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조선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 그리고 원경왕후 민씨

道雨 2008. 5. 6. 12:39

 

 

 

   신덕왕후 강씨로부터 효빈 김씨를 살려낸 원경왕후 민씨의 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전, 신덕왕후 강씨의 둘째 소생인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방원은 강씨 진영의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너무 예뻐서 신덕왕후 강씨가 태조앞에 내놓기조차도 꺼려했던 강씨의 시녀를 유혹했다가, 그 관계가 그만 들통나고 말았다.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긴 강씨는 태조 이성계에게 방원의 제거를 요구했다.
 '환관 이만과 정을 통한 세자빈 유씨는 사가로 쫓겨났는데 왜 방원에게는 아무 죄도 묻지 않느냐'고

따졌던 것이다.
  중간에 선 이성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평소 속을 터놓고 지내던 이지란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본명이 또우란티무르인 이지란은 이씨성을 받은 여진인으로, 그의 아내는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딸이기도 했다.

   이지란은 방원을 명나라에 보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왕자를 보내야만 조선의 건국을 인정할 수 있다며 사신을 계속 거절하던 터였다.
 그렇게만 되면 강씨의 입장도 난처해지지 않을뿐더러 아들 방원 역시 살릴 수 있는 아주 좋은 묘책일 수 있었다.

 

   이성계는 이 의견에 따르기로 하고, 방원의 아기 곧 왕손을 잉태한 강씨의 몸종을 궁궐 밖으로 내쫓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강씨는 이 여종을 끌어내 죽이려고 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방원은 부인 민씨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자, 
 

  민씨는 여종을 살리기 위해 즉시 궁궐로 달려갔다. 그리고 강씨가 보는 앞에서 여종에게 침을 뱉으며 자신이 더 분한 것처럼 연극을 했던 것이다.
   지아비를 유혹한 여자를 가만히 둘 수 없다는 듯이 펄펄 뛰자 강씨는 안심하고 민씨에게
여종을 내주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민씨의 은덕을 입은 여종은 잠시 원경왕후의 민씨의 시녀로 있게 되고 나중에 방원이 왕위에 올랐을 때 효빈의 시호를 받았다.

 

   그런데 태종16년 어느날, 원경왕후민씨가 임신한 가노김씨(효빈김씨)를 죽이려 했던 일이 우연히 밝혀져 태종의 노여움을 사고 민씨의 셋째,넷째 동생들이 귀양지에서 다시 불려와 고문을 당하고 다시 유배되어 자진케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태종에게 파주교하에서 한 노파가 찾아 왔다고 한다.

 

   파주 교하는 1395년에 가노김씨(효빈김씨)의 소생으로 태어난 원윤(元尹) 이비(李裶=경녕군)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이다.

   처음엔 차모인 신덕왕후강씨의 시녀였으나, 민씨(원경왕후)의 몸종이었던 김씨의 몸에서 태어난 이비는 서자(후에 경녕군)였기에 궁에서 자라지 못했다.

 

  태종은 그것을 가슴 아파했다.  

파주 교하에서 온 노파를 조용히  돌려보낸 태종은...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황희, 이조판서(吏曹判書) 박은, 지신사(知申事) 유사눌을 긴급히 들라 명했다.

   긴급호출을 받고 달려온 신하들은 경악했다.

 붉게 충혈된 눈, 흐트러진 자세. 모두가 처음 보는 태종의 모습이었다.

 격정을 감추지 못한 태종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분노에 떨리고 있었다.

 "원윤 이비(李裶)의 유모로부터 기막힌 얘기를 들었다. 천지간에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원윤 이비가 태어났을 때 병약한 산모와 핏덩어리 어린것을 죽도록 내버려 둔 민씨의 음참(陰慘)하고 교활한 죄를 갖추 써서 왕지를 내리고자 한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내가 임오년[1402년/경녕군의 어미 김씨를 만난것은 을해년(乙亥年.1395년)으로 임오년은 오기이다]에 민씨의 가비(家婢/전에는 신덕왕후 강씨의 시녀) 김씨를 가까이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배가 불러오자 민씨 옆에 있을 수 없게 된 김씨가 나가서 밖에 거(居)하고 있었는데 민씨가 행랑방에 불러들여 계집종 삼덕과 함께 있게 하였다. 그 해 12월에 산달이 되어 산모가 배가 아프기 시작하니 종 삼덕이 민씨에게 고하자 민씨가 문 바깥 다듬잇돌 옆에 내다 두게 하였으니 죽게 하고자 한 것이다.
 사내종 화상이 불쌍히 여겨 담벼락에 서까래 두어 개를 걸치고 거적으로 덮어서 겨우 바람과 해를 가렸다. 진시에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의 원윤(元尹) 이비(李裶)다. 그날 민씨가 계집종 소장과 금대를 시켜 산모와 아이를 끌고 숭교리 궁노 벌개의 집 앞 토담집에 옮겨 두고 화상이 가져온 이부자리를 빼앗아 갔다. 다행히 종 한상좌란 자가 추위에 떨고 있는 산모를 불쌍히 여겨 마의(馬衣)를 덮어주어 7일이 지나도 죽지 않았다.
 민씨가 산모의 아비를 불러 김씨와 어린것을 소에 실어 교하 김씨의 집으로 보냈다. 산모와 어린것이 추위에 옮겨다니느라 병을 얻었으나 천만다행으로 죽지는 않았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과인은 그때에 알지 못하였으나 며칠 전 교하에서 온 노파로부터 듣고 처음 알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민씨가 핏덩어리에게 하는 짓이 이와 같이 극악하였다.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측은하다. 핏덩어리(赤子)를 모두 불쌍히 여기는데 민가(閔家)가 음참(陰慘)하고 교활하여 여러 방법으로 꾀를 내어 사지(死地)에 두고자 하였으니 종지를 제거하고자 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종지(宗支)란 종중에서 종파(宗派)와 지파(支派)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서 이비는 서자이므로 지파다.

