국혁명 군사간부 양성학교인 황푸(황포) 군관학교 교관이 됐다. 의열단을 만든 밀양 출신의 김원봉, 그리고 오성륜, 김성숙, 손두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 채원개 등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임시정부 간부였던 조소앙과 박찬익 등도 황푸 군관학교에 입교했다. 이 학교는 중국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 말년에 성립된 국공합작의 산물로, 소련이 주도한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재정지원으로 설립됐다. 황푸 군관학교에는 김산 등 수십명의 조선인들이 교관으로 재직했고, 100여 명의 조선인 학생들이 입교했다.(<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과 장준하(<사상계> 발행인) 등은 학병으로 일본군에 동원당했다가 탈출해 임시정부 쪽으로 가서 싸웠다.

 

* 약산 김원봉. 2023.8.29.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중국 국공내전 결렬로 엇갈린 조선인 혁명가들 운명

 

1927년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 이후 제1차 국공 내전이 벌어지면서 중국혁명을 통해 조선해방을 꿈꿨던 이들 조선인 항일운동가들의 운명도 갈렸다. 당시 광저우에 있던 조선인 청년 150여명이 공산당 쪽에 가담했고 그들 중 80여명이 2000여명의 ‘교도단’(적군)에 포함됐다.  1920년대 중반 광저우의 군사시설에 230여명의 조선인들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사회주의는 세계 거의 모든 식민지 민족해방(독립)운동세력의 목표와 희망이었다.

그들 조선인 중 상당수가 희생됐고, 몇 년 전 가본 광저우에는 그들의 무덤과 묘비들이 다수 남아 있었다. 

3.1봉기 뒤 봉쇄당한 국내활동에 절망한 다수의 조선 청년 독립운동가들이 그렇게 해서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혁명을 통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조선까지 해방시키겠다는 열망을 실현하려 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임시정부 계통에서, 다수는 중국 혁명가들을 따라 옌안으로 간 ‘장정’에 참여했고, 만주(동북)지역의 많은 조선인들이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중국 동북지방 항일무장세력의 주력 가운데 한 갈래가 이들 조선인이었다.

 

 

미국, 한중 반제항일투쟁 말소하고 전범국 일본과 동맹

 

후더쿤 소장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뒤 미국이 주도한 ‘전후 체제’는 그 전쟁에서 중국이 수행한 항일전쟁(반제국주의 전쟁)의 역할을 말소해 버리고 미국의 역할만 부각시켰다. 얄타회담과 포츠담 선언 등에서 장제스의 중국은 그 역할을 인정받았다. 도쿄 국제전범재판에서도 그러했으나 미국-일본 전쟁과 관련된 부분만 일부 인정받았다. 그러나 전후 처리의 총결산이라 할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공산화된 중국(대만 정부도)은 아예 초청받지도 못했다. 중국만 그런 게 아니라 한국(남북한)도 마찬가지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 항일(반제국주의)전쟁의 주요 축 가운데 하나였던 중국의 항일전쟁은 미국이 전후체제를 짤 때 핵심이념으로 내새운 반공주의 ‘냉전 분단’ 공작 속에 증발돼 버렸다. 아울러 중국의 항일세력과 연대하며 일종의 한중 민족연합군을 형성했던 다수 조선인들의 반제 항일독립투쟁도 휘발돼 사라졌다.

대신 미국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연합해서 대적한 제국주의 일본의 우익 전범세력을 잔존시켜 그들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었고, 동시에 미일 안보조약을 체결해 자신들의 최대의 동맹국의 하나로 삼았다. 그러면서 중국-조선의 반제 항일연대를 반공의 이름으로 오히려 적대시했다.

 

*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으로부터 귀환한 2021년 8월 15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국가보훈처 외벽에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추모 현수막이 걸려 있다. 2021.8.15 연합뉴스

 

 

 

“안중근은 테러리스트” 주장의 뿌리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을 위한 준비회의 때 처음에는 한국의 항일전쟁을 공식 인정하면서 한국의 조약 서명에 찬성했던 미국은 그 뒤 일본 영국의 요구에 따라 한국의 항일 투쟁을 무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동남아와 중국 일부를 식민지배했던 영국은 종전 뒤 일본의 조선 지배에 반대했으나 조선이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가가 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자국 식민지들을 계속 지배하려 했던 영국으로서는 조선이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이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미국은 그런 영국, 일본과 한 배를 타고 동아시아의 전후체제 재편을 통해 패권을 확립했다.

