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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7> - ‘아기 용사’를 사로잡아라

道雨 2008. 4. 12. 12:28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7>
  ‘아기 용사’를 사로잡아라
  2001-12-10 오전 10:05:22

 

우왕 6년(1380) 8월, 왜적의 배 5백 척이 진포(鎭浦)에 머물면서 남부 3 도(道)를 노략질했습니다. 바닷가 고을을 도륙하고 불태워 쑥밭이 됐으며, 사람을 얼마나 죽이고 잡아갔는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고, 쌀을 배로 운반하다가 떨어뜨려 한 자 두께로 쌓였다고 합니다. 잡아가는 포로의 자녀를 베어 죽인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지나간 곳은 피의 물결을 이루었습니다.
  
  두세 살 먹은 계집아이를 잡아다가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깨끗이 씻은 뒤 쌀 술과 함께 하늘에 제사지냈습니다. 3도 바닷가 지방이 쓸쓸하게 텅 비어버렸으니, 왜적의 노략질이 시작된 이후로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우왕은 이성계를 양광(충청) 전라 경상 3도의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왜적을 정벌하러 보냈습니다. 찬성사 변안열(邊安烈)은 도체찰사(都體察使)로 부장(副將)이 되고, 그 밖에 10여 명의 대장에게 모두 이성계의 지휘를 받도록 했습니다. 군대가 장단(長湍)에 이르렀을 때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자 점쟁이는 싸움에 이길 징조라고 말했습니다.
  

 
지리산 일대는 이성계가 활약하던 시대에도 처절한 싸움터였다.

  왜적은 상주(尙州)에 들어와서 엿새 동안 술판을 벌이고 창고를 불사른 후 경산부(京山府, 성주)를 지나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했습니다. 3도 원수 배극렴(裴克廉) 등 아홉 대장이 패전하고 두 대장이 죽었습니다. 일반 군사로 죽은 사람은 5백여 명이었습니다.
  
  적군의 세력이 더욱 커져 드디어 함양성(咸陽城)을 치고 남원(南原)으로 가다가 운봉현(雲峰縣)을 불사르고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했습니다. 장차 광주(光州)의 금성(金城)에서 말을 먹이고는 북쪽으로 올라가겠다고 큰소리치니, 온 나라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이성계는 변안열 등과 함께 남원에 이르렀습니다. 적군과 1백20 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배극렴 등이 마중나와 모두 기뻐했습니다. 이성계는 하루 동안 말을 쉬게 했습니다. 이튿날 싸우려고 하니, 장수들은 모두 적군이 험한 곳을 지고 있어 그들이 나오면 싸우는 게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성계는 분개하면서 말했습니다.
  “군사를 일으켜 적군에 대한 의분이 솟으면 오히려 적군을 못 만날까 염려하는 법이오. 이제 적군을 만났는데 치지 않는 게 옳겠소?”
  
  그러고는 각 부대의 임무를 정하고 이튿날 아침에 서약(誓約)한 후 동쪽으로 진군해 운봉을 넘었습니다. 적군과의 거리는 수십 리. 황산(黃山) 서북쪽에 이르러 정산봉(鼎山峰)에 올랐습니다.
  
  이성계가 길 오른쪽의 험한 샛길을 보고 말했습니다.
  “적군은 틀림없이 이 길로 나와서 우리 뒤를 칠 것이오. 서둘러야겠소.”
  여러 장수들은 모두 평탄한 길을 따라 진군했으나, 적군의 선봉이 매우 날카롭자 싸우지 않고 물러났습니다. 이때 날은 벌써 저물었습니다.
  
  이성계가 험준한 곳에 들어가자 과연 적의 기습 군사와 정예병이 튀어나왔습니다. 이성계는 화살 50여 발을 쏘아 모두 적의 얼굴에 맞추었으며, 모두 세 번을 만나 힘껏 싸워 적을 죽였습니다. 진창을 만나 적군과 우리 군사가 서로 넘어졌으나, 빠져나와서 보니 죽은 자는 모두 적군이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적군은 산을 의지해 굳게 지켰습니다. 이성계는 군사들을 지휘해 길목을 나누어 지키도록 하고, 휘하 군사로 하여금 싸움을 걸게 했습니다. 이성계가 올려 공격하니, 적군은 죽을힘을 내어 높은 곳에서 부딪쳐왔고 우리 군사는 패해 내려왔습니다. 이성계는 다시 소라를 불어 부대를 정돈하게 하고는 개미처럼 붙어서 올라가 적진에 부딪쳤습니다.
  
  창을 든 적의 장수가 곧바로 이성계 뒤로 달려와 매우 위급했습니다. 휘하 장수 이두란이 말을 달리며 크게 소리쳤습니다.
  “영공(令公), 뒤를 보십시오! 영공, 뒤를 보십시오!”
  이성계는 미처 보지 못했으나 결국 이두란이 쏘아 죽였습니다.
  
