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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엽기인물 한국사]27-1.나는 강남에 간 적이 없다!

道雨 2008. 3. 22. 14:41
[엽기인물 한국사]24.나는 강남에 간 적이 없다!①
입력: 2007년 12월 27일 22:14:39

초등학교 때 위인전 좀 읽었다는 사람치고, 붓두껍 속에 목화씨를 숨겨 들어와 이 땅에 목화를 퍼뜨렸다는 에피소드를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대충의 내용을 살펴보면, 고려의 사신이었던 문익점(文益漸)이 당시 원나라로 갔으나, 황제의 노여움을 사 강남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귀양지에서 3년 동안 생활하던 문익점은 이곳에서 목면의 실용성을 확인하게 되고, 귀국길에 몰래 목화씨를 가져오려고 한다. 그러나 원나라에서는 목화의 해외반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던 상황. 만약 목화씨 밀반출이 발각되는 날이면 문익점은 고려 땅을 다시는 밟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문익점은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목화씨를 들고 가야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목화씨를 가져가기 위해 갖은 묘안을 다 짜내던 문익점은 붓두껍 속에 이를 감춰 고려로 들여오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대략 문익점의 목화씨 전래에 관한 이야기의 전말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온 건 사실인데, 그 나머지는 전부 뻥이다.”

그렇다. 문익점이라는 이름이 실려 있는 위인전마다 나와 있는 이 이야기…. 뻥이다. 믿겨지지 않는다고? 사실이다.

“문익점이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을 갔다면서?”

“귀양 간 적 없다. 아니, 황제랑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럼 강남으로 간 적도 없다는 소리야?”

“강남은 무슨…. 북쪽지방에서 놀다가 목화씨 들고 왔어. 그리고 문익점이 원나라로 갔던 때에는 강남 쪽은 이미 반원세력인 홍건적하고 한족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원나라가 통치할 수도 없었는데 어떻게 강남으로 유배를 가냐?”

“그래도 최초로 목화씨를 고려로 전파했잖아?”

“문익점 이전에 고려 사람들 목화가 있다는 거 다 알고 있었어.”

“어쨌든 목화가 들어와서 백성들의 삶의 질은 높아졌잖아?”

“삶의 질은 높아졌지. 근데, 여자들은 죽어나게 됐지.”

우리가 위인전에서 본 문익점의 이야기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도대체 어떤 말이 정답인 것일까? 일단 우리가 위인전에서 본 이야기가 어떻게 전승되어 왔는지부터 잠깐 살펴보자.

“에또, 그래설라무네…. 우리가 이렇게 잘 입고 살 수 있는 건 다 문익점 덕분임다. 그 사람이 강남으로 가서 목화 종자 몇 개를 얻어 와 그걸로 목면을 짜 진상했지 않슴까? 걔 아니었으면…. 우리 정말 뭘 입고 살아야 할지 몰랐을 겁니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한 문익점의 아들이 빌빌거리며 사는데, 이거 참 거시기 하지 않습니까? 걔 아들 이름이 문중용이라고 하는데…. 벼슬 한자리 줍시다. 예?”

태종 1년(1401년) 3월 권근이 태종에게 상소를 올리며 문익점의 강남행을 언급하게 된다(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권근과 문익점은 같은 ‘이색라인’의 학연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고려사 열전 ‘문익점전’이나 태조실록 ‘졸거기사’를 아무리 뒤져봐도 문익점이 강남 가서 목화씨를 얻어왔다는 내용은 없다. 그냥 목화씨를 가져왔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이,

“야, 원래 목화하면 강남(江南)이잖아. 그냥 뭐 글 쓰다보면, 과장도 하게 되고, 상상도 하게 되는 거잖아. 그걸 트집 잡고 그러냐?”

이때 당시의 분위기란 것이 ‘목화의 본고장=강남(江南)’이라는 상식으로 자리 잡혔던 시기였다. 아마 권근도 이런 상식 때문에 목화를 가져왔다면 당연히 강남에서 가져왔을 것이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작은 ‘상상’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살이 더해지고, 내용이 추가 되었다는 것이다.

권근에 의해 촉발된 문익점의 강남행은 15세기 말 한참 야담과 패설이 유행하던 세조조가 되면, 불세출의 작가(?) 남효온에 의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게 된다.