일본제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실행한 안중근, 윤봉길 의사 등을 불법적인 테러리스트로 지금까지 폄훼하고 있는 일본 지배세력과 이를 두둔하는 미국의 냉전 분단 전략은 자국의 동아시아 패권 확립으로 끝난 미국의 2차 대전 전후처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뿌리깊은 조선의 항일전쟁 역사를 무시한 미국

 

한국(조선)의 항일전쟁은 중국보다도 그 뿌리가 깊다. 1894년 청일전쟁 때 중국이 일본에 굴복했을 때도 동학농민군 수십만이 목숨을 바쳐 일제의 침략에 저항해 싸웠고, 1905년의 을사늑약 이후 끊임없이 일어난 의병항쟁과 1919년 3.1 봉기 이후 전개된 조선-중국 반제 항일 연합전쟁이 그러했다. 중국의 항일전쟁은 1931년의 ‘만주사변’과 1932년 만주 괴뢰국 건국을 지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야 본격화됐다. 1919년의 ‘5.4운동’도 그해 3월에 일어난 조선의 3.1봉기로 촉발됐다. 그 사실은 몇 년 전 타계한 재일 사학자 강덕상의 <여운형 평전>에 등장하는 중국 지식인들의 격문들이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 격문들은 조선의 3.1봉기를 거론하며 중국도 궐기할 것을 촉구했다.

미국은 2차 대전 전후처리 과정에서 조선과 중국의 오랜 항일전쟁 역사를 모조리 무시하고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뒤 약 4년에 걸쳐 진행된 자국의 대일전쟁만 부각시켰다. 일본에 대한 전범재판과 전쟁배상 등도 모두 미국 패권 확보에 필요한 부분만 인정했다.

 

* 1일 서울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독립전쟁 영웅 5인 흉상 제막식에서 사관생도와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육사는 독립전쟁에 일생을 바친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 그리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탄피 300kg을 녹여 제작했다. 2018.3.1. 연합뉴스

 

 

 

2차 대전 뒤 중첩된 ‘3개의 분단’

 

이와 같은 2차 세계대전 뒤의 뒤틀린 동아시아 지역 전후 처리 문제를 중첩된 ‘3개의 분단’이라는 특유의 개념 설정을 통해 한층 더 명징하게 보여 준 사람이 서재정 도쿄 국제기독교 대학 교수다.

서 교수는 2차 대전 시기의 동아시아가 널리 알려져 있듯이 미국 주도의 연합국과 일본 및 추축국 사이의 전쟁터였을 뿐만 아니라, 서구제국들 및 일본제국에 대항하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서 교수는 2차 대전 종식 뒤 동아시아에 형성된 전후체제는 전쟁시기의 이런 중층적 갈등구조를 반영해 3가지 분단이 중첩된 구조로 나타났다고 본다.

하나는 미국과 소련의 대립을 중심축으로 해서 미국 주도의 공산권 봉쇄정책과 소련 주도의 국제공산주의 노선이 분단선을 이룬 ‘냉전 분단’이다. 하지만 훨씬 더 복잡하고 중층적인 전후 동아시아 상황을 냉전이라는 세계적 분단으로 모두 환원시킬 수는 없다.

냉전 분단과 중첩된 동아시아 전후체제의 또 다른 특수성의 하나는 ‘식민주의 분단’으로, 일본 및 서구 제국들의 식민지배 및 침략 유산과 그 청산을 둘러싼 갈등과 싸움으로 표출됐다.

마지막 또 하나의 분단은 한국/조선과 중국/대만, 남북 베트남 등에서 나타난 ‘민족국가 분단’이다.

이 세 가지 분단이 서로 유기적 연관성을 가진 하나의 삼종 세트를 이루면서 동아시아 전후체제를 구성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동아시아 전후체제에 대한 통상적인 인식은 냉전 분단에 편중된 불완전한 것이었다. 식민주의 분단과 민족국가 분단이 상당부분 냉전분단에 의해 강요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이 두 분단은 냉전 분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성을 각기 지니고 있다.

