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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엽기인물 한국사]27-2.나는 강남에 간 적이 없다!

道雨 2008. 3. 22. 14:42
[엽기인물 한국사]24.나는 강남에 간 적이 없다!④
입력: 2008년 01월 01일 21:47:16

31가지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고려왕 자리에 덕흥군(德興君)을 앉히기로 결심한 기황후! 그리고 이 결정을 번복하기 위해 시간차로 사신단을 파견하는 공민왕! 과연 기황후는 덕흥군을 왕위에 올릴 수 있을까? 그리고 공민왕은 자신의 왕위를 지킬 수 있을까?

“굳이 피 볼일 있슴까? 그냥 간단하게 가죠. 김용 아시죠?”

“김용? 아 그 얼빵하게 생긴 애?”

“걔가 쥐도새도 모르게 공민왕의 목을 따면, 그때 애들 몇 명 붙여서 덕흥군을 고려로 보내면 됩니다. 괜히 군대 끌어 모으고, 전쟁 치르고 하면 피곤하잖슴까?”

“글치.”

“쉽게 가는 겁니다. 깔끔하게 공민왕이랑 그 떨거지 몇 명만 조지면 게임 끝입니다.”

김용이 일으켰던, 흥왕사의 난은 이렇게 준비되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것이 당시 공민왕이 보냈던 사신들은 뭘 하고 있었냐는 것이다.

“마마, 저희 전하도 잘 찾아보면 꽤 쓸만한 구석이 있는… 나름 괜찮은 왕입니다.”

“쓸만한 구석이 있어서 우리 기씨 가문을 박살내 버린 거야. 엉?”

“그게… 저희 전하가 헤어스타일에 민감하셔서요. 스킨헤드 스타일이면 스킨헤드 스타일로 갈 것이고, 장발이면 장발로 가야지 어중간한 변발은…”

“지금 장난 하냐? 차라리 발모제를 바르라고 그래라!”

기황후의 마음은 이미 공민왕 교체 쪽으로 가닥을 잡은 상황. 문제는 공민왕이 그리 호락호락 물러날 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공민왕은 폐위 된 왕이다. 에또, 그래서 말인데… 합법적인 민주 고려 정부는 딱 하나 덕흥군 정부라는 것을 공표하기로 한다.”

“저기… 뭐라도 있어야 정부를 만들던, 세컨드를 만들던 할 거 아닙니까? 얼빵한 왕족 하나 올려놓으면 그게 다 정붑니까?”

“성질 하고는… 지금 말하려고 하잖아! 에… 그러니까, 일단 여기에 임시정부를 만들기로 한다. 김용(金鏞)을 판삼사사(判三司事), 최유를 좌정승(左政丞)에 앉혀. 그리고 연경(燕京)에 있는 고려 애들 다 끌어 모아서 행정부를 꾸린다.”

그랬다. 기황후는 연경에 있는 재원고려인들을 끌어 모아 임시정부를 만든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연경에 있던 고려인들은 공민왕에게 붙어야 할지, 덕흥군에게 붙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잽싸게 덕흥군에게 붙게 된다.

“공민왕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원나라랑 파트너 먹은 덕흥군한테는 안될 거야.”

“부자 망해도 3년이라잖아. 원나라가 아무리 망조가 들었어도 고려 정도야…”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임시정부를 꾸린 상황에서 딱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고려의 사신단 들이었다. 나름 고려의 고위직이었던 사신단들, 더구나 공민왕의 명을 받아 연경으로 온 사신들이 덕흥군에게 붙는다면, 그 정치적 파괴력이란 가히 메가톤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황후와 순제(順帝)의 회유와 협박, 설득작업이 시작된다.

“야야, 대세론이 괜히 대세론이 아니라니까… 공민왕 걔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얼마 못 간다니까. 시대의 요구는 실용이야. 실용! 이념이 밥먹여 줘? 좋은 말로 할 때 덕흥군한테 붙어라.”

