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사진

금강공원 답사 사진 (2008. 4. 13)

道雨 2008. 4. 16. 18:25

 

 

 

              금강공원 답사 사진 (2008. 4. 13)

 

 

* 일요일 오후에 잠시 시간을 내서 금강공원에 가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었다. 금강공원 안에도 등록된  문화재가 몇 개 있다.

  금강공원 안에 있는 등록문화재로는 임진동래의총, 독진대아문, 내주축성비, 이섭교비 등이 있고, 금강공원 밖이지만 가까운 곳에 망미루가 있다.

  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과 놀이시설, 체육시설, 각종 기념비 및 시비, 생태학습공간 등 비교적 다양하고 풍성하며, 삼림욕과 휴식 공간으로도 매우 훌륭한 곳이다.   

 

 

* 금강공원 안에 있는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출입문인 솟을삼문인데 특이하게도 현판이 없다.

 

 

* 동래의총 진입로 옆에 동래부사를 역임한 관리들에 대한 불망비들을 모아 두었다. 

 

 

* 임진동래의총 기념비인데 현대적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뜻하지 않게(?) 썩 괜찮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 임진동래의총.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임진왜란 때 왜의 대군을 맞아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군·관·민의 유해를 거두어 모신 묘소이다.
  영조 7년(1731)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퇴락한 동래읍성을 수축할 때, 임진왜란의 격전지였던 옛 남문터에서 많은 전사자의 유골이 발견되어, 삼성대 부근에 6개의 무덤을 만들어 안장하였다.
  일제시대 말 토지개간으로 동래구 복천동 뒷산 영보단(현재 복천박물관 경내) 부근에 이장하였다가, 1974년 현 위치인 금강공원으로 옮겨왔다.

  성의 함락일인 음력 4월 15일에는 동래구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 금강공원 안에 있는 놀이시설 

 

 

* 나무 숲 사이에 서 있는 비둘기집 

 

 

* 공원 안에는 곳곳에 시비도 보인다.

  위 사진은 최계락 시인의 '꽃씨' 시비인데, 부산 최초로 세워진 문학비로서의 의의가 있으며, 1971년에 금강공원 안에 세워졌다.

 

** 최계락 시인은 향토색 짙은 서정시와 따뜻한 동시들로 한국 문단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는데, 국제신보사(현 국제신문) 편집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던 1970년, 40세의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선생의 문학비는 부산에만 4개가 있다. 1971년 금강공원에 세어진 '꽃씨'를 시작으로, 용두산공원의 '외갓길', 대신공원의 '해변', 이기대공원의 '봄이 오는 길' 등이다. 

 

 

* 우리나라 최초로 천연두를 예방하는 종두법(우두)을 시술한 송촌 지석영 선생 공덕비.

  동래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런데 비석은 멋 없이 크기만 하다. 

 

 

 

* 케이블카 타고 내리는 곳. 금강공원과 금정산성 남문 사이에는 케이블카가 운행된다.

 

 

* 이름이 귀엽게 느껴지는군요...

 

 

 

* 점점이 하얀 것들은 떨어진 벚꽃잎들입니다. 

* 공원 안의 비교적 높은, 호젓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 동래독진대아문(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5호).

  동래부 동헌의 대문인데, 일제시대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동래부의 군사권이, 경상좌병영(울산에 위치?)의 지휘하에 있던 경주 진관 소속에서 독립하여, 동래 독진이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   조선시대 관청이었던 동래부사청의 대문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동래부 동헌인 충신당이 세워질 때 함께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원래는 동래부사청 동헌의 입구에 있었으나 20세기 초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웠다.
  문 가운데에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것은 효종 6년(1655) 동래부의 군사권이 경상좌병영의 지휘 아래 있던 경주진영에서 독립하였음을 뜻한다.
  앞면 3칸·옆면 1칸인 3문 형식의 건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고 문짝은 달려 있지 않다.
  독진대아문은 규모는 작지만 흔하지 않은 3문 형식의 아문건물 중 하나이다.

 

 

* 독진대아문 뒤에 장방형의 돌판에 글씨를 새겨놓았다. 무슨 내용인지는...? 