 

* 25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 손자 이종걸 전 의원이 발언하고 있다. 2023.8.25. 국회 홈페이지 갈무리

 

 

미국을 ‘은혜의 나라’로 각인시킨 냉전 분단 구조

 

앞서 살펴봤듯이 이를 냉전 분단으로 환원해 버리면 중국과 조선의 항일 전쟁, 서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반제국주의 투쟁은 삭제돼 버리고, 미국과 일본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 베트남과 한반도의 분단, 중국-대만 문제도 담론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다.

전후체제의 기본 틀이 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미국은 냉전 분단을 앞세운 채 동아시아의 식민주의 분단과 민족국가 분단은 사실상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는 냉전 분단 구조를 통해 자국을 일본제국주의 침탈과 공산세력 침략으로부터 동아시아 태평양을 구한 해방자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전범국 일본이 아닌 피해자인 한반도를 분단하고, 신탁통치 찬반대결을 부추겨 한국전쟁 발발로 몰아가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주역 가운데 하나가 미국이다. 그럼에도 다수의 한국인들이 그런 미국을 ‘은혜의 나라’로 여기는 전도된 인식을 갖게 만든 것이 바로 이 냉전 분단 구조다.

 

 

진주만 기습 전까지 미국은 일본과 경쟁적 협력관계

 

미국의 동아시아 개입과 지배전략의 뿌리는 훨씬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8년 스페인 제국과의 전쟁을 통해 하와이와 괌 필리핀 등을 장악한 미국은 1905년 일본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필리핀, 조선에 대한 쌍방의 독점적 지배권을 보장했다. 1941년 12월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전인 그해 7월 일본군이 말레이 싱가포르 등 동남아(남방)의 서구제국 식민지들을 침략할 때까지 사실상 일본과 경쟁하면서 협력하는 일종의 연합세력을 형성, 유지했다. 그 목적은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대륙, 특히 중국에 대한 이권확보였다. 1902년의 영국-일본 (영일)동맹이 그렇고, 미국이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직전까지 일본에 대해 석유와 철광 등 전략물자들 공급을 계속한 것 역시 동아시아 대륙 지배를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대륙에 대한 미국의 지배 욕망은 일본 패전 뒤의 전후처리를 위한 연합국들 협상무대였던 카이로 선언이나 얄타, 포츠담 회담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이 한반도에 대한 40년간의 식탁통치를 계속 주장한 데서도 드러난다. 소련은 조선의 자체적인 임시정부 구성과 연합국들의 후원을 주장한 반면 미국은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결렬될 때까지도 한반도 신탁통치를 고집했다. ‘미국 반탁, 소련 찬탁’이라는 <동아일보>의 오보(의도됐든 아니든) 등이 만들어낸 한국인들의 해방 정국에 대한 통상적 인식이 사실과 정반대로 뒤집힌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검증돼 있다.

서재정 교수에 따르면, 카리브해뿐만 아니라 아시아태평양에서 스페인 제국을 몰아내고 그 이권을 대신 차지한 미국은 시종일관 동아시아 앞바다(서태평양) 일대를 자국의 내해, 즉 ‘호수’로 만들고 싶어 했다.

 

* 국민의힘 신원식 의원이 14일 경기도 용인시 지상작전사령부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 국정감사에서 질의하고 있다. 2022.10.14. 연합뉴스

 

 

흔들리는 미국 주도의 냉전 분단 구조

 

미국은 이런 욕망을 일본제국 파괴와 전후 냉전 분단을 통해 달성했다. 대신 일본 및 서구 제국과 한국(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민족들의 반제국주의 전쟁과 제국주의 지배의 유산인 민족국가 분단은 해결되지 못한 채 무대 뒤로 은폐됐다.

