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윤석열 대통령과 오세훈 시장,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

道雨 2024. 4. 19. 11:37

윤석열 대통령과 오세훈 시장,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

 

 

4·19의 의의를 퇴색시키려는 시도는 우리 사회의 퇴행

 

 

윤석열 대통령은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이념적 기초로 세우려 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경복궁 바로 옆에 이승만기념관을 세우려 한다.

이런 시도는, 해방정국하의 독립운동진영이 볼 때는, 세상을 일제 패망 이전으로 후퇴시키는 일이다. 독립운동가와 그 지지자들로 구성된 이 진영이 이승만에 맞선 4·19혁명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돌아보면, 윤석열 대통령과 오세훈 시장이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지가 명확해진다.


2018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된 독립운동가 송남헌(1914~2001)은, <미국의 소리> 라디오 방송으로 송출되는 한국 독립운동 소식을 국내에 전파하다가,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죄로 징역 8개월을 받고, 서른 살 때인 1944년에 석방됐다.

그가 81세 되던 해에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등과 대담한 내용이 1995년 2월 <역사비평>에 실렸다. 대담에서 그는 46세 때 경험한 1960년 4·19의 감동을 이렇게 회고했다.

"4·19가 터졌을 때의 그 감격은 그야말로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요. 8·15를 맞던 심경으로 4·19를 맞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지요."

대담의 또 다른 참석자는 독립운동가 조봉암과 함께 활동했던 정태영 전 동양통신사 외신부 기자다. 조봉암과 함께 구속됐다가 풀려난 뒤 조봉암 연구에 매진해, 1991년에 <조봉암과 진보당>을 저술한 그는, 8·15를 맞는 심경으로 4·19를 맞았다는 송남헌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는 "제2의 해방이지요"라고 화답했다.

4·19를 감격스럽게 맞이한 이유
 

 4·19 혁명 당시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현수막을 든 시위대의 모습 ⓒ 문화재청

 

 

이들이 4·19를 제2의 8·15, 제2의 해방으로 인식한 데는 1960년 당시의 정세가 한몫을 했다. 해방정국하의 독립운동진영이 염원했던 것이 실현될 가능성이 4·19 직후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해 4월 26일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제자인 허정 외무부 장관(4월 25일 임명)에게 대통령 권한대행을 넘긴 이승만은 5월 29일 아침 일찍 김포공항에서 이륙해 하와이로 도주했다. 그런 뒤인 6월 19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다음날 한미 정상회담에서 남북 관계에 관한 허정과 아이젠하워의 획기적인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허정 국무총리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회담에 있어서 한국의 통일에 대한 한국 국민의 깊은 갈망을 인정하였다. 그들은 통일된 독립민주 한국을 평화적 방법으로 대의정치제도하에서 달성하고 이 지역에 평화와 안전을 완전히 회복할 것을 목표로 국제연합 결의에 규정된 제(諸)원칙에 의거하여 이 비극적 분단에 평화적 종결을 초래하도록 모든 노력을 계속하여야 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일제 지배에서 갓 벗어난 한국을 남북으로 분단시킨 이승만 정권은 통일정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있다고는 했지만,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이 내세운 북진통일의 진(進)은 군대의 진격을 의미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통일운동을 하면 조봉암처럼 되기 쉬웠다. 조봉암은 평화통일을 외쳤다는 이유로 1958년 1월 13일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이승만 집권기에는 북진통일 이외의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 대역죄나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것이 이승만이 쫓겨난 직후에 단번에 뒤집힌 것이다.

한국 민심을 세밀히 관찰하는 미국이 한미 공동성명을 통해 북진통일론을 공식 폐기했다. '통일된 한국을 평화적으로 달성한다', '비극적 분단의 평화적 종결을 초래한다'라며 북진통일론을 지워버렸다. 독립운동진영이 제2의 독립투쟁을 통해 없애고자 했던 한반도 냉전정책의 하나가 이승만 하야와 함께 없어진 것이다. 송남헌과 정태영이 제2의 8·15를 언급한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해방과 함께 두 개의 불청객이 들어왔다. 하나는 외국군들이고 하나는 분단이다. 이 둘은 해방의 의의를 격감시켰다. 김구나 김규식 등이 제2의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그로 인해 해방과 독립이 불완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불완전 상태를 지탱하며 정권을 유지하고 통일을 훼방한 것이 이승만이다. 그래서 이승만 추방은 해방과 독립의 장애물을 치우는 일이었다. 송남헌과 정태영이 4·19를 감격스럽게 맞이한 것은 그 때문이다.