사신단들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는 당시의 기록에 잘 나와 있는데,



홍순, 이자송, 김유, 황대두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다. 처음에 원제가 원에 있는 고려인으로 하여금 모두 덕흥을 따라 본국으로 가게 하니, 김첨수, 유인우, 강육연, 황순, 안복종, 문익점, 기숙윤 등은 모두 이에 붙어 따랐으나, 홍순 등은 피하여 따르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13년(1364년) 9월의 기록 중 발췌



문익점의 이름이 등장하게 된다. 그의 후손 문치창이 쓴 사실본기(事實本記)에는 황제와 맞짱을 뜨다 강남으로 귀양을 간 문익점이건만, 고려사절요에는 시세에 따라 덕흥군에게 붙은 배신자로 나온 것이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문익점과 같이 사신길에 올랐던 이공수(李公遂)의 행적이다. 이공수는 사신길을 떠나던 중 서경(평양)에서 태조 원묘를 찾아가,

“우리 임금을 복위시키지 않으면 신은 죽어도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라고 맹세하게 된다. 당시에는 분위기 타서 오바 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런 이공수의 맹세가 단순히 오바가 아니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공수야, 너밖에 없다. 덕흥군 저놈 딱 보면 견적 나오지 않냐? 애가 얼빵하게 생겨가지고 가서 왕 노릇이나 하겠냐? 네가 옆에서 도와줘야지 안 그래?”

“저기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원래 제가 물을 좀 가리거든요.”

기황후는 이공수를 포섭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지만, 이공수는 병을 핑계로 거절하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덕흥군이 군사를 이끌고 움직이려 하자, 이런 동태를 상세히 기록해 공민왕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문익점과는 대비되는 모습, 공민왕에게 있어 이공수는 충신 중의 충신이었고, 문익점은 역적이었던 것이다.

 

[엽기인물 한국사]24.나는 강남에 간 적이 없다!⑤
입력: 2008년 01월 02일 21:35:36

덕흥군이 일으킨 난은 예상외로 쉽게(?) 해결된다. 원나라의 요동병 1만 명을 이끌고 보무도 당당히 압록강을 건넌 덕흥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최영과 이성계였다.

“야야,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라. 괜히 한대 맞고 도망가지 말고”

“이 자식이 임금이 왔으면, 말에서 내려야 할 거 아냐!”

“시끄럽고, 깔끔하게 주먹으로 쇼부 보자. 좋은 주먹 놔두고, 말로 할 게 뭐 있냐?”

수주(隋州 : 지금의 평북 정주)지방에서 맞닥뜨린 양군은 깔끔하게 쇼부를 본다. 전투결과 최영과 이성계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었고, 덕흥군은 패퇴하게 된다. 공민왕으로서는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원나라 정부도 더 이상 덕흥군을 밀수만은 없게 되었다.



9월에 호군 장자온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승상 패라첩목아 등이 이르기를 ‘고려왕이 공은 있고 죄는 없는데 소인에게 곤욕을 치르니 어찌 소인을 먼저 다스리지 않으랴’ 하면서 황제에게 아뢰어 왕을 복위하게 하고, 최유를 함거에 실어 본국으로 송치하게 하였습니다”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하략)

- 고려사절요 공민왕 13년(1364년) 9월의 기록 중 발췌



원나라가 꼬리를 내린 것이다. 공민왕으로서는 천만다행의 일이었지만, 공민왕 대신 덕흥군을 선택한 재원고려인들과 사신단 들에게는 악몽의 시작이었다.

“우리 이제 어쩌냐?”

“어쩌긴 뭘 어째… 돌아가야지. 고려의 공무원은 고려로 출근해야 하는 거야.”

“저기… 네가 잠깐 알츠하이머에 걸렸나 본데, 우리 방금 전까지 덕흥군한테 붙어 있었거든?”

“야 그렇다고, 계속 여기에 있을 거야? 원나라 애들도 지금 오늘내일 하고 있구만…”

고려 귀국을 놓고, 갑론을박하던 사신단은 결국 고려 귀국을 결정하고, 고려로 출발하게 된다. 고려를 떠난 지 1년 반만의 일이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이 당시 문익점이 어떻게 목화씨를 들고 갔냐는 점이다.