 

 

 

* 내주 축성비(萊州 築城碑).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던 동래읍성을 동래부사 정언섭이 대대적으로 다시 쌓은 후 이를 기념하고자 세워놓은 비이다.
  형태는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올리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돌 윗면에는 도드라진 연꽃무늬를 둘러 새겨 놓았으며, 비몸의 앞면에는 축성에 관한 사실을 20행으로 새기고 뒷면에는 축성에 종사한 임원의 명단을 기록하였다. 머릿돌에는 한 쌍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비문은 김광악이 짓고 송광제가 썼으며 글씨는 유우기의 것이다.
  영조 11년(1735) 남문밖 농주산에 세운 것을, 영조 41년(1765)에 옮겨 세웠다가 순조 20년(1820) 다시 남문거리로 옮겼으며, 지금의 자리로 옮긴것은 일제시대이다. 동래성 연구의 가장 정확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동시에 조선조 후기 성축사의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된다. 
   

 

 

 

* 이섭교비(利涉橋碑).  부산광역시지정 지념물.

  1694년(숙종 20), 수영천에 무지개(홍예) 모양의 이섭교를 만든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 이섭교는 지금은 없어지고 비석만 이곳에 옮겨져 있다.

 

**  ‘이섭교’라는 다리를 놓은 후 그 기념으로 세워놓은 비로, 다리를 놓기까지의 과정과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직책을 기록하고 있다.
  이섭교는 동래부사 이희룡이 이웃한 주민들 계의 도움을 얻어, 수안동과 연산4동 사이에 흐르는 수영천에 놓았던 돌다리로, 다리 아래가 3개의 홍예(무지개모양)로 연결되어 있다.
  비는 자연 암반을 받침돌 삼아 그 위로 비몸을 세운 모습이다. 비문에는 ‘옷을 걷어올리고 건너다니던 냇물에 나무다리를 놓았지만 나무가 쉬 썩어 해마다 다리를 고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몇 사람이 뜻을 모아 돌다리를 놓기로 하고 돈을 모아 조선 숙종 21년(1695)에 다리를 놓았다’는 내용을 적고 있으며, 김진한이 시작하여 신만재가 완성하였다는 내용도 함께 적고 있다.

 

 

 

* 붓꽃

 

 

 

* 사진작가 독보 허종배 선생 기념비.

 

 

 

 

*** 금강공원은 부산 시내에서 휴식과 답사를 겸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금정산 등산이나 온천 목욕도 겸할 수 있고, 인근에 먹거리도 많은 곳이다.

 

  금강공원 정문에서 온천장 쪽으로 내려가는 중간에 '망미루'라는 멋진 누각이 버티고 서있다. 이곳도 꼭 들러보면 좋을 것이다.

 

* 망미루(望美樓).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4호.

  동래부사청 앞에 세웠던 조선 후기의 문루이다. 조선 영조 18년(1742)에 지었다고 하며, 옛날 한양에서 부임해 온 동래부사가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하여 ‘망미루’라 불렀다고 하며, 고종 32년(1895)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사영으로 승격됨에 따라 ‘포정사’라고도 하였다. 1919년 동래의 3·1운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1층은 통행을 위하여 개방하였고, 2층에는 큰 북을 달아 동래성 4대문의 여닫는 시각과 정오를 알렸다고 한다. 앞면에는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 뒷면에는 ‘망미루(望美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망미루는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전형적인 관아 문루이다.

 

 

 

 

 '望美樓' 현판 글씨.

  대형 붓으로 거칠게 속도감 있게 쓴 행서체의 멋진 커다란 현판 글씨가 꽤 인상적이다.

 

**  현재 망미루 인근에는 금강공원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고객으로 하는 먹자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 금강공원 안에 있는 등록문화재들(임진동래의총, 독진대아문, 내주축성비, 이섭교비 등)과 망미루는 모두 원래의 제 위치를 떠나있는 상태이다.

  일제 강점의 영향도 받았고, 아울러 개발시대의 영향도 받았다. 그래도 멸실되지 않고 현재의 자리에라도 남아있는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것이다. 

 

  금강공원을 찾는 많은 시민들이 그러한 사연들을 알아주기는 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