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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 조선 제 4대왕 세종의 비

道雨 2008. 11. 18. 18:23

 

* 엊그제 KBS드라마로 방영되었던 '대왕 세종'이 막을 내렸다. 한글(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고난을 많이 담았는데, 극 중에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의 역할이 인상적이라 자료를 찾아보았다.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 조선 제4대 왕 세종(第四代世宗)의 비

                          

                         


왕비를 바라지도 않았던 심씨



조선 제 4대 왕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는, 양주의 명문 청송 심씨가 심온(靑松 沈氏家 沈溫)의 딸로, 1395년(대조 4) 9월에 태어났다.

아버지 심온은 조선 건국에 참여했던 개국공신으로, 세종 즉위 초, 영의정에 오르게 되며, 이미 심씨의 숙부도 태조의 딸 경선공주(慶善公主)와 혼인한 부마(駙馬 : 임금의 사위)로서 왕실과 沈氏家는 밀접한 관계였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심씨는 1408년(태종8), 당시 태종의 3남 충녕군(忠寧君)이던 세종과 가례를 올려 빈(嬪)이 되었고, 경숙옹주(敬淑翁主)에 봉해졌다. 혼례 때 심씨의 나이 열네 살이고, 충녕군은 열두 살이었다.


충녕군 세종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1397년(태조6) 4월에 태어났고, 1408년(태종8년) 충녕군에 봉해졌고, 1412년(태종12)에 충녕대군으로 진봉되었다.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맏아들 양녕대군이었으나,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 탓으로 엄격한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몰래 궁중을 벗어나 기생 또는 남의 첩실과 놀아났고, 사냥·풍류생활 등을 즐겨 자주 태종의 화를 돋우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부왕인 태종의 걱정은 물론, 엄격한 유학자들에게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태종의 수차례에 걸친 훈계와 심한 벌도 소용이 없었다.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해 놓은 강력한 왕권을 이어받아 안정된 정치를 펼치기에는 양녕대군은 부적합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태종의 3남 충녕군과 혼인한 심씨는 왕비가 될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더욱이 심씨는 개국공신인 시어머니 원경왕후 민씨의 비극을 잘 알고 있었다. 권력에 연루되어, 민씨의 동생 4형제가 비참하게 죽은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왕비의 자리도 결코 행복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있었다.


1418년 4월, 마침내 태종의 마음이 양녕대군에게서 떠났음을 간파한 신하들이 주청했다. “전하, 세자를 폐하시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시옵소서. 충녕대군 도는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 또한 독실하므로, 장차 이 나라의 성군이 되실 것이옵니다.”

태종18년 6월,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심씨 또한 경빈(敬嬪)으로 승격되면서, 심씨와 친정의 운명은 어둠의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친정의 몰락


심씨는 불안했다.

시아버지 태종의 강경한 외척 견제와 아버지 심온의 권력욕이 두려웠다. 이미 시어머니 민씨 집안의 비참한 몰락을 지켜보았던 심씨이었기에, 제발 아버지가 신중히 처신해 주기를 바랐다.


1418년 8월 충녕대군이 제4대 왕으로 즉위하고, 심씨가 왕비에 오르면서, 아버지 심온이 영의정에 올랐다.

결정적으로 상왕 태종의 비위를 거스르게 한 것은,  심온이 명나라 사은사로 가게 되었을 때, 서울 장안이 떠들썩할 정도로 위세를 당당히 과시하고 떠난 일이었다.

상왕 태종은 그의 부인 민씨 가문에 꽂았던 외척 제거의 비수를, 며느리 심씨 가문으로 겨냥했다.

상왕 태종은, 세종이 경복궁을 지키는 금위군(禁衛軍)의 군사를 나누어 상왕의 거처인 수강궁과 경복궁을 지키게 했는데, 심온의 동생 심정이 나라의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상왕인 태종이 처리한다고 불평한 것을 빌미로 심씨 가문을 공격하게 되었고, 심온이 이 사건의 수괴로 지목된 것이다.


상왕 태종의 의도를 알아차린 신하들에 의해, 사은사로 갔다가 명나라에서 귀환하던 심씨의 아버지 심온은 명나라 국경을 넘어오자마자 압송되어, 수원에서 폄출(貶黜)되고, 어명을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물론 심온의 동생 심정도 이미 숨졌고, 심씨의 어머니 안씨는 관노비(官奴婢)로 전락했다. 세종의 비 소헌왕후 심씨는 친정의 몰락 과정에 속수무책이었다.

세종 또한 상왕 태종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 국왕으로 힘을 못 쓰는 판국이었다. 심씨의 아버지 심온이 억울하게 죽었지만, 그 자신도 실책이 컸었다.

태종은 부인 민씨의 친정을 멸문시키면서까지 외척의 발호를 막았다. 심온의 죽음은, 태종의 외척에 대한 강경 대응의 의지를 망각한 대가로서, 심온 자신도 자제할 줄 모르는 권력은 자멸임을 알았어야 했다.