“(상략) 원에 사신으로 들어가 나라의 어려움을 탄하다가 드디어 남방으로 유배를 가 삼년을 보냈다.”

남효온이 지은 목면화기(木綿花記)에 ‘강남유배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안드로메다를 향해 달려가는 느낌이다. 그래도 뭐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여기까지는 이야기를 만들다 보니 살이 붙는 정도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문익점의 후손인 문치창이 만든 사실본기(事實本記)의 ‘뻥’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상략) 황제가 불러 달래며 말하되, “너의 왕은 황음하여 무도하니 폐하려는데, 너는 어찌 말이 많은가?” 공이 대답하여 가로되, “미친 사람의 말이라도 성인은 그것을 가린다고 했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신을 용납하소서(하략)”

- 사실본기(事實本記) 中 발췌



이제는 원나라 황제랑 맞짱을 뜨는 장면까지 등장하게 된다. 이야기가 안드로메다를 넘어 마젤란 성운으로까지 진출한 느낌이다. 거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고려의 일개 서장관(書狀官 : 기록관)이 황제랑 만나는 것도 이해가 안가지만, 일개 서장관을 붙잡고 왕을 교체하자고 말하는 황제라니…. 과연 문익점에 얽혀 있는 이야기는 어디까지 뻗어나가려는 것일까? 이야기는 다음회로 이어진다.

 

[엽기인물 한국사]24.나는 강남에 간 적이 없다!②
입력: 2007년 12월 28일 22:15:23

권근의 상소, 남효온의 목면화기(木綿花記)… 그리고 문익점의 후손인 문치창이 만든 사실본기(事實本記)에 의해 문익점은 신화가 되었다.

“나라를 생각하는 그 마음… 우리 모두 문익점 선생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해.”

“그럼, 그분 아니었으면 우리 벌거벗고 다녔어야 해.”

“야… 그건 좀 아니다. 목화 들어오기 전에는 그럼 우린 벗고 다닌 거냐?”

“패션이 그랬다는 거지!”

목면화기와 사실본기의 이야기가 민간에 퍼지면서, 이야기는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영화 시나리오로 치면, 목화씨를 고려로 가져가겠다고 결심하는 부분에서 위기가 시작되고 붓두껍에 숨겨 고려로 들여오는 대목이 클라이맥스 부분이 되는 것인데, 일반 백성들은 이야기를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네들이 잘 모르나 본데, ‘문익점 WARS’는 ‘새로운 희망-목화씨’ 여기서 끝나는 게 아냐.”

“뭐야? 거기에 또 에피소드가 붙는 거야?”

“후후 네들이 아직 에피소드 2 ‘퇴헌(退軒 : 정천익의 호)의 역습’을 못 봤나 본데…”

“퇴헌의 역습?”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와서는 그러잖아. ‘목화씨가 함께 하기를’이라고…”

“목화씨가 포스냐? 함께하게?”

“일단 들어봐 자식아. 근데, 이 목화씨란 게 원래 따뜻한 지방에서 나는 작물이잖아.”

“그렇지.”

“지금 지구온난화다 어쩐다 해서 날이 따뜻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조선 땅이 좀 춥잖아? 해서 문익점이 장인이랑 씨앗을 나눠서 농사를 짓지. 근데, 문익점이 심은 목화씨는 다 말라 죽어버리고, 장인인 정천익 밭에 심은 목화만 몇 개 살아남지.”

“호… 그랬단 말야?”

“여기까지가 에피소드 2 ‘퇴헌의 역습’이지.”

“에피소드 3도 있냐?”

“있지. 에피소드 3가 그 유명한 ‘물레의 복수’야.”

“물레의 복수?”

“이게 목화씨를 발아시켜 키우는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이걸 어떻게 써먹느냐는 문제가 생긴 거야. 붓두껍에 목화씨는 가져왔지만 이걸 실로 뽑고, 솜을 만들고, 베를 짜는 법을 배워오지 못한 거야. 짝퉁의 한계지.”

“그래서?”

“뭐 방법 있나? 그때까지 목화는 관상용으로 재배하는 정도였지. 그러던 어느 날! 중국 땡중이 조선 땅에 들어오게 된 거야.”

“난데없이 웬 중국 중?”

“무술수련을 위해 조선팔도로 유람을 온 거야.”

“소림사 출신이야?”