4·19가 혁신계에 유리한 정치 지형 선사

민주당과 더불어 4·19의 수혜자가 된 집단은 이른바 혁신계다. 이들은 4·19 직후의 7·29 총선을 통해 제한적이나마 의회 진출을 이뤘다. 그해 제5대 총선에서 혁신계인 사회대중당은 상원인 참의원(총 58석)에서 1석, 하원인 민의원(총 233석)에서 4석, 역시 혁신계인 한국사회당은 참의원·민의원에서 각 1석, 혁신계의 하나인 혁신동지총연맹은 참의원에서 1석을 얻었다.

혁신계는 4월혁명 직전만 해도 제도권에 기반이 없었다. 이들과 이들의 선배들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하에서 지속적인 탄압의 대상이었다. 그중 일부가 조봉암의 진보당 운동을 통해 제도권 진출을 시도했지만 수포가 되고 말았다.

그런 세력이 참의원에서 3석, 민의원에서 5석을 차지했다. 관점에 따라서는 혁신계의 승리로 볼 수도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혁신계가 참패했다고 평했다. 그해 8월 12일 자 <경향신문> '서리 맞은 혁신정당 상(上)'은 "된서리", "참패" 같은 표현을 써가며 혁신계의 선거 결과를 다루었다.

이른바 '4·19 혁신당'인 이들이 상하원 291석 중에서 8석을 차지한 것이 참패로 해석된 것은 4·19가 이들에게 유리한 정치 지형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7월 28일 자 <경향신문> '하루 앞둔 총선 전망'은 "중반전에 들어와서 혁신계의 대두가 경남북에서 하나의 유행 현상"이 됐다고 한 뒤 "혁신계는 마지막 뿜 조성에 필사적이나, 그들의 추계대로 30여 석을 얻기는 지난할 것 같다"며 "자유당계와 혁신계를 20석으로 추산"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선거 전날에는 자유당과 합쳐 20석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됐지만, 1개월 전만 해도 단독 20석도 가능할 것으로 전망됐다 위 대담에서 서중석 교수는 "6월 하순만 하더라도 7·29 선거에서 혁신계가 20석은 차지할 거다, 한때는 우리나라도 보수·혁신의 대결로 갈지도 모른다고 하더니만 혁신계가 참패를 했거든요"라고 회고했다.

이승만이 죽어야 독립운동의 가치 살아나
 

 지난 2월 28일 서울 종로구 열린송현녹지광장에서 열린 이승만기념관 건립추진 규탄 기자회견에서 청년대학생겨레하나 관계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월 23일 서울시의회 임시회 시정질문에서 이승만기념관 건립 장소로 송현광장을 언급했다. ⓒ 연합뉴스

 
4월 혁신당들의 돌풍은 이번 4·10 총선의 조국혁신당 돌풍보다 대단했다. 이들이 차지한 의석 수는 조국혁신당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들이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의 혁신계 돌풍을 일으켰다.

그런 돌풍이 가능했던 것은 독립운동진영의 계승자들에게 유리한 정치 지형이 일거에 형성된 결과였다. 이승만이 만들어놓은, 독립운동진영에 불리하고 친일파에 유리한 정치환경이 4·19로 인해 일시적으로 붕괴한 덕분이었다.

7·29 총선에 출마한 혁신계 후보 상당수는 김구·김규식과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었다. 남북분단을 해방과 독립의 장애물로 받아들이고 남한 단독정부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이 선거에 뛰어들었다. 2007년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보고서>에 실린 김선미의 '4·19를 전후한 시기 통일운동의 흐름'에 이런 대목이 있다.