  이성계의 말이 화살에 맞아 넘어졌습니다. 바꾸어 타자 또 화살에 맞아 넘어졌습니다. 또 바꾸어 탔으나, 날아오는 화살이 이성계의 왼쪽 다리에 맞았습니다. 이성계가 화살을 뽑아버리고 더욱 용감하게 싸우니, 군사들은 이성계가 상처를 입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적군이 이성계를 몇 겹으로 포위하자 이성계는 기병 몇 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갔습니다. 적군이 이성계의 앞에 부딪쳐오자 이성계는 그자리에서 여덟 명을 죽였습니다. 적군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이성계는 하늘의 해를 가리키면서 맹세하고 손을 휘두르며 말했습니다. “겁이 나는 사람은 물러나라! 나는 그래도 적과 싸워 죽겠다!”
  
  장수와 군사가 감동하고 고무돼 용기백배했습니다. 사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니, 적은 나무를 심어 놓은 듯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적의 장수 가운데 어린 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겨우 열대여섯 살쯤? 그러나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럽기 비길 데가 없었습니다. 흰 말을 타고 춤추듯 창을 휘둘러대며 돌진해 부딪치니, 가는 곳마다 무너져 당해낼 장사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군사들의 말로는, 그가 하도 용감하고 날래어 오지 않으려는 것을 억지로 데려왔다고 합니다.
  
  그 앞에서는 장수들도 설설 기었으며, 군중의 명령은 그가 모두 주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군사는 그를 아기발도라 부르고 서로 피했습니다. 아기는 우리말로도 아기, 발도(바투)는 용사라는 뜻의 몽고말이니, 아기발도는 ‘아기 용사’지요.
  
  이성계는 그의 용맹을 아껴 이두란에게 사로잡도록 지시했으나, 이두란은 사로잡으려면 사람이 다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입고 목과 얼굴까지 감싸 쏠 곳이 없었습니다.
  
  이성계는 말을 달리며 그 투구를 쏘아 꼭대기를 바로 맞혔습니다. 투구 끈이 끊어져 기울어지자 적장은 서둘러 투구를 바로 썼습니다. 이성계가 즉시 투구를 쏘아 또 꼭대기를 맞혔습니다. 투구가 떨어지자 이두란이 곧 쏘아서 죽였고, 그러자 적군의 기세가 꺾였습니다.
  
  이성계가 몸을 던져 힘껏 치니, 적의 무리가 궤멸되고 정예병은 거의 다 죽었습니다. 적군의 통곡 소리가 마치 만 마리 소가 우는 듯했습니다. 적군은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우리 군사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산으로 달려 올라가 기뻐하며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습니다.
  
  마침내 적을 크게 쳐부수니, 냇물이 모두 시뻘개져 예니레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물을 마실 수가 없어서 모두 그릇에 물을 떠 맑아지기를 기다려 한참 지나서야 마실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말 1천6백여 필을 얻고 무기는 셀 수도 없었습니다. 처음에 우리 군사의 10 배나 되던 적군은 70여 명만이 지리산으로 도망쳤습니다.
  
  이성계는 세상에 적을 깡그리 섬멸하는 나라는 없다면서 끝까지 추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웃으며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습니다.
  “적군을 친다면 이렇게 해야지.”
  여러 장수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물러와서 군악(軍樂)을 크게 울리며 탈춤을 베풀었습니다.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습니다. 적군의 머리 바친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장수들은 싸우지 않은 죄를 다스릴까봐 머리를 찧고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이성계는 조정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적군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적진에서 돌아와 말했습니다.
  “아기발도는 이 장군이 진을 가지런히 설치하는 것을 바라보고 그 무리들에게 ‘이 부대의 기세는 결코 지난날의 장수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 싸움은 너희들이 각기 조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행군에서 군사들이 장막의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 바꾸려 하니, 이성계가 말했습니다.
  “대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가벼워 멀리 가져가기 편하겠지만, 대나무는 민가에서 심은 것이고 더구나 우리가 꾸려 가져온 그전 물건이 아니다. 그전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고 돌아가면 충분하다.”
  이성계는 이렇게 가는 곳마다 털끝 만한 것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실록은 한껏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성계가 부대를 정돈하고 돌아오니, 삼사 판사 최영이 백관을 거느리고 산대놀이와 여러 가지 재주를 베풀며 도성 동쪽 교외 천수사(天壽寺) 앞에서 줄을 지어 영접했습니다. 이성계가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무릎걸음으로 나아가 두 번 절하니, 최영도 두 번 절하고 앞으로 와 이성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공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성계가 머리를 숙이고 사례하며 말했습니다.
  “삼가 명공(明公)의 지휘를 받들어 다행히 싸움에 이긴 것뿐이지, 제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이 적들은 이미 세력이 꺾였으나, 혹시라도 다시 덤빈다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이 공! 이 싸움 하나로 우리 나라가 다시 일어섰습니다. 공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
  
  이성계는 사양하면서 과분한 칭찬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왕이 금 50 냥을 내려주는 것도, 장수가 적을 죽인 것은 직책일 뿐이라고 사양하면서 받지 않았습니다.
   
 
  이재황/실록연구가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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