일단 목화하면, 많은 사람들이 강남이 본고장으로 알고 있는데, 그 원산지는 인도였다. 목화는 인도에서 중국의 강남으로 건너오게 된 것이다. 이때가 대략 12~13세기 무렵이었다. 인접국가 치고는 그 전래가 늦었다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전래가 늦었다고, 확산 속도까지 늦은 건 아니었다. 당시 중원을 차지하고 있었던 원나라는 목화의 가능성에 주목하게 된다.

“목화는 정말 최고다 해! 이것만 있으면, 세계정복도 가능하다 해!”

“솜이불… 정말 따뜻하다 해. 목화만 있으면, 추위도 무섭지 않다 해!”

목면으로 만든 옷의 보온성을 확인한 원나라 정부는 목화의 증산을 결정하고, 증산을 위한 범정부적 차원의 지원을 하게 된다.

“강남 땅에서만 목화를 생산하는 건 비생산적이다 해! 강북에서 목화를 생산하면, 생산량은 따블이다 해. 강북에서도 목화를 재배해야 한다 해.”

여기서 나온 것이 바로 강북산 목화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강남산 목화와 강북산 목화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분명 차이가 있었다. 강남의 귤도 회수를 넘으면 탱자가 된다 하지 않았던가? 강남산 목면은 다년생 목면이지만, 강북에서 재배되는 목면은 1년생 초면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목화면 되지 않는가? 문익점은 강북산 목화를 들고 왔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이 당시 원나라가 목화를 수출금지품목에 넣었냐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나라는 목화를 수출금지품목에 넣지 않았다.

“울리 사람 군사용으로 전용될 수 있는 지도나, 화약은 무조건 안 된다 해. 나머지는 가져가도 된다 해.”

그랬다. 당시 원나라는 지도와 화약 등 군사적으로 전용 가능한 품목에 한해서만 수출금지품목으로 지정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문익점은, 붓두껍에 숨겨 가져오거나 하는 미션임파서블틱한 이벤트를 연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아니 실제로 그런 짓을 안했을 것이다.

“어라? 이거 레어 아이템이잖아? 고려에선 구할 수도 없는데… 몇개 가져가야겠다.”

이랬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득목면종(得木綿種 : 목화 씨앗을 얻어 오다)의 진실이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덕흥군에게 붙어 공민왕을 배신했다는 혐의… 아니, 확신범인 문익점은 그렇게 목화씨앗 몇 개와 함께 고려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 누구도 문익점이 인생이 목화씨앗 몇 개로 뒤바뀔 줄 아무도 몰랐다.

목화씨앗은 문익점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초특급 대하 울트라 히스토리 ‘나는 강남에 간 적이 없다!’는 다음회로 이어진다. 커밍 쑨!

 

[엽기인물 한국사]24.나는 강남에 간 적이 없다!⑥
입력: 2008년 01월 03일 21:42:39

고려로 돌아온 문익점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파직이었다. 배신자로서는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아니, 배신자에게는 과분한 처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목이 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사안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덕흥군에게 붙은 걸로 이해하마. 그래도 붙은 건 붙은 거니까 공무원 생활은 여기서 쫑이다. 디엔드, 사요나라. 알았지?”

문익점은 공무원이라는 철밥통의 대명사에서 인생막장 실업자로 순간이동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된 거, 원나라에서 가져온 목화씨나 키워야겠다.”

그렇게 문익점은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재배에 뛰어들게 된다. 그리고 10년 간 이 땅에 목화보급에 앞장서게 된다.

“야, 이번에 들여온 목화라는 것 봤냐? 이게 완전 고어텍스라니까! 겨울에는 솜이불로 쓸 수 있지, 평소에는 작업복으로 쓸 수 있지… 완전 대박이야!”

“이게 겨울에는 밍크이불 저리가라니까.”

“옷으로 해 입어도 간지 짱이야.”

“이제 패션의 시작은 무명이야!”

무명이 등장하기 전까지 고려의 3대 옷감으로 이름을 날렸던 것이 명주와 삼베 그리고 모시였었다. 그러나 무명이 등장하면서부터 이야기는 180도로 달라졌다.