"7·29 총선에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제도 정치권 바깥에 있던 재야 정치인과 진보적 지식인 그리고 진보당 출신 정치인들이 대거 출마하여 선거판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승만이 집권할 때는 독립운동진영이 숨을 죽이고 살았다. 그러다가 이승만이 쫓겨나자 이들이 혁신계를 형성하며 제도권에 뛰어들었다. 이승만이 살면 독립운동이 죽고 이승만이 죽으면 독립운동이 살아나는 한국 현대사의 역학관계를 반영하는 장면이다.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이념적 기초로 세우고 경복궁 바로 옆에 이승만기념관을 세우는 시도는 그래서 위험하다. 이승만이 죽어야 독립운동의 가치가 살아난다. 그래서 4·19는 제2의 8·15다. 4·19의 의의를 퇴색시키는 시도는 우리 사회를 8·15 이전으로 퇴행시킬 수밖에 없다.

 

 

 

 

김종성  qqqkim2000

 

 

****************************************************************************************************

 

 

이승만 되살리기의 반(反)역사성

 

역사적으로 사장(死藏)된 인물 다시 끄집어내서야

 

 

윤석열 정권의 극단적 역사퇴행성에 올라탄 이승만 되살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영상시대를 맞아 ‘건국전쟁’이라는 영화를 통한 역사 되짚기의 경박한 움직임 또한 우려스럽기 짝이 없다. 여기에 편승하여 송현동에 이승만 찬양소를 만들겠다는 정치인의 포퓰리즘적 발 빠름 역시 개탄스럽다.

이에 이승만에 관한 역사적, 더 엄밀히는 민족사적 평가를 체계적으로 내릴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미 1995년 3월 <한국사연구 88집>에 “이승만에 대한 민족사적 평가”를 내린 긴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 짧은 글에서는 축약적인 평가를 내리고자 한다.

 
이승만의 생애는 조선조 말 일제의 조선침략이 본격화하는 시점에서부터,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분단, 한국전쟁, 전후복구기, 4월혁명, 하와이 망명기간에까지 걸친다.

이 가운데 우리들과 민족의 삶과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한 시기는 해방공간과 남북분단이 실현되는 제1공화국 수립기다. 그 다음으로는 분단정부 수립 이후 나라의 기틀을 갖춰나가는 이승만의 집권기다.

이 세 기간에 그는 가장 선봉에 선 장본인이다. 그 외의 기간 그의 족적은 미미한 것으로 논의할 필요가 없다.

이 세 시기는 우리 민족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역사행보를 하는 역사 갈림길 또는 민족사적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 민족이 걸어온 발자취는 그 이후 수십 년 또는 백여 년의 역사방향을 거의 고정시킨다는 점에서, 곧 운명을 가른다는 점에서 가장 결정적인 시기이다. 그래서 더더욱 중요할 뿐 아니라 제대로 된 평가가 요구된다.

먼저 해방공간을 보자. 해방은 조선 사람에 의한, 조선 사람을 위한, 조선의, 사회를 새로 만드는 새판짜기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일제 식민지잔재 청산을 이뤄야 한다. 왜냐면 해방이전의 정치·경제·사회 구조는 조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자를 위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이를 조선 사람을 위한 새 구조로 탈바꿈 시켜야 한다. 또한 그 구조 속에 제국주의 일본의 앞잡이 역할을 자행한 부일(附日)협력자들을 청산하고,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정의롭고 유능한 조선 사람으로 완전 교체해야 한다.

곧, 완전히 새로운 집을 짓고 또 그 집주인도 완전히 바꿔야 하는, 사회개벽(開闢)을 일구어야 하는 시기가 바로 해방공간이다. 그에다 미국이 주도하여 조선을 38도선에서 두 동강 낸 지리적 분단을 타파하여 민족통일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여기에다 나라의 주권을 외세에 의해 무력으로 탈취 당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새로운 나라를 철저히 민족자주적인 나라로 건설하여야 한다. 또한 당시의 인류사적 보편 규범이었던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져야 한다. 아울러 도탄(塗炭)이 난 민생의 삶을 구제하는 민생민중경제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바로 이 길이 당시 해방공간의 우리 민족사가 요구하는 당위적 역사행보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추구한 길은 이러한 우리 민족사의 올바른 길을 완전히 배반한 반역(叛逆)의 행로였다.