“아마도 소림사 출신일 거야. 여하튼, 이 중국 중이 조선 땅을 거닐다 보니 목화꽃이 활짝 피어있는 정천익의 밭을 보고는 감탄을 하지, 목화가 여기까지 피었구나 하면서 말야. 이 말을 들은 정천익이 당장 이 중을 잡아왔지. 그리고 물었어. ‘네가 이게 목환 줄 어떻게 아냐?’ 중이 자기도 중국 놈인데, 목화를 모르겠냐고…. 해서 정천익이 물었지. 네가 포스를 아냐고…. 아니, 베 짜는 법을 아냐고, 안다고 그랬지. 문제는 이 중국 놈이 나름 애국자였던 거야. 기술유출을 하면, 우리 중국 어떻게 하냐고? 목화 재배와 베 짜는 기술은 중국의 원천기술이라고 쌩쇼를 하는데…. 이게 또 조선 사람이 영업 하나는 끝내주잖아? 며칠동안 잡아놓고, 술 먹여가며, 밥 먹여가며 살살 꼬드기니까 그제야 이 방법을 알려주지, 이 기술을 가지고 익점이랑 천익이가 발전 시켜 물레를 만들게 됐다 이거지.”

“호 근데, 이름을 왜 물레라 지은 거야?”

“자식, 문씨 집안에서 만들었으니까 물레지.”

그랬다. 이야기는 민간에 퍼지면서, 하나의 시리즈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권근이 ‘강남에 가 목화씨를 가져왔다’고 한 말이 조선 후기가 되면, 장인 정천익까지 등장하며 완벽한 시리즈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처음 이야기…. 그러니까, 애국애족을 위해 몰래 목화씨를 들여오던 이야기가 어느새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 물레를 개발해내는 인간승리의 이야기로 변한 것이다.

이야기로서의 ‘문익점 스토리’는 대중의 흥미를 끌 수밖에 없다. 하긴 수 백 년간 전승되면서 모자란 부분 채워 넣고, 튀어나온 부분 망치로 두들겼으니 흥미 있을 수밖에(얼마나 완벽했으면, 위인전에 그대로 실려 사실로 그려졌을까?). 그러나 이 이야기가 허구이며, 뻥이라는 건 전회에 이미 설명하지 않았던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문익점의 리얼스토리이다!

“씨앗 가져온 건 똑같지 않아?”

문익점이 씨앗을 가져 온 건 맞다. 툭 까놓고 말해, 문익점은 씨앗 가져온 것 빼고는 그 어떠한 존재감도 남기지 못한 인물이다. 아니, 존재감이 있긴 있었지만 목화씨가 너무 커 그 존재감이 가려졌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과연 목화씨에 가려진 문익점의 참모습은 어떠했을까? 이야기는 다음회로 이어진다.

 

[엽기인물 한국사]24.나는 강남에 간 적이 없다!③
입력: 2007년 12월 31일 20:19:38

문익점이 원나라 사신으로 떠났다가 얼떨결에 목화씨를 구해 온 이야기의 이면에는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얽혀있었다. 아니, 정치적 이야기가 본론이고 문익점의 목화씨가 부록이라는 것이 맞는 표현일 거 같다. 일단은 문익점이 원나라로 떠나게 된 이유에 집중해 보자.

“저 빌어먹을 빨갱이 색희들 뭐 주워 먹을게 있다고 계속 넘어오는 거야?”

“어쩌겠습니까? 지들도 살기 힘들어 넘어왔다는데….”

“그래서? 이 참에 이민자 대우라도 해주까 엉?”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고려 제 31대 공민왕(恭愍王)은 죽을 맛이었다. 어렸을 적 원나라로 끌려가 갖은 고생 다하다 고려로 넘어온 공민왕. 그는 고려로 넘어오자마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부원배들을 척결하기 시작한다.

“이게 고려야, 몽고야? 변발한 색희들 더 조져 버려. 앞으로 고려는 자주독립 국가임을 선포한다!”

병신정변(丙申政變 : 1356년)을 통해, 기철을 비롯한 부원세력을 몰아 낸 공민왕은 그 여세를 몰아 파사부(婆娑府: 현 단동)를 공략했고,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수복하게 된다. 한참 끗발 올리며 기세를 타던 공민왕! 거칠 것이 없었다.

