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조선 2대 임금(예종과 성종)의 장모 (한명회의 처)

道雨 2008. 6. 24. 14:41

 

 

 

2대 임금의 장모

한명회의 처, 여흥 민씨



박절하고 불쌍한 여자 여흥 민씨(驪興閔氏)입니다.


세상은 저보고 복받은 여자라고 하지만 모르고 하는 말이여요. 저처럼 기구한 팔자도 없을 거여요. 저는 압구정(狎鷗亭) 한명회(韓明澮,1415~1487)의 처며, 예종과 성종의 장모입니다.


두 딸을 2대 걸쳐 왕비로 시집 보냈으니 세상의 부귀영화를 모두 누렸다고 생각하겠지요. 사실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제 속이 시커멓게 타고 썩는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여요.


제 남편은 칠삭둥이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장가를 갔으나 생활능력이 전혀 없는 한량이라 처가 댁에 기대어 살았어요. 옛 말에 보리 서말이면 처가살이 안한다고 하는데 이 양반은 하라는 공부는 않하고 늘 친구인 권남(權擥)과 돌아만 다녔어요. 한번 집을 나가면 몇 달이나 소식도 끊었어요. 속이 터졌어요. 그런데 친정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사위는 큰 뜻을 품은 사람이니 나중에 크게 될 것이다.”


제기랄! 하지만 남편의 머리는 무지무지 좋았나 봐요. 과거시험 쪽이 아닌 엉뚱한 쪽으로 말이어요. 허구한 날 낙방만 하더니 급기야 38살이 되어서 뒷문으로 벼슬에 올라 하급관리가 되었어요. 다른 사람은 그 나이에 천하를 호령할 나이가 아니여요. 겨우 개성의 말단관리라니, 부끄러워서 말도 못하겠어요.


그런데요,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어요. 어느 날, 수양대군을 만나고 돌아온 남편은 어깨를 으시대며 자랑을 늘어났어요.


“여보, 조금만 참아. 내가 호강시켜 줄께.”


저는 위인이 돌았구나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 였어요. 계유정난(1453)인가 뭔가하는 것이 있고, 원로대신 김종서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남편이 1등공신에 봉해진 거여요. 벼락 출세를 한 거지요. 세상 참 요지경이라 생각했어요. 벼슬도 일 년에 몇 품계씩 올라가니 옛날에는 갓끈도 보이지 않던 높은 분들이 뻔질나게 집으로 찾아왔어요.


1459년에는 왕의 권한을 대행하는 체찰사까지 지내더니, 급기야 벼슬 길에 들어선 지 14년만에 영의정까지 올랐어요. 영의정이 누굽니까? 임금을 빼놓고 가장 높은 분이 아닙니까. 저 역시 아줌마에서 정경부인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부귀영화를 누렸지요. 지금의 압구정동에 ‘압구정’이란 정자를 지어놓고는 중국 사신을 초대해 질펀하게 놀았어요(압구정동의 지명유래) 저 역시 매일 둥기둥기 춤을 출 정도로 신이 났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마(魔)가 끼기 시작했어요.


첫 딸이 예종의 원비로 들어 가, 이제 임금의 장모까지 되는가 싶어 좋아했는데 그것이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왕비도 못되고 17살로 죽어버렸어요. 사위도 금방 죽었고요. 얼마나 슬프고 원통하던지 마음이 아파 가슴이 다 무너져 내렸어요. 그런데 남편의 수완은 보통이 아니 였어요. 둘째 딸을 성종의 원비로 또 들여보낸 거여요. 조금은 창피했어요. 두 딸이 왕비가 된 것은 기쁘지만 언니가 시어머니 격이잖아요.


오호, 통제라. 그런데 둘째 딸년도 시집가서 얼마 되지 않아 18살로 또 죽었어요. 이제 애~헴하고 다리를 뻗고 폼좀 잡아보려했는데, 이게 뭡니까? 두 딸을 잃고 저는 완전히 사는 재미를 잃었어요.


