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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9>

道雨 2008. 12. 12. 11:48

조선왕조실록과 놀다 <19>
  임금 자리를 공손히 내놓은 ‘恭讓’王
  2001-12-27 오전 10:17:53

 

역성혁명이 일어났다고는 해도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꼭 바꿔야 할 부분, 즉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단 그대로 놔두는 것이 초기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더욱 효과적인지도 모르지요. 또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꾸기는 시간적으로도 어렵지 않겠어요?
  
  태조―이제 왕위에 올랐으니 이렇게 바꿔 부르겠습니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나중에 가서 바꾸게 되지만, 나라 이름을 그대로 고려라 하고 의장, 법제를 그대로 따르도록 즉위 교서에 못박았습니다.
  
  임금이 됐다고 막바로 옥좌에 앉는 것이 스스로 낯설어서인지 아니면 신하들이 낯설어할까봐서인지, 처음 열흘 동안은 서서 신하들의 조회를 받았습니다.
  
  도성은 장악했지만 혹시 있을지 모를 지방의 동요를 막기 위해 개성부 소윤 함부림을 경상 전라 양광도에, 문하부 참찬 최영지(崔永沚)를 서북면에 보내 지방을 다독거리는 한편 각 고을 수령과 유학(儒學) 교수관(敎授官), 역승(驛丞) 등 일선 실무자들은 그대로 유임시켰습니다. 각 도에 도지사 격인 안렴사들을 내려보낸 것은 그로부터 두어 달이 지난 뒤였습니다.
  
  반면 핵심 부분에서는 즉위 이튿날 종친과 대신에게 각 도의 군사를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최측근인 전 정당문학 정도전에게 도평의사사 기밀 업무와 상서사의 일 처리에도 참여케 하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도평의사사는 나라의 주요 업무를 의논하는 곳이고, 상서사는 인사를 담당한 곳이어서 중요성이 컸지요.
  
  또 백관에게 전 왕조의 정령(政令), 법제의 장단점과 변천해온 내력의 세목을 상세히 적어 보고하게 하고 대간과 6조에 인재를 추천토록 해서 새 왕조의 기틀 정비에도 나섰습니다. 4품 이하 6품 이상의 전직 관리를 한 사람이 세 명씩을 추천케 했습니다.
  
  사헌부에서는 나라를 처음 세우고 유념해야 할 일로 ①기강을 세우고 ②상벌을 분명히 하며 ③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며 ④바른말(直言)을 받아들이며 ⑤헐뜯는 말을 근절하며 ⑥안일과 욕망을 경계하며 ⑦절약과 검소를 숭상하며 ⑧내시를 물리치며 ⑨중을 도태시키며 ⑩궁궐을 엄중히 지키는 일 등 열 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임금은 모두 허락했지만 내시를 물리치고 중을 도태시키는 일은 갑자기 시행할 수 없다며 보류시켰습니다.
  
  그러나 왕조가 바뀌었으니 고려 왕실을 포함한 구세력을 몰아내는 작업은 쿠데타 세력이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사헌부는 개국 직후 왕씨 일족을 지방에 내쫓자고 청했습니다. 임금은 왕씨들을 강화와 거제(巨濟)에 나누어 안치하게 하되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 부자와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 3부자만은 제외하게 했습니다. 왕승 부자는 나라에 공로가 있고 공양왕의 아우인 왕우와 그 아들들은 공양왕을 대신해 고려 왕조의 제사를 받들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상(商)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 후손 가운데 미자(微子)를 골라 송(宋)나라를 주어 명맥을 잇게 한 고사를 본뜬 것이겠지요. 왕우의 아들인 정강군(定康君) 왕조와 왕관(王琯)은 나중에 외가 성을 따라 노(盧)씨로 성을 갈도록 하고 각기 상장군, 대장군에 임명합니다.
  
  아무튼 곧 이어 발표된 즉위 교서에서는 이를 구체화해, 왕우에게는 기내(畿內)의 마전군(麻田郡)을 주고 귀의군(歸義君)으로 봉해 제사를 받들도록 명시했습니다. 후속 조치로 고려 태조의 주상(鑄像)을 마전군으로 옮겨 모시고 때마다 제사지내게 했습니다.
  
  그 나머지 자손들은 지방의 편리한 곳에 살게 하고 그 처자와 종들은 전처럼 한곳에 모여 살게 하며, 해당 지역 관청에서 힘써 구휼해 떠돌아다니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은 공양군(恭讓君)으로 내려 봉해 동해안 간성군(杆城郡)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공손히 임금 자리를 내주었다’는 치욕적인 이름입니다.
  
  그 아우 왕우의 귀의군이라는 이름도 ‘의(義)에 귀순했다’ 즉 ‘쿠데타 세력에 항복했다’는 의미겠지요. 왕대비 안(安)씨도 의화궁주(義和宮主)로 격을 떨어뜨려 봉했습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영복군(永福君) 왕격(王鬲)이 돌아오자 화령부에 안치했습니다.
  
  그러고는 이들의 노비를 제한했습니다. 사헌부가 지적한 내용에 따르면 고려의 종친과 귀족 가운데는 노비를 1천여 명까지 거느린 자도 있으며 이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도성과 귀양지를 왕래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고려 때 각 지방의 역자(驛子), 진척(津尺)과 부곡(部曲) 사람들은 모두 고려 태조 때에 명령을 거역한 사람들이어서 천역(賤役)에 종사하게 했다는 선례를 들어 설득했습니다.
  
  임금은 고려의 종친과 정2품 이상 관원에게는 노비 20 명을 주고 그 이하의 관원에게는 노비 10 명을 준 뒤 나머지는 나라에 소속시키도록 했습니다. 이것도 처음에는 처가 쪽 노비는 포함시키지 않았다가, 사헌부에서 불합리하다고 지적하자 처가 쪽 노비도 제한 대상에 추가로 포함시켰습니다.

   
 
  이재황/실록연구가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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