“기황후? 오라고 그래! 아는 놈이 더 무섭다고 말야. 같은 고려 사람끼리 이럴 수 있어? 지들 남매끼리 고려를 말아 드시려고 그래요.”

공민왕의 개혁 드라이브에는 브레이크가 없어보였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공민왕의 개혁 드라이브에 태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말이다.

“전하! 홍건적이… 홍건적이!”

“홍건적이 왜? 저번에 때려 부셨잖아?”

“또 쳐들어 왔습니다.”

“이것들이 지금 배구 해? 시간차 공격하게?”

1차(1359~1360)와 2차(1361~1362)로 나눠 시간차 공격을 해 온 홍건적. 공민왕은 황도 개경을 버릴 정도로 다급 했었다. 상황이 이리 되니 공민왕도 어쩔 수 없었다.

“휴… 개혁도 좋고, 부원배 일소도 좋지만… 일단 살고 봐야 하는 거잖아.”

“전하, 그럼 원나라랑 다시 붙는 겁니까?”

“이 자식은 대신씩이나 되는 놈이 단어 선택을 그따위 밖에 못해? 붙는 게 뭐냐? 좋은 말 많잖아! 전략적 제휴나 뭐 관계개선... 기타 등등…”

그랬다. 홍건적의 침입 앞에 공민왕은 타협을 택하게 된다. 홍건적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해야 한다는 논리였기에 원나라 조정과도 충분히 이야기가 가능 할 것이라는 판단했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반응은 싸늘했다.

“어쭈, 개길 때는 언제고 아쉬우니까 엉기냐?”

“에이, 누님… 왜 그러세요? 다 같은 고려 핏줄 아닙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홍건적 저놈들 때려잡고 예전처럼 잘 지내면 누님도 좋고, 저도 좋고…”

“까는 소리 하고 있네.”

이 당시 원나라의 실권은 기황후에게 있었다. 기황후가 누구이던가? 원나라 태자인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의 생모가 아닌가? 이미 존재 자체가 희미해져 있는 원나라 최후의 황제인 순제(順帝)는 살짝 맛이 간 상태였기에 정치는 태자를 앞세운 기황후의 것이었다. 문제는 이 기황후가 공민왕을 상당히 싫어했다는 것이다.

“공민왕 이 자식… 울 오빠를 쫓아 내? 지가 언제부터 왕 했다고 설치는 거야? 여기 있을 때는 쪽도 못 쓰던 놈이 왕 되더니 목 디스크에 걸린 것처럼 뻣뻣하게 굴어?”

“마마, 원래 그 놈이 네가지가 없는 놈이 없슴다. 이 참에 확 갈아 치우시죠?”

“갈아 치워?”

“애가 싹수가 보이면, 잘 타이르던가, 안되면 때리던가 해서 고치면 되겠지만 애가 좀 그렇잖아요. AS도 안될 거 같은데, 확 교체하시죠?”

“대타 있어?”

“어유, 대타야 널리고 널렸죠. 입맛대로 골라잡으십쇼. 31가지 골라 앉히는 재미가 있는 게 고려 왕 아니겠습니까?”

고려에서 도망 쳐 온 최유(崔濡)와 덕흥군(德興君 : 26대 충선왕의 셋째 아들)이 기황후 옆에 착 달라붙어 공민왕의 교체를 꼬드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케이 거기까지! AS 안되는 왕처럼 골치 아픈 것도 없지. 이참에 확 갈아치우자구! 어이 덕흥군! 너 왕 해라.”

“마마!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전격적으로 단행된 공민왕의 폐위결정! 이 소식을 접한 공민왕은 황급히 사신단을 꾸려 원나라로 보내게 된다.

“야 가서, 기황후 좀 달래라. 성질 더러운 애인지는 알았지만... 에휴 어쩌겠냐? 네들이 나 대신 가서 분위기 좀 맞춰줘라. 알았지?”

기황후를 달래주기 위해 공민왕은 사절단을 계속 보내기 시작한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1364년 3월과 4월에는 연속해서 두 팀의 사절단을 보내게 된다. 문익점도 이런 급박한 정치상황 속에서 서장관(書狀官 : 기록관)으로 원나라로 향하게 되었으니... 과연 문익점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초특급 대하 울트라 히스토리 ‘나는 강남에 간 적이 없다!’는 다음 회로 이어지는데… 커밍 쑨!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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