이 은폐된 식민주의 분단과 민족국가 분단이 무대 위에 극적으로 다시 떠오른 건 1970년대의 데탕트로 대표되는 냉전 분단의 약화 때였다. 미국의 지원으로 패전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선 유럽과 일본의 재등장, 미국 일극지배의 토대였던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로 신자유주의 쪽으로 글로벌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된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끝내기 위해 적대국 중국과 손을 잡았다. ‘핑퐁 외교’를 거쳐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으로 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이자 국가주석 마오쩌둥을 만난 것이 1972년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과의 대립이 중심축을 이뤘던 동아시아의 2차 대전 이후 냉전 분단 구조가 흔들리면서 식민주의 분단과 민족국가 분단 모순이 더욱 뚜렷하게 표면 위로 부상했다.

일본이 재빨리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등 동남아 국가들과도 국교를 맺었다.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과 중국 및 소련과의 수교도 이런 흐름 속에서 나왔다. 남북 기본합의서가 작성되고 적십자회담과 이산가족 상봉도 그렇게 시작됐다.

일본의 장기 자민당 독재체제(1955년 체제)가 흔들리면서 1993년에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오자와 이치로가 자민당을 탈당해 비자민 연립정권을 구성한 것도 마찬가지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연이은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냉전 분단 구조가 흔들리면서 식민주의 분단과 민족국가 분단이 표면 위로 떠올랐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 위안부 공개증언으로 은폐됐던 일본의 전쟁범죄 치부가 국제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미야자와 기이치 정부의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사상 처음으로 위안부 강제 동원 등의 전쟁범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죄와 재발방지를 약속한 ‘고노 담화’가 나온 것도 그런 맥락 위에서였다.

1975년 베트남이 통일되고, 남북한과 중국-대만 간에 분단 해소를 위한 평화적인 접근이 이뤄진 것도 마찬가지.

금융자본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신자유주의 체제의 상품 제조 및 소비 기지로 육성한 중국경제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뒤 급속도로 성장해 GDP 규모에서 2010년 일본을 추월하고 2016년엔 구매력 평가기준(ppp) GDP가 미국마저 넘어섰다.

이런 정세변동은 냉전 분단 구조 속에서 번성했던 미국과 일본의 지배적 지위를 흔들고 위협했다. 선발 패권국과 후발 도전자 간의 패권 교체 때 전쟁이 일어난다는 그레이엄 앨리슨의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유행한 것도 이런 정세변동에 위기의식을 갖게 된 미국이었다.

 

* 윤석열 대통령이 28일 인천에서 열린 2023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 만찬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3.8.28. [공동취재] 연합뉴스

 

 

 

표면 위로 떠오른 식민주의 분단과 민족국가 분단 구조

 

이런 가운데 민족국가 내부에서도 은폐되고 봉쇄됐던 민족 내부의 ‘친일파’로 통칭되는 식민주의 분단 기생세력과 식민주위 청산세력 간의 충돌이 표면 위로 다시 떠올랐다.

제주 4.3과 거창 양민 학살 등 냉전 분단 구조 속에서 저질러진 추악한 범죄들이 까발려지고 진정한 화해를 위한 진상규명 노력이 경주된 것도 이런 상황변화를 반영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반격도 거세졌다.

일본과 한국에서 냉전 분단 세력의 기득권이 흔들리면서 위기의식을 갖게 된 보수우익 세력의 결속과 반동적인 도발이 강화되면서 그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한 일련의 사태는 미국이 흔들리는 패권적 지위를 냉전 분단 구조 재확립으로 유지 강화하려는 시도와 밀접하게 연괸돼 있다.

 

“이러한 요동의 시기는 이제 세계적 역관계에 의해 다시 한 번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중국의 재부상과 이에 대한 미국의 견제가 본격화하는 가운데 완전하게 해소되지 않았던 중층적 분단이 다시 강화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냉전 분단’의 본질이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트럼프 정부의 ‘미국 우선주의’-바이든 정부의 ‘가치외교’를 통해 일관되게 미국이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냉전 분단’으로 구축했던 독점적 지위를 유지 또는 강화하려 하고 있다.

일본은 이에 편승해 아베 정부의 ‘적기지 공격능력’-기시다 정부의 ‘반격능력’을 통해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의 전환을 시도하며 ‘식민주의 분단’의 유지 강화를 추구하고 있다.