첫째, 친일청산에서 이승만은 부일협력자에 대한 청산은커녕 이들을 정부 요직에 등용했다. 국내 권력기반이 없던 그는 귀국하자마자 부일협력자 집산체인 한민당과 손잡고 친일파를 옹호하며 자신의 권력을 키워나갔고, 정부 수립 후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과 이에 따라 설치된 ‘반민특위’를 해체시켜 친일파 청산을 좌절시켰다. 더 나아가 이들을 중용하여 친일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고 ‘정착화’하였다. 새판 짜기가 아니라 옛 판을 더욱 친일파 중심으로 공고히 한 것이다.

악명 높은 일제 고등계 형사인 노덕술 석방을 대통령이 직접 강요하고, 반민특위 부위원장인 김상돈 의원 해임 동의안을 내고, 경찰의 6·6 반민특위 습격사건을 일으키는 등등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와해 작전을 펴 결국은 친일파 청산을 무산시켰다. 더 나아가 한승주가 밝힌 것처럼 장경근·한희석·이익흥·임철호·김익중·최인규 등 일제치하 사법부와 경찰 등에 근무한 부일협력자들을 중용하여, 이들이 3·15부정선거를 일선에서 주조(鑄造)하였던 것이다.

이 결과 친일파가 권력행사 기관, 특히 공안기관의 고위직을 압도적으로 장악하였다. 치안국장은 1대 이호에서 7대 윤후경까지, 서울시경찰국장은 2대 김태선에서 7대 변종현까지, 합참의장은 1대 이형근에서 14대 노재현까지, 육군참모총장은 1대 이응준에서 21대 이세호까지, 대법원장은 2대 조용순에서 7대 이영섭까지 모두 친일파들이 잇따라 장악했다.

특히 내무부장관은 1대 윤치영에서 7, 9, 11, 12, 13, 14, 15, 17, 18, 19, 20, 22, 23, 24, 25, 26, 27, 28, 30, 31, 32, 36, 37대 김치열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거의 독식했다(한겨레신문 1995.2.25.). 참고로 북의 경우 일제의 경찰·사법·검찰 등 공안 관련 친일파는 재생의 기회를 절대 허용하지 않고 사회 격리시켰다. 단지 기술직에만 재생의 길을 허용했을 뿐이다.

둘째, 친일 물적 및 제도적 구조청산에서도 이승만은 인적 구조청산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실행하지 않았고 또 지연시켰다.

이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는 미국의 대(對) 조선 군사정부에 있다. 그렇지만 그 이후 국가 주권을 장악한 이승만 또한 이에 못지않게 책임질 일이다.

물적 구조청산은 무엇보다 일본인과 친일파 재산을 몰수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민생도탄을 덜어주고, 치안유지법 등 일제의 잔악한 악법 철폐 등을 서둘러야 했었다. 그러나 친일파재산은 제대로 몰수된 적이 없고, 민생을 위한 토지개혁은 미루다가 해방된 지 5년 뒤에서야 늑장으로 또 비(非) 철저하게 이뤄졌고, 치안유지법 등 악법은 국가보안법 등으로 재활용 및 강화되었다.

대조적으로 북측은 1946년 3월 혁명적인 토지개혁을 완료했고, 8월 10일자 ‘산업, 교통, 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에 관한 법령’으로 기존 일본인 소유는 물론 민족반역자 소유의 모든 산업·상업·문화 시설들을 몰수했고, 모든 일제의 악법을 일소했다. 남측의 늑장부린 토지개혁도 당시 조선민중이 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현재 소작지 중 남측은 37.5%만 분배했고 북측은 99%를 몰수·분배했다. 남측의 경우 토지개혁을 5년 동안 지연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지주의 강매 등으로 거의 20% 넘게 소작지가 토지개혁 이전에 이미 사라졌다. 또 토지개혁 중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 일가처럼 용도변경이나 범법행위로 면제를 받았기 때문에 기존 소작지 60% 이상이 토지개혁의 대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 결과 전체 인민의 65% 가까이를 차지했던 농민, 곧 소작농민과 자영농의 삶이 향상될 조건을 제대로 갖출 수가 없었다.

