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사성 정승의 애우(愛牛), 그리마
음 음~메!
아니 소리가 이게 뭐야? 목에다 힘을 뻣뻣이 주고 오지게 큰 기침을 했는데 기껏 음~메라니. 이럴 때는 소 울음과는 구별이 가는 꼭 집어 다른 소리를 내야 뽀대가 나는 것인데 …. 이를테면 어~흥이라든지 아니면 주인님 흉내내어 에~헴이라고 말이야.
내 신세를 생각하니 소 팔자가 슬프네요. 하느님은 왜 우리 소만 미워하여 고작 한 마디 밖에는 소리를 주지 않았는지요. 와, 짜증. 그건 그렇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다시 한번 해 봐야지. 큭 큭 흠 흠 . 이제 됐다. 그럼 소리를 크게 내어 자, 음~메! 어머, 에고 부끄러워라. 에이 모르겠다.
여러분, 아니 두 발로 걷는 동물들. 아니지, 사람 여러분!
저가 누구냐고요? 보시다시피 저는 검둥이 소고요, 이름은 ‘그리마’입니다. 하지만 저는 쟁기나 마차를 끄는 머슴 소나,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비육우가 단연코 아닙니다. 저는 나들이를 할 때만 타고 다니던 이를테면 명우(名牛), 아니 이상하지만 애우(愛牛)라고요.
그러면 제 주인님이 누구냐? 놀라지 마세요. 바로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1360~1438) 선생으로 조선의 4대 정승 중에 한 분이지요. 선생은 79세까지 장수하며 좌의정까지 지낸 분으로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신 최영(崔瑩) 장군의 손자 사위이기도 하지요.
음 음메,
그런데 말이죠. 선생은 어찌나 성품이 소탈하고 청렴하던지, 비록 아랫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까지 나가 정중히 맞아들여서는 윗자리에 앉히셨고, 돌아갈 때에도 배웅을 하였다고요. 저는 그것이 싫었어요. 글세 손님이 타고 온 당나귀가 나보고 뭐라며 깔봤는지 아세요.
“야, 너 빨리 고개를 숙이지 못해. 감히 아래 것인 주제에….”
와, 주인님 체면 보아 성질을 참자니 속에서 열 불이 났습니다. 그렇다고 선생이 물러터진 ‘물 사성’이라 생각하시면 천만의 말씀이 여요. 깡다구가 보통이 아니 였어요. 한번은 대사헌으로 계셨을 때였어요.
부마인 조대림(趙大臨)이 장인(태종)의 빽만 믿고 설쳐댄 일이 있어요. 이승 통신에 따르면 요즘에 대통령의 아들이 으스대다 쇠고랑을 찼다고 하는데 조대림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고요. 그러자 선생은 임금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 작자를 잡아다가 요절을 냈어요. 그 놈이 가만히 있었겠어요. 치사하게 딸을 볼모로 잡고는 장인을 협박하기 시작했어요.
“장인마마, 저를 묵사발로 만든 맹 가의 목을 베지 않으면 따님의 눈에서 피 눈물이 날 것을 최후 통첩합니다.”
그러자 태종은 노발대발하며 선생을 죽이려고 했어요. 저는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조대림만 보이면 한 방에 받아버리려고 뿔을 곤두세웠어요. 그 때 영의정인 성석린(成石璘) 대감이 용포를 붙잡고 용서를 빌어 선생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어요. 또 있어요. 「태종실록」 이 완성되자 세종 임금은 실록을 보자고 했어요. 어떻게 어명을 거역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의정으로 실록편찬의 책임자이던 선생은 감히 ‘NO'라고 대답했어요.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고 사관(史官)은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목숨이 두 개라도 모자라는 용기에 임금도 그만 두었지요. 우리 주인님은 역시 멋쟁이지요? 선생은 당대의 효자였어요. 온양에 계신(현재 맹씨행단) 아버님을 자주 찾아뵈었고, 모친이 돌아가시자 7일 동안이나 음식을 먹지 않았고, 장사를 지낸 후에도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 간이나 예를 올렸어요.
부친이 병이 들자 봉양을 한다며 벼슬을 그만두려해 임금은 할 수 없이 관찰사로 임명해 부친 곁에 머물도록 배려까지 했어요. 선생은 또 음악을 알고 좋아한 풍류가 였어요. 옥피리를 즐겨 불었는데 동구밖에 이르러 피리 소리가 들리면 선생이 집에 있음을 알았다 하고, 세종 때 음악이 발전한 것은 선생과 박연 선생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음 음메,
지금부터는 제가 선생을 모시고 다니며 있었던 우스운 일들을 이야기할께요. 먼저 웃음부터 나오네요. 선생이 온양으로 행차를 했을 때, 근처 고을에 사는 원님들이 서로 잘 모시어 높은 벼슬을 얻으려 애를 태웠어요. 그 날은 양성(陽城)과 진위(振威)라는 두 원님이 아침부터 장호원에서 기다린 거여요. 저는 주인님을 모시고 그들 앞을 유유히 지나갔지요. 그러자 하인이 달려와 마구 꾸짖었어요.
“어찌하여 늙은이가 사또 앞을 소를 타고 지나가느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더군요. 근사한 뿔로 한 방에 찔러버리려 하자, 선생은 내 마음을 아시고 등을 치면서 말했어요.
“네 가서 온양에 사는 맹 고불이라 일러라.”
하인이 돌아가 그대로 이르자, 원님은 깜짝 놀라 달아났고, 그 와중에 관인(官印)을 연못에 빠뜨렸습니다. 이 연못을 그 뒤로 ‘도장이 빠진 못[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지요.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온양을 다녀오는 길에 용인의 한 주막에 묵었는데, 그 곳에는 행장를 멋있게 꾸민 젊은 이가 먼저 와 다락[樓] 위에 앉아 있었어요. 선생이 다락 아래에 짐을 풀자, 그 사람은 선생을 보고 올라오라고 해 서로 이야기도 나누며 장기를 두었어요.
그 사람은 영남에 사는 부자 집 자식으로 녹사(錄事) 시험에 응시하러 가는 도중이었다 합니다. 그러자 선생은 그에게 농담으로 말 끝에 ‘공’과 ‘당’을 넣어 말하기로 하였습니다.
“무엇 하러 서울로 올라가는 공”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 당”
“무슨 벼슬인 공”
“녹사 취재란 당”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 공”
“에이 그러지 못할 거 당”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선생이 정사를 보고 있는데, 그 사람이 과거에 급제해 인사차 찾아왔어요. 선생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어떠한 공”
하니 그 사람은 비로소 깨닫고 송구스러워 말하기를,
“죽어지 당”
하였습니다. 그러자 자리를 같이 한 재상들이 무슨 소리인가 궁금하여 그 연유를 물었지요. 선생은 자초지정을 이야기했고 그 사람은 마침내 녹사가 되었다 합니다.
<사진: 아산에 있는 맹씨행단- 맹사성 정승이 살던 집으로 풍수적으로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
* 윗 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