폐비의 위기에서 살아난 심씨


한편, 심온을 제거했던 신하들은 심씨를 향해 공세를 폈다. 이들의 두려움은 상왕 태종이 세상을 떠나면 자신들에게 심씨의 복수가 실행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심씨의 폐출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상왕 태종은 이를 거부했다. 그 이유는 내조의 공을 인정받은 심씨가 많은 자손을 생산했고, 세종과도 금실이 좋다는 것이었다.

이미 태종은 그의 후비 원경왕후 민씨의 동생 네 명을 죽였지만, 막상 민씨만은 왕비에서 폐출하지 않았듯이,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도, 그녀의 아버지와 숙부는 죽였지만, 왕비 지위만은 박탈하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은 그대신 왕권 강화의 필요상 외척세력의 견제를 위한 제도적 장치의 일환으로 후궁제도를 법제화했다. 바로 절대 부권주의의 합법적인 일부다처 제도였다. 태종 자신도 그러했듯이, 왕에게는 왕비 이외의 여러 여인들과 또 자손들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아들 세종의 후궁으로 상호군 조뇌의 딸을 의정궁주로, 이운로의 딸을 혜순궁주로, 최사의 딸을 명의궁주로, 박의동의 누이를 장의궁주로 봉하였다. 이 궁주들은 세종 10년, 내명부(內命婦 : 궁중에서 품계를 가진 女官으로 빈 · 귀인 · 소의 · 숙의 · 소용 · 숙용 · 소원 · 숙원 등 후궁의 품계)의 정비에 따라 모두 귀인으로 바뀌었다.


품계는 왕의 총애, 즉 승은(承恩 : 임금의 총애를 받아 밤에 모시는 것)을 어느 정도 받았는지, 자녀를 생산했는지, 자녀 중에 왕자가 있는지, 그 왕자가 세자가 되었는지의 여부에 의해 결정되었다.

자녀를 총 22명을 둔 세종은, 8남 2녀를 둔 정비 심씨 외, 5명의 후궁에게서 10남 2녀를 두었는데, 후궁 중에는 내자시(內資寺 : 대궐에서 쓰는 식품 · 직조 · 내연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아)의 여종이었던 신빈 김씨처럼 궁녀 출신도 있었다.

태종의 후궁제도의 법제화에 따르면, 후궁은 양반 가문에서만 간택하도록 하였으나, 셋째 후궁부터는 출신 여부와 상관없도록 하였는데, 이는 국왕의 선택권을 확대 시켜주는 한편, 궁녀들에게도 적게나마 희망을 주려는 정치적 의도도 내포하고 있었다.


세종이 많은 후궁을 거느렸음에도 세종의 정비 심씨는 투기(妬忌 : 질하고 시기함)하지 않았다. 후덕했던 심씨가 후궁이나 그 소생들을 박대하지 않고 한동기처럼 후대해줌에, 그 어느 임금보다 호색가였던 세종의 치세(治世)에 있어 내명부에 따른 분란은 없었다.

그렇지만 후궁들의 동향에 무감각한 심씨는 아니었다. 심씨는 궁중 곳곳에 사람을 심어, 그 후궁들의 동태와 왕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있었다.


심씨는 자신이 낳은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이 여자문제가 복잡하다는 사실을 유모를 통해 듣고 세종에게 전하여 다스렸으며, 다른 후궁들과 왕자들도 이런 식으로 관리했다.

이처럼 궐내의 일을 깔끔하게 주관한 심씨는, 왕의 배우자로서 대통을 잇는 자식을 많이 생산했고, 궁궐의 마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 나갔던 것이다.

아버지와 숙부가 죽고 어머니는 관노비가 되어 버린 참담한 비통을 가슴에 묻은 채, 폐비의 위기까지 이르렀던 심씨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슬픔을 인자한 미소로 베푼 후덕한 처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썽 많은 자손들을 잘 다스린 심씨


후궁들에게 투기하지 않고, 모든 자녀들에도 인자하였던 심씨는, 후덕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자손들에게는 연이어 우환이 터졌다.

세자빈을 두 차례나 폐출시켜 내쫓게 된 아픔을 겪은데다가, 셋째 세자빈은 귀한 손자를 생산한 다음 날 세상을 떠나버렸고, 넷째 임영대군과 여덟째 영응대군(永膺大君)의 부인도 병 때문에 내쫓아야 했다. 이때는 병에 걸리는 것도 칠거지악에 해당되었던 것이다.


1427년, 첫째 세자 향(珦)이 열네 살 되던 해, 세자보다 네 살 많은 김오문(金五文)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였는데, 세자빈 김씨는 태종의 후궁인 명빈의 조카로서, 왕가와도 인연이 있는 집안 출신이었으므로, 심씨는 내심 무난하다고 안심했다.