셋째, 민족통일정부수립에서도 마찬가지다.

해방과 동시에 이뤄진 38선을 경계로 한 지리적 분단이 남북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정치적 분단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으로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했다. 그렇지만 유아독존적인 이승만은 분단을 고착화하는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독립청원기부터 무장투쟁을 배격했고, 중국 주재 임시정부의 김구·김원봉을 ‘테러노선’이라고 비난했고, 해방공간 압도적 우세를 점유했던 좌익을 ‘친일분자처럼 대하겠다’면서 좌·우 연합정권 가능성을 봉쇄했다. 더 나아가 1946년 6월 이른바 정읍발언 등으로 분단 실행의 앞잡이였고 주역이었다.

여운형·김규식 주도의 좌우합작이 탄력을 받자 그는 미국을 방문하여 좌우합작 와해와 단독정부 조기수립을 위한 청원외교를 벌였다. 1948년 초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망설이자 친일파 무리인 모윤숙, 박순천, 김활란 등을 동원한 미인계로 이들을 포섭하는 파렴치(破廉恥)를 자행했다. 모든 좌익과 김구 중심의 우익, 김규식 중심의 중도세력까지 보이콧한 5·10단독선거를 축하하는 축하국민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이처럼 민족분단을 통한 권력 장악에 혈안이었고, 그의 이러한 반(反)민족성과 반(反)통일성은 1공화국까지 지속되었다. 무력 북진통일론을 정착시켰고, 진보당사건으로 조봉암을 사형시켜 자주적 평화통일논의 자체를 원천봉쇄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넷째, 민족자주 구현도 마찬가지다.

해방은 외세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 이러한 비극의 역사적 전철을 되밟지 않기 위해서는, 민족의 자주를 절대규범으로 올려놓고, 그 구현을 위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해방된 뒤에도 더욱더 외세 의존적이었고, 권력 장악 후에도 민족자주 국가의 구현을 배반했다.

그의 외세의존성은 일관된 ‘독선적 외교제일주의’에서 두드러진다. 우리의 문제를 좌우합작이나 남북협상을 중심에 두고 이를 근거로 삼아 외세활용을 꾀하는 것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였다. 상해임시정부 시절 그는 조선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둘 것을 감히 독단적으로 제안하였고, 1946년 12월 미국을 방문해 “독립에 대한 유일한 가능 방도는 미국 국민의 호의에 호소하는 데 있다”면서 철저히 외세인 미국의 예속하에 분단정부수립을 꾀했다.

그의 반(反) 민족자주의 극치는 1954년 11월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그 부속문서인 ‘한미합의의사록’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는 군사주권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대미예속을 구조화 한 것이다.

이는 정전협정 4조60항(평화협정과 외국군 문제 해결 조항)을 위배했을 뿐 아니라 미국 자의에 의해 언제든지 무력행위나 전쟁이 가능하고(2조), 한국의 사전 동의 없이 미국 헌법 절차만 지키면 선전포고나 무력행위 가능하고(3조), 한국 영토 어디든 한국 사전 동의·협의 없이 미국 임의로 군사기지화, 군사배치, 이동 등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해방 80년이 되려는 지금까지도 글자 하나 변경되지 않고 있다.

이의 부속문서인 한미합의의사록 또한 포괄적으로 국가주권을 제약하고 미국에 예속되는 합의다. “국토통일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 미국과 협조한다”로 민족통일까지도 외세인 미국과 사전 협의하도록 했다. “국제연합군사령부가 대한민국의 방위를 위한 책임을 부담하는 동안 대한민국 국군을 국제연합군사령부의 작전지휘권하에 둔다”로 작전지휘권을 넘겨 군사주권도 제대로 없는 나라로 만들었다. “투자기업의 사유제도를 계속 장려한다”로 자본주의를 강요당했다. ”부록 B에 규정된 바의 국군병력기준과 원칙을 수락한다”로 국군의 병력 수까지 통제당했다. 이는 그토록 우리가 갈구했던 민족자주와는 180도 어긋난 길이다.

다섯째, 민주주의 기틀 다지기에서 이승만은 반(反)민주의 극치를 달렸다.