목화재배 3년 만에 재배에 성공하고, 다시 10년 만에 한강 이남지역에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반세기만에 무명은 조선 팔도에 다 퍼져나가게 된다. 명주가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고급소재라면, 무명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국민 옷감’이 되었던 것이다. 옷감뿐이던가? 솜은 이불로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된다.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목화가 퍼진 이유가 뭐였을까?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는데,

첫째, 경작의 용이성이었다. 1년생인 목화는 다년생인 뽕나무나 모시풀과 달리 윤작이나 간작이 가능했다. 덕분에 토지이용도가 높았다.

둘째, 무명의 범용성이었다. 무명 등장 이전의 고려 3대 옷감을 보면, 명주는 귀족층을 대상으로 한 고급소재였기에 일반인들의 접근성이 떨어졌고, 삼베나 모시는 여름용이라는 계절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에 반해 무명은 1년 365일 계속 쓸 수 있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던 것이다.

셋째는 노동의 유연성이었다. 이걸 장점으로 봐야 할지는 그렇지만, 어쨌든 무명은 시기를 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삼이나 명주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대량의 인력을 동원해 여름 한철 반짝 수확해 재빨리 실을 뽑고, 옷감을 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삼베나 명주였기에 사람들은 삼베나 모시를 얻기 위해 그야말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야 했다. 반면 무명의 경우는 목화를 잘 수확해 놨다가, 시간 날 때 천천히 실을 뽑고, 베를 짜면 그만인 것이다. 이러다 보니 농사철에는 농사를 하고, 시간이 남는 농한기 때 무명을 뽑으면 되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농가의 여성들은 1년 365일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열약한 근무환경에 놓이게 됐지만, 남자들 입장에서 보면 분명 남는 장사였다. 여름에는 같이 농사일을 하고, 겨울이 되어 한가해 지면 창고에 있는 목화를 꺼내 무명을 만드니 농한기 대책까지 세워놓게 된 것이다.

이런 이점들 덕분에 무명은 순식간에 이 나라 최고의 옷감이 되었고, 그 동안 현물화폐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던 마포(麻布)의 위치를 위협하게 된다.

“쌀 두 섬이랑 마포 한필이랑 바꿉시다.”

“이 사람이 방금 제대했나… 요즘 누가 마포랑 아이템 거래해? 지금 사냥터에서 주워 먹으려는 속셈이야?”

“이 사람이 주워 먹긴 뭘 주워 먹는다고…”

“요즘 대세는 면포(綿布)야 면포!”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목화의 전래자인 문익점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 올랐고, 결국 우왕 1년(1375년)에는 전의주부에 올라 정계로 컴백하게 된다. 얼떨결에 덕흥군 쪽에 줄을 섰다가 막장인생이 된지 10년만의 일이었다. 목화씨가 문익점의 인생을 뒤집었던 것이다. 그러나 목화씨의 마술을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왕을 거쳐 창왕, 공양왕까지 목화씨의 도움으로 승승장구하던 그 시절… 혁명가 이성계가 등장하게 된다. 이때 문익점은 정몽주에 붙을 건지, 이성계에 붙을 건지를 고민하게 된다.

“우리가 남이가? 그래도 이색라인인데… 몽주한테 붙어야지.”

이성계 세력이 야심차게 내놓은 전제개혁에 반대하던 문익점은 정몽주의 편에 서게 된다. 덕흥군에 의해 두 번째로 줄을 잘못 선 것이다. 결국 정몽주가 선죽교 아래에서 참살을 당하고, 고려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익점은 끝까지 살아남게 된다. 목화씨를 이 땅에 전파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문익점은 공신 대접을 받으며 나름 행복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그 자식들도 익점의 혈육이란 이유로 조정에 음서로 진출하게 된다).

줄 한번 잘못 섰다 옷을 벗게 된 문익점. 그러나 그의 주머니 안에 있었던 몇 알의 목화씨 덕분에 문익점은 인생역전의 꿈을 이뤘던 것이다. 지금껏 우리가 위인전에서 본 문익점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지만, 그 ‘다른 이야기’마저도 그가 가져온 목화씨 때문에 생겼다는 사실… 역시 인생은 한방인 것일까?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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