한국 보수정권도 이에 편승해 냉전 분단, 식민주의 분단, 민족국가 분단 강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이는 윤석열 정부 들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대만해협 긴장도 전례없이 높아지고 있다. ‘신냉전’은 동아시아에서 삼중 분단구조의 요동에 맞서 이를 새롭게 강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포츠담에서 샌프란시스코로-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의 삼중 분단구조’)

 

 

육군사관학교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한국에서 뉴라이트 세력이 다시 결집하고 윤석열 정권이 등장하는 과정은 오바마 정권 이후 트럼프 정권을 거쳐 바이든 정권에 이르는 미국 및 아베 정권 이후 일본의 보수반동체제 강화과정을 그대로 복제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한국 내의 보수우익세력은 근대 일본의 한반도 침탈 이래 형성되고 미국의 한반도 점령 이후 재강화된 식민주의 분단 기생세력 및 그 후예들과 겹친다. 그들은 미국과 일본 보수우익과 이해를 같이하면서 그들과 같은 배를 탄 동맹세력임을 그들 스스로 ‘당당하게’ 표방하고 있다.

걸출한 항일독립 영웅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사상적 전력’을 이유로 육사에서 퇴출돼야 한다면, 코민테른의 재정지원으로 운영된 황푸 군관학교에 입교한 조소앙이나 채원개, 김원봉, 교관이었던 김산, 그리고 당시 황포 군관학교를 운영한 장제스의 지원을 받고 연합한 김구 등 임시정부 세력이 배척당하는 것 또한 이상할 게 없다. 옌안이나 연해주로 가서 중국공산당, 소련공산당과 함께 싸우면서 때로 대립하기도 한 항일무장세력은 말할 것도 없다.

육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들이 그런 역사를 폐기 처분하고 오직 미국의 지원 아래 1948년에 한국정부를 세운 이승만을 추앙하며 그들 일파를 유일한 ‘건국세력’으로 떠받들면서 중국 및 북한과의 적대적 대결을 강조하는 이유도 자명해 보인다.

그들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자칭 ‘건국세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항일투쟁세력에게 ‘좌파’ 내지 ‘빨갱이’ 딱지를 붙이고 친북, 친중 내지 북한 동조세력으로 몰아 혐오, 배척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려 한다. 마치 이승만의 ‘건국세력’을 뺀 거의 모든 항일독립운동세력의 민족해방운동 대의를 북한 정권이 전유하고 있기나 한 것처럼, 스스로 그것을 선언하는 듯한 형국이다.

설사 북한이 그렇게 주장하더라도 북의 그런 논리 비약과 억지 주장을 비판하고 배척해야 마땅한 그들이 왜 엉뚱하게 홍범도를 비판하며 육사 교정에서 그와 이회영 등의 독립운동 영웅들의 흉상을 제거하려는가.

 

*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 2023.8.28 연합뉴스

 

 

 

홍범도 동상을 육사에서 퇴출시키려는 까닭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그것이 동아시아를 그들의 내해, 호수로 다시 복구하려는 미국, 일본이 냉전 분단 구조의 부활, 이른바 신냉전 분단 구조를 통해 흔들리는 패권지배를 재확립해 2차 대전 뒤의 동아시아 지배체제를 오늘날 다시 되살리려는 전략에 기막히게 부합한다는 건 분명하다.

냉전 분단 구조의 재구축, 곧 신냉전 분단 구조의 확립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동아시아 국민들을 괴롭히고 있는 식민주의 분단과 민족국가 분단을 다시 덮어 감추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이익에 철저히 복무하는 이 신냉전 분단 구조 재확립은 주적을 중국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 소련을 주적으로 설정한 과거의 동서냉전 분단 구조와 다를 뿐 적대적 공생을 통한 패권유지 전략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식민주의 분단 구조와 민족국가 분단의 희생자인 한국에서 주류 보수우익 세력이 이 신냉전 분단 구조 재구축에 동조하는 것은, 식민주의 분단 구조와 민족국가 분단 구조의 은폐 및 재강화에 동의하는 것이고, 그것은 민족적, 국가적 입지를 스스로 좁히고 파괴하면서, 자신들의 협소한 계급적, 종족적 이익 확보에만 집착하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사 교정에서 퇴출시키려는 것은 그런 그들의 의도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다.

 

 

 

한승동 에디터sudohaan@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