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루비콘을 건넜는가
부끄러운 얘기지만 ‘대만 사태’가 한국인의 일상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대 문제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불과 3년 전인 2021년 이맘때였다.
그해 4월16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공동 문서에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을 강조한다”는 문구를 집어넣은 게 시작이었다.
이후 일본 언론들은 미·일 정상이 이런 언급을 한 것은 52년 만에 처음이라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자료를 살펴보니, 1972년 5월 오키나와 반환을 앞둔 리처드 닉슨과 사토 에이사쿠가 1969년 11월 문서에 비슷한 내용을 넣은 적이 있었다.
미·일 정상이 반세기 전에 굳이 대만(한반도도 언급했다)을 언급한 것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오키나와가 반환되면 미군의 대응 태세가 흔들릴 수 있다고 박정희와 장제스가 우려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얼마나 걱정이 됐는지 그해 6월1일치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제주도를 미군기지로 제공할 뜻이 있다’는 말까지 했다.
냉전이 끝난 뒤 한동안 잊고 살아왔지만, 대륙과 해양 사이에 자리한 대만·오키나와·한반도는 하나의 큰 ‘공동 운명체’라 할 수 있다.
이런 깨달음은 이틀 뒤인 18일치 아사히신문 7면에 나온 다케우치 유키오 전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의 짧은 인터뷰를 읽고 일종의 공포로 변했다.
“자유민주주의적 국제질서에 대한 중국의 도전이 국제사회 전체의 과제이다. 동아시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같은 동맹의 틀이 없다. 이번 회담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미-일 동맹을 통해 나토 같은) 디딤판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있다. 스가 총리에게 (그만한) 각오가 있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중국에 대한 이번 의사 표명은 루비콘강을 건넌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보복도 예상할 수 있다. 확고한 각오와 강고한 대응이 필요하다.”
놀란 마음에 미-일의 공동문서를 다시 읽으니 “일본은 동맹 및 지역의 안전보장을 한층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방위력을 강화하기로 결의했다”는 묘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후 아베 신조, 아소 다로 같은 일본의 유력 정치인들이 “대만 유사사태는 곧 일본 유사사태”라는 말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미-일 동맹이 이렇게 변한다면, 그 여파는 곧바로 한국에도 미치게 될 터였다.
일본 정부는 이후 2022년 12월 안보 관련 3개 문서를 개정하면서, 방위예산(국방비)을 2027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의 2% 수준(5년 동안 2배)으로 올리기로 했다.
미·일은 다케우치 전 차관이 예언한 대로, 동아시아에 나토 같은 동맹의 틀을 만들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협력하는 중이다. 지난해 8월 캠프 데이비드에선 한국을 끌어들여 한·미·일 3각 동맹으로 나아가는 첫발을 내디뎠고, 지난 11일엔 워싱턴에서 미·일·필리핀 정상회의를 열어, 남중국해에서 진행 중이던 중국의 공격적 행동을 한목소리로 비난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미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미-일의 글로벌 파트너십’을 외치던 지난 11~12일, 한·미·일 3개국 해군은 대만이 속한 ‘동중국해’에서 연합 훈련을 벌였다. 미국 인도·태평양 사령부와 일본 해상자위대가 낸 보도 자료를 보면, 미 해군에선 항모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세 척의 구축함, 일본 해상자위대에선 호위함 아리아케, 한국 해군에선 이지스 구축함 서애류성룡 등이 참가해 ‘대잠수함 작전’ 등을 진행했다.
앞선 6~7일엔 남중국해에서 미국·일본·오스트레일리아(호주)·필리핀 등 네 나라가 함께 훈련했다. 대만 사태가 발생하면, 한·미·일 3각 동맹, 남중국해 사태엔 미·일·호·필 4개국의 연대 틀을 활용해 대처하려는 미국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엔 인·태 지역에서 미국을 떠받치는 핵심 동맹으로 거듭난 일본이 있다. 미-일 동맹은 더 이상 구호가 아닌 실제 군사적으로 ‘글로벌 동맹’으로 위상과 역할이 커지게 됐다. 우리에게 여러 부담스러운 요구를 해올 것이다.
돌이켜보면, 일본은 각오하고 결심한 뒤 루비콘을 건넜다.
한국은 어떤가.
이 중차대한 문제 앞에서 어느 때보다 ‘균형 잡기’와 ‘여론 수렴’이 중요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자기가 뭘 했는지도 모른 채 이미 한쪽으로 휩쓸려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물러나면 나라 꼴이 우스워지고, 나아가면 가랑이가 찢어질 것이다.
진퇴양난이다. 나라가 위태롭다.
길윤형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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