내가 남편의 욕심을 꺽고서 두 딸을 어느 대감 집 도령에게 시집을 보냈다고 합시다. 아마 그렇게 요절하지는 않았을거여요. 자식 낳고 잘 살았을 지도 모르죠. 다 부모 잘못 만난 덕에 제 명대로 못살고 죽은 거여요. 흐흐흑. 그런데 남편이란 작자는 기고만장했어요. 남이 장군의 옥사를 다시린 공으로 큰 상을 받더니, 완전히 벼슬 밭에서 호의호식을 했어요. 그러고는 가문의 영광인 ‘기로소’에 들어갔어요. 이는 나라에 공이 있는 관리가 70살이 되면 임금이 궤장을 하사하고 한 평생 수고했다는 뜻에서 기로소에 들어갈 자격을 주지요. 하지만 평생동안 영화를 누렸던 남편도 세월은 어쩌지 못하고 73세의 나이로 흙으로 돌아갔어요.


아이고, 아이고.
남편이 죽자, 생전에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남편을 모함하기 시작했어요. 꼭 정권을 잃자 과거를 추궁당해 감옥으로 들어간 두 전직 대통령과 마찬가지지 뭐여요. 살아 생전에는 남편에게 빌붙어 권력과 부를 누리다가 “끈”이 떨어지자 오히려 남편에게 화살을 겨누며 남편의 목을 베라고 목청을 높였어요.


권력무상과 인생무상이 느껴지더군요. 남편도 처음에는 배신감을 참지 못하고 안압(眼壓)이 높아져 무진 고생을 했어요. 일은 계속 잘못 되어갔어요. 아뿔사, 남편이 페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은 일에 관련이 있다고 하더니, 갑자사화 때(1504) 남편은 부관참시를 당했어요. 특히 남편에게 인사청탁을 했던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 법조계 인사들이 남편의 목을 베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세상 인심을 원망했어요.


소 도둑놈 같은 금부도사가 포졸들을 데리고 오더니 다짜고짜 남편의 무덤을 쪼갰어요. 저는 남편의 바로 위쪽에 묻혀있기 때문에 창피는 면했어요. 까무러쳤어요. 그들은 썩은 관을 열더니, 반듯이 누워있는 남편의 해골과 가슴 뼈 사이를 시퍼런 칼로 힘껏 그었어요. 죽은 자의 목을 자르는 형벌이지요.


아! 박절한 내 신세.


저와 남편은 지금 충남 천안에 있어요. 593번 국도와 경부고속도로가 만나는 바로 그 지점이어요. 목천인터체인지를 지나 청주 방면으로 약 2~3km를 달리면 왼쪽으로 근사한 사당과 큼직한 묘가 보일 거여요. 그곳이 우리가 사는 집이여요. 그런데 몇 년전까지도 후손들이 우리를 돌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못된 놈들이 와 남편의 신도비를 그라인더로 힘껏 갈아 망가트렸어요.


버젓이 두 눈을 뜨고 당하자니 열 불이 나더군요. 그런데 TV라는 놈이 대단히 신통해요. ‘한명회’라는 연속극이 방영되더니 대접이 확 달라졌어요. 청주 한씨들이 힘을 모아 사당을 짓고 묘 앞을 가렸던 나무와 풀숲도 없애 버렸어요. 이제야 영의정에 걸맛는 대우를 받은 셈이지요.


여러분, 남편을 너무 욕하지 마세요. 모두들 단종을 감싸며 세조와 더불어 남편을 싸잡아 욕하지만, 세조가 펼친 국력신장과 치적을 생각하면 어린 단종으론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시에 의정부에 모인 집현전 학자들은 마치 왕처럼 무지하게 설쳐댔어요. 어린 단종을 깔보고는 자기들이 국정을 총괄한다고 주장해 나라 꼴이 우스웠지요. 세조는 나약한 왕권을 다시 일으키고자 와신상담을 하였고, 남편이 총대를 메고 나라도 붙잡고 왕권도 다시 세워준 것이지요.


‘성공한 구테타는 처벌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가, 국민 여론이 들끓자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명분을 내세워 자기를 정치적으로 키워준 대통령을 백담사와 감옥으로 보낸 의리없는 대통령을 둔 후손들은 정령 이해 못할 일이지요.


아, 이제 잠을 좀 자야겠어요. 경부고속도로를 다니시는 분들께 삼가 부탁 말씀을 드리겠어요. 제발 저희 집 앞에서는 서행, 서행하세요. 잠 좀 잡시다. 파주에 있는 딸년들은 어떻게 5백년이 넘도록 편지 한 장이 없는거야.



<사진: 한명회의 부인 묘에 설치된 부인의 묘비--충남 천안 소재>

 

* 윗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