1948년 12월 1일 반(反)민주 대표 악법인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이어 1949년 한 해 동안에 11만 8620명이 투옥되었다. 또한 시민사회를 국가의 들러리조직으로 묶어 관제 대중동원이라는 전체주의적 통치유형으로 나아갔다(이호재, 1988). 이 관제 대중조직은 그의 사조직이었던 독립촉성회를 확대한 국민회(관제 데모와 관제 국민대회 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 여러 청년단체를 통합한 2백만의 대한청년단, 중고등에서 대학까지 모든 학생을 묶은 학도호국단이었다.

이러한 반(反)민주 파시즘적 통치는 미국의 ECA 경제고문이었던 ‘번즈’ 박사가 "현재의 경찰국가적 경향은 5월 30일로 예정된 선거가 경찰과 청년단체에 의해 지배될 것이기 때문에 위원단으로 하여금 선거를 감시할 것을 장려하는 게 바람직스럽다”고 제안할 정도였다.

번즈가 예측한 대로 1950년 5·30선거에서 불법·탄압·관권이 판을 쳤다. 옥중 당선된 근로인민당 부당수였던 장건상의 증언은 이를 입증한다. “경찰이 간섭하였고 평양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모략도 있었다. ‘장건상은 공산당이니 국회의원으로 뽑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였다....나의 선거운동을 하던 30여 명의 동지와 친지들이 잡혀갔음을 알았다. ... 선거 후 전국에서 제2의 득표수로 당선된 내가 감옥에 수감된 것을 안 미국 영사와 유엔측 대표는 이 대통령을 찾아가 내가 수감된 죄목과 정확한 증거를 요구했다.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나는 원내에서 발언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불법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집권 2년 뒤 실시된 1950년 5·30선거에서 이승만은 엄정한 역사의 심판을 받아 권력상실은 시간문제였다. 전체의석 210석 가운데 집권여당인 대한국민당은 24석, 국민회 등 친여세력을 합쳐도 겨우 57석이었고, 무소속이 무려 126석으로 60%를 차지했다.

또한 서울의 성북구에서는 상해임정의 조소앙과 미군정의 대명사였던 조병옥이 대결해, 조소앙이 전국 최다득표를 했고, 전국 제2의 득표는 여운형 직계인 위의 장건상이 부산에서 차지했다. 이는 한국전쟁 이전인 1950년 당시의 유권자가 보수보다는 진보세력을 전폭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이렇게 권력상실이 가시화하자 이승만은 1952년 전쟁 중에 친일파 군인 원용덕을 동원해 계엄령을 선포하고는 군과 경찰로 국회를 위협해 불법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과시킨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에 <런던 타임즈>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개탄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1954년 11월 사사(四死) 오입(五入)이라는 반올림 셈법을 악용한 억지논리로 초대 대통령 중임 제한규정을 철폐시켜 종신 독재집권의 길을 열었다. 그렇지만 유례없는 3·15불법·부정선거로 드디어 4월혁명에 의해 축출되었다.

여섯째, 이승만은 수없이 많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러 인간의 절대적 인권인 생명권을 앗아간 반(反)인권의 대명사였다.

인권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제반 조건을 부여받을 권리이다. 여기에는 생존권, 평등권, 자유권 등 여러 가지가 포함된다. 그렇지만 남녀노소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값진 것은 생명이다. 그래서 지구촌 어디든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은 가장 엄격히 다뤄지는 범죄이고 생명지상주의와 같이 절대적 인권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절대적 인권인 생명권을 무수히 많이 짓밟은 자가 바로 그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집권 3개월째인 1948년 11월부터 제주에서, 해안선 5km 이상 떨어진 지역을 무조건 적성(敵性)지역으로 지정하여 무자비한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미군정에서부터 이승만정권에 이르기까지 무려 3만여의 제주도민이 이 4·3항쟁 과정에서 죽임을 당했다. 대부분은 무고한 민간인이었다.

당시 1948년 5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실시된 5·10선거에서, 제주도의 2개 선거구가 무효화되어 선거자체의 정당성이 문제가 되었다. 제주 4·3항쟁 때문이었다. 여기에다 대한민국 수립 2개월째인 1948년10월19일 여순항쟁이 발발하여, 이승만정권의 생존가능성이 국제적으로 의문시되었다.

