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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9> -- 요동 정벌-우왕과 최영의 계략

道雨 2008. 6. 24. 14:43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9>
  요동 정벌-우왕과 최영의 계략
  2001-12-12 오전 10:11:34

 

당시에는 이인임(李仁任)이라는 사람이 지금의 총리에 해당하는 시중(侍中) 자리에 앉아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있었습니다.
  
  정부 격인 문하부의 맨 윗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고 바로 그 다음 자리인 찬성사에는 도길부(都吉敷)를 앉혔으며 재정을 담당한 삼사(三司)의 윗자리인 영사와 좌사로는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을 앉혔습니다.
  
  이들 무리가 중요한 자리를 나누어 차지하고 벼슬을 팔며 남의 땅과 노비를 빼앗았습니다. 그들이 탐욕과 포학을 자행하니, 나라건 개인이건 주머니가 텅텅 비어버렸습니다.
  

 
우왕은 평양에 머물면서 군사를
징발·독려하면서 압록강(사진)에
부교를 설치했다.

  우왕 14년(1388) 1월, 이성계는 최영과 함께 이들을 제거했습니다.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고 길 가는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임견미 등은 목을 베었고, 이성계는 문하부 수시중(守侍中)이 되었습니다. 총리대우 격이죠.
  
  2월에 이성계는 최영과 함께 인사를 의논하는 정방(政房)을 맡았습니다. 최영이 임견미 염흥방이 썼던 사람을 모두 내쫓으니, 이성계가 말했습니다.
  
  “임견미 염흥방이 정권을 잡은 지 오래 되었으니, 사대부들은 모두 그들이 추천한 사람이오. 지금은 다만 재주가 있나 없나만 물으면 그만이지, 그들의 과거까지야 어찌 허물하겠습니까?”
  
  최영은 듣지 않았습니다. 최영은 전 원주목(原州牧) 사(使) 서신(徐信)이 쫓겨난 세력인 이성림(李成林)의 동서라 해서 함께 목베려 했습니다. 이성계가 사람을 시켜 말했습니다.
  
  “죄인과 괴수가 이미 멸족되고 흉악한 무리도 이미 참형을 당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마땅히 형벌과 살생을 중지하고 덕음(德音)을 펴야 할 것입니다.”
  
  최영은 역시 듣지 않았습니다.
  앞서 명나라 황제는 철령(鐵嶺)에서 비스듬히 북 동 서쪽이 원나라 소속이었다며 중국인 여진인 고려인 등 관할 군사와 백성을 그대로 요동에 소속시켰습니다. 최영이 백관을 모아 이 일을 의논하니, 모두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우왕과 최영은 몰래 요동을 치는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이 최영의 집을 찾아가 극구 반대하자, 최영은 이자송이 임견미에 붙었다는 핑계로 곤장을 쳐서 전라도 절제사 군영으로 귀양보냈다가 조금 후에 죽였습니다.
  
  우왕은 서북면 도안무사(都安撫使)로부터 요동 군사가 강계에 이르러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 한다는 보고를 받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신하들이 요동을 공격하려는 내 계책을 듣지 않더니 이 지경에 이르렀다.”
  
  명나라에서는 다시 요동 군관을 보내 철령위를 세운다고 알렸습니다. 우왕은 최영과만 의논하고 요동을 공격하기로 계책을 정했습니다. 그래도 감히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사냥한다는 핑계로 서쪽 해주로 행차했습니다.
  
  4월에 우왕은 봉주(鳳州)에 머물면서 이성계에게 말했습니다.
  “과인이 요동을 공격하고자 하니 경들은 힘을 다해주오.”
  
  이성계가 아뢰었습니다.
  “지금 군사를 내는 일은 네 가지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할 수 없고, 둘째로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킬 수 없으며, 셋째로 온 나라를 들어 멀리 정벌을 나가면 왜적이 그 빈틈을 노릴 것이고, 넷째로 지금 한창 덥고 비가 올 때여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이 전염병을 앓을 것입니다.”
  
  이성계는 물러나와 최영에게 내일 이렇게 다시 아뢰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최영은 그러마고 했으나, 밤에 다시 들어가서 딴 소리는 들을 것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튿날 우왕이 이성계에게 말했습니다.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 없소.”
  “전하께서 꼭 큰 계책을 이루고자 하신다면 서경(西京)에 행차를 머무르셨다가 가을에 군사를 내소서. 곡식이 들판을 덮어 대(大)부대가 먹기에 넉넉할 것이니, 북을 치면서 행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군사를 낼 시기가 아닙니다. 비록 요동성 하나를 함락시키더라도, 비가 한창 내리니 군대가 전진할 수도 퇴각할 수도 없습니다. 군대가 지치고 군량이 떨어지면 화(禍)만 재촉할 뿐입니다.”
  
  “경은 이자송을 보지 못했소?”
  “이자송은 비록 죽었으나 훌륭한 이름을 후세에 남겼습니다. 신들은 비록 살아 있으나 이미 계책을 잘못 썼으니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우왕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성계가 물러나와 울고 있자, 휘하 군사가 말했습니다.
  
  “공(公)은 어찌 이다지도 슬퍼하십니까?”
  “백성의 재앙이 이제 시작된다.”
  
  우왕은 평양에 머물면서 여러 도의 군사를 독려하고 징발해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들었습니다. 또 중들을 징발해 군사로 삼았습니다. 최영을 8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았습니다. 좌군과 우군이 모두 5만여 명이니, 무리가 10만이나 되었습니다.
  
  군사가 출동하려 하는데 우왕은 술에 취해 해가 늦도록 일어나지 않아 장수들이 출발 신고도 하지 못했습니다. 술이 깬 뒤에는 석포(石浦)에서 배를 띄우고 놀다가 저녁때가 돼서야 돌아와 장수들에게 술을 마시게 했습니다.
  
  각 부대가 평양을 출발하는데, 최영이 아뢰었습니다.
  “지금 대부대가 길을 떠나는데, 열흘이나 한 달만 지체해도 큰 일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가서 감독해야겠습니다.”
  
  우왕은 함께 정사(政事)를 볼 사람이 없다며 말렸고, 최영이 굳이 청하자 우왕은 자신도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변방에서 와서 말했습니다.
  “요사이 요동 군사가 모두 오랑캐 정벌에 갔기 때문에 성 안에는 군사책임자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대부대가 도착하면 싸우지 않고도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최영이 매우 기뻐해 그 사람에게 물품을 잔뜩 주었습니다.
  우왕은 명나라의 홍무(洪武) 연호(年號)를 그만 쓰도록 하고,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원나라식 옷을 입게 했습니다.
  
  늘 대동강(大同江)에 나가 부벽루(浮碧樓)에서 원나라 음악을 듣고 몸소 호적(胡笛)을 불며 즐기느라 돌아올 줄을 몰랐습니다. 나가서 놀 때는 원나라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광대들에게 갖가지 재주를 피우게 했습니다. 최영은 날마다 군사를 거느리고 드나들면서 피리를 불었습니다.
  
  
   
 
  이재황/실록연구가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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