 즉 아무리 비천한 몸에서 태어났어도 임금의 피를 받아 태어났으므로 왕자라는 뜻이다.

"비록 핏덩어리가 미약함에도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 보존하고 도와서 온전하게 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어찌 간사하고 음흉한 무리로 하여금 그 악한 짓을 이루게 하겠느냐? 이것이 실로 여러 민가의 음흉한 일이다. 내가 만일 말하지 않는다면 사필(史筆)을 잡은 자가 어찌 알겠는가? 사책(史冊)에 상세히 써서 후세에 밝게 보여 외척으로 하여금 경계할 바를 알게 하라."

 

 이렇게 왕지가 내려지고 유배가 있던 원경왕후 민씨의 두 동생은 다시 불려와 심한 고문을 가하였다.

 결국 무릎이 부서져 일어서지도 못한 상태로 민무휼은 원주로, 민무회는 청주로  함거에 실려 유배지로 떠났다.

 

 왕비는 억장이 무너졌다. 민무구 민무질 두 동생을 잃고 또 다시 두 동생의 목숨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달렸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자신의 투기에서 비롯되었다니 괴로웠다. 왕비의 영화도 가문의 영광도 모두가 부질없는 일장춘몽(一場春夢)만 같았다. 민무휼 민무회 두 동생이 모진 고문을 당했다는 충격에 식음을 전폐하고 눕고 말았다.

또한 장모되는 송씨 또한 병을 얻어 눕고 말았다.

 

 민무휼 민무회가 귀양지로 떠났으나 조정은 들끓었다. 당장 참형에 처하라는 것이었다. 의금부에서 주청이 올라왔다.

 그러나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를 봐서라도, 또한 장모 송씨를 봐서라도 이미 두처남 민무구 민무질을 죽인 상태였는데 또 두 처남을 죽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민이었다.

 

 의정부에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 부복하였다.
 "불충한 죄는 왕법(王法)에 있어서 주륙(誅戮)에 해당하는 것으로 천지(天地)에 용납할 수 없습니다. 역신 민무구와 민무질은 이미 그 주륙을 당하였으나 그 형들이 죄도 없는데 죽었다고 하여 몰래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 불충한 죄가 뚜렷하게 나타났으니 법대로 처치하여 후래(後來)를 경계하소서."


 결국 ...

 태종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이맹진을 민무휼이 있는 원주로, 송인산을 민무회가 있는 청주로 즉시 떠나라 명했다.  

 

 다음날 한양으로 돌아온 이맹진과 송인산이 보고했다.

 "민무휼과 민무회가 모두 자진(自盡)했습니다."
 

 

 1400년 이방원이 태종으로 등극하고 원경왕후 민씨 또한 왕후가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원경왕후 민씨는 경녕군을 낳은 효빈김씨에게 정비와 계비의 선에서 율례에 어긋남이 없이 다정다감하게 마음문을 열었다. 그리고 경녕군 또한 내가 낳은 자식은 아닐지라도 자식과 같이 호의로 대했다. 태종의 지나친 축첩은 원경왕후 민씨의 마음을 편안하게끔 포기하게 만들었고 같은시대 어려움을 겪은 효빈김씨를 위로하게 된 것은 동병상련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십수년전에 행했던 일이 돌부리처럼 솟아나 가문에 환난이 일고 동생들을 죽임에 이르도록 만들었으니 어찌 가슴이 찢어지지 않겠는가.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1395년, 그때 김씨가 신덕왕후 강씨의 손에 죽게 내버려 두었어야 했던것을.....

 

 

 

* 윗 글은 '자유로운 중년' 카페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