유엔의 5·10선거 승인에 즈음하여 미(未)선거 상태인 제주도의 선거구가 걸림돌이 되었고, 김구나 김규식 등의 지도하에 통일운동이 활성화되는 등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 상실과 생존위험성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에 초토화 작전을 통하여 긴급히 4·3항쟁을 평정하고 재선거를 실시하여 정권기반을 강화하고 분단을 고착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1948년 10월19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 2개월 만에 여순항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이승만정권은 22일 법제화도 되지 않았던 계엄령을 선포하고, 한 달여 동안 육·해·공 합동 진압작전과 2개월간의 관련자 색출작업을 진행했다. 이 색출과정에서 보복적인 테러, 학살, 약탈, 방화가 대대적으로 행해졌다.

전체 주민을 학교 등 공공장소에 집결시켜 놓고 주로 “머리가 짧은 자, 군용팬티를 입은 자, 손바닥에 총을 든 흔적이 있는 자 등” 외모에 의하여 부역자를 골라내었다. 일부는 즉석에서 “곤봉, 개머리판, 체인 등으로 무참하게 타살되거나 또는 총살을 면치 못하였으며” “백두산 호랑이로 소문난 제5연대 김종완 대대장이 교정의 버드나무 밑에서 일본도를 휘둘러 즉결 참수처분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식으로 최소한 1만 이상의 민간인이 무고하게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7월 초부터 감행한 보도연맹원 약 20만-30만의 학살도 있었다. 이 보도연맹원에 대한 초기의 집단적이고 대대적인 학살은 그 이후 연쇄적 학살의 고리를 형성했다. 곧,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학살된 유가족이 그 이후 진주한 북한인민군에 힘입어 남한의 공무원, 경찰, 지주계급 등에 대한 보복살인을 자행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바로 수복 후 국군과 우익 측 보복의 악순환을 가져와 더욱 더 동족상잔(同族相殘)을 부추겼다.

이러한 보도연맹회원 외에도 한국전쟁 초기에 형무소에 있던 좌익세력 등이 수없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데일리 워커(Daily Worker)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 기자가 쓴 책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에서 다룬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저질러진 대전 형무소 수감 좌익세력 학살사건이 대표적이다. 1950년 6월 28일~7월 17일 3차에 걸쳐 7천여 명이 집단 사살된 사건으로 지금도 유해발굴이 진행되고 위령비 건립 문제가 논의 중이다.

이러한 민간인학살은 고양, 함평, 영광, 문경, 대구, 경산, 부산, 함양, 산청, 거창, 충무, 거제 등등 전국적, 조직적, 체계적 현상이었다. 4월혁명 이후 거의 남한 전역에 걸쳐 구성된 유족회, 국회진상조사단의 조사 등으로 그 역사적 진실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고 정희상·이태섭 등은 약 1백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5·16쿠데타 이후 이들 유족회는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침묵을 강요당해왔고 역사적 진실 또한 은폐되어왔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하에서 설립된 진실화해위원회 발족을 계기로 체계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으나 지금 윤석열 정부에서는 극우인 김광동의 위원장 부임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지금까지 선택적으로 살펴본 데서도 확인되지만, 이승만은 우리의 민족사를 반(反)민족, 반(反)민주, 반(反)통일, 반(反)민중, 반(反)자주, 친일친미의 친(親)외세, 반(反)인권으로 이끌어 왔던 반(反)역사의 주인공이다. 이러한 이승만으로부터 비롯된 민족사의 훼손을 치유하기는커녕 윤석열 정권의 무도함은 이미 역사적으로 사장(死藏)된 이승만을 다시 끄집어내어 미화운동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응당 우리 모두가 나서서 이승만이 우리 민족사에 남겨놓은 오욕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내고, 그 뼈아픈 상처를 치유하여, 우리 민족사를 청아하게 일구는 역사바로세우기와 겨레바로세우기에 나서야 할 때이다.

 

 

 

강정구 전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mindle@mindlenews.com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s://www.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