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김건희, 측근) 관련

그들은 왜 ‘전공의 처단’을 얘기했나

道雨 2024. 12. 9. 10:17

그들은 왜 ‘전공의 처단’을 얘기했나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 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는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배경이 되었던 1980년 광주에서 들려왔던 호소를, 2024년 서울에서 다시 듣게 되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실패한 쿠데타처럼 조롱하기 쉬운 것은 없다. 하지만 이 어설픈 친위쿠데타가 성공했다 생각해보라.

인터넷에 올린 글은 강제 차단되고, 계엄법 9조에 따라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이 이루어지고, 계엄사령부의 통제하에 들어간 검찰, 법원은 수많은 선량한 시민들에게 ‘반국가사범’ ‘간첩’ 등의 허울을 씌우는 불의한 판결을 쏟아냈을 것이다.

 

이런 불의에 가만히 있을 우리 국민이 아니다. 곳곳의 저항은 또 한번 부마(부산, 마산)와 광주항쟁으로 이어지고, 그날처럼 대검에 찔리고 개머리판에 찍힌 수많은 죽음을 낳았을 것이다. 설마 하겠지만 ‘그날’도 그 설마 했던 일이 일어났다. 이번 사태를 한갓 해프닝으로 끝낼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 국회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내용을 포함함으로써 스스로 불법적 내란임을 밝힌 포고령 1호에는, 또 한가지 이상한 조항이 등장한다.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 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계엄 포고령에 ‘전공의’가 등장하고, 게다가 ‘처단’이라니. 실로 생뚱맞다 아니할 수 없다.

 

 

포고령에 왜 전공의 ‘처단’이 들어갔을까?

계엄을 선포한 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 포고령의 내막을 어찌 알겠는가?

이때 동원할 수 있는 것이 합리적 재구성이다.

 

계엄을 선포한다는 것은 선포하는 정치인도 목숨을 거는 일이기에, 그는 열심히 국민의 지지를 받을 명분을 찾았을 것이다. “내가 잘한 일이 무엇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 아하! 하고 무릎을 친다.

“70% 전후의 높은 지지를 얻었던 정책이 있지!” 그것이 바로 ‘의대 정원 확대’다.

‘처단’이란 말은, 전공의들이 ‘감히’ 자기 말을 거스르고, 게다가 의료대란이 장기화되면서 국민의 불만이 자기를 향하는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으리라.

 

 

하지만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무엇보다 포고령 425자 중에 무려 64자를 전공의 문제에 할애한 이 ‘생뚱맞음’은, 이번 계엄의 명분이 얼마나 궁색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그는 국민을 향한 ‘처단’이라는 말이 얼마나 낡고 후진 단어인지, ‘계엄’이란 단어가 우리 국민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상기시키는 단어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왜 이런 부적절한 단어를 사용했을까?

‘계엄’ ‘처단’ 등의 퇴행적 단어들은 폐쇄적 극우 사이트에서는 너무나 흔히 사용되는 단어다. 심지어 이 순간조차 그렇다. 그가 여론을 확인하는 시간 대부분을 이들 극우 사이트를 보는 데 썼다는 측근의 증언대로라면, 이는 폐쇄적 논의장에 함몰되면 얼마나 비현실적인 생각에 빠지게 되는지, 그것이 얼마나 큰 비극을 야기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의료계는 전공의 ‘처단’ 운운한 정권에 분노하고 있다.

지난 4일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 등은 “국민을 처단하겠다는 언사를 서슴지 않는 것은, 윤석열 정권이 반국가세력임을 자인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당장 자진사퇴하라”는 성명을 냈다. 대한의사협회 회장 보궐선거전에 나온 한 후보도 “처단당해야 할 것은 이런 말을 내뱉는 자”라 목소리를 높였다.

이로써 ‘의료대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아 의료 분야 혼란이 더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무엇보다 환자들의 고통이 걱정이다.

 

독자들이 이 칼럼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이 불의한 쿠데타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외신들은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회복력을 동시에 확인하였다”고 했다.

이것은 쿠데타 소식을 듣고 국회로 달려나가 계엄군을 맨몸으로 막아섰던 시민들, 책상과 의자를 모아 계엄군의 진입을 막았던 보좌관들, 담을 넘은 국회의원들, 신문 발행이 가능할지 알 수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도 밤새워 호외를 찍어낸 신문사 직원들, 군인 아들에게 너는 절대로 시민들에게 총구를 돌리지 말라 문자를 보낸 아버지 어머니들, 그리고 ‘느릿느릿 걸은’ 젊은 군인들 덕이다.

 

지난 토요일, 단죄의 첫 칼을 피했지만, ‘그들’은 모른다.

시인 김수영의 노래처럼, 이미 이 땅엔 ‘나도 감히 상상을 못 하는 거대한 뿌리’가 깊이 뿌리내렸음을, 오랜 세월, 민초들의 피눈물로 키워낸 민주주의의 ‘거대한 뿌리’가.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