그러나 세자 향(珦 : 훗날문종)은 학문은 좋았으나 여색은 그다지 즐기지 않았는지, 부인 김씨와 잘 어울리지 않았고, 오히려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낸 중전 심씨의 시비 효동 · 덕금을 더 가까이 했다.


결국 세자빈 휘빈 김씨는 혼인 3년 만에 남편의 사랑을 되돌리겠다고 비방을 쓰게 되는데, 예컨대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 뒷 굽을 잘라다가 불태워 술에 타 마시게 한다든지, 봄에 교접하는 뱀을 잡아 가루를 내어 먹게 한다든지, 미초라는 풀을 먹고 자란 나비를 말려서 차고 다니기도 해보고, 붉은 박쥐 가루를 써보기도 하는 등, 세자빈의 체면도 망각한 채 세자 몰래 별별 민간 비방을 다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세자의 사랑을 얻기 위한 이런 해괴한 짓들이 시어머니 심씨의 귀에 들어가, 세자빈 김씨는 국모의 자질이 없다는 이유로 폐출되었는데, 색을 왕성히 밝혔다는 소문도 있었다.


김씨를 축출한지 이틀 만에, 세종과 소헌왕후는 금혼령(禁婚令 : 세자 · 세손의 비를 간택하는 동안에 서민의 혼인을 금하던 일)을 내리고, 3개월 만에 세자 향과 동갑이었던, 봉여(奉礪)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세자 향은 휘빈 김씨가 축출된 것에 대해 자신도 책임이 있다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봉씨에게는 애정을 가지려고 하였는데, 세자가 봉씨에게 미처 애정을 쏟기도 전에, 예조(禮曹)에서 세자도 후궁을 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제도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여자들이 끼어들게 된 것이다.


1430년(세종12) 세자의 후궁을 정2품 양제, 정3품 양원, 정4품 승휘, 정5품 소훈 등으로

법제화했다. 세종과 소헌왕후는 며느리 김씨를 폐출시킨 바도 있고, 세자의 나이가 장성함에도 후사(後嗣 : 대를 잇는 아들)를 두지 못하게 되자, 동궁(東宮 : 왕세자)도 후궁을 들일 수 있도록 법제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은 권전(權專)의 딸(훗날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 정갑손의 딸 · 홍심의 딸을 세자의 후궁으로 봉했다.


세자는 새로 맞아들인 후궁들에게 마음이 쏠렸고, 반면 세자빈 봉씨는 졸지에 과부 아닌 독수공방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혹시나 세자가 밤늦게라도 찾아올지 모른다고 고대하며 긴긴밤을 시비와 함께 뜬눈으로 지새웠다.

봉씨는 내심 외쳤다.

“여인을 맞이해 놓고 남자 역할을 다하지 못함은 여인에 대한 학대요, 고문이다!”

봉씨는 당당하고 당돌했다. 슬픔을 감추며 해괴한 비방을 썼다가 폐출당한 김씨와는 달랐다.

봉씨가 세자와 냉전 상태에 돌입했을 때, 세종과 소헌왕후는 몇 차례 불러서 타일러 보았지만, 자부심이 대단했던 봉씨는 만만치 않았다.

그러던 차 봉씨는 시비와 묘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 조선 왕실 최초의 레즈비언(lesbian : 여성간의 동성애) 스캔들, 즉 새로운 사랑의 즐거움을 알게 된 봉씨는, 저녁마다 시비들을 불러들여 주연을 베풀고, 취흥에 따라 가무까지 즐기며 시름을 달랬다.

 

하지만 세자의 사랑을 두고 후궁들과 실력 대결을 하는 상황에서, 봉씨의 이런 행동은 자기 무덤을 파는 짓이었다. 봉씨의 유희 소문은 마침내 세종과 소헌왕후에게까지 알려졌고, 한동안 망설이던 세종은 1437년(세종 19), 마침내 두번째 세자빈 봉씨를 폐출시켰다. 결국 봉씨는 동성연애자로 낙인 찍혀 축출되었지만, 더 큰 축출 이유는 후손을 생산치 못한 탓일 것이다. 이른바 유교적 칠거지악인 자녀를 생산 못한 죄목이었다.


봉씨의 동성연애가 발각됨에 따라서 다른 궁녀들의 동성연애도 탄로가 났다. 그러나 굶주린 자에게는 먹을거리가 필요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했던가.

궁녀들 사이에는 ‘대식(對食)’이라 하여 동성연애가 성행했다. 궁녀들은 통상 한방에 소속이 다른 두 여인들이 함께 거처하였는데, 이들은 서로 ‘방동무’라 부르며, 엉덩이에 ‘붕(朋 : 벗)’이라는 글자나 남근상(男根像)을 문신하고는 동성연애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특히 임금에게 승은(承恩 : 임금의 총애를 받아 모시는 것)을 입지 못한 궁녀들은 ‘희망이 절벽’인 궁궐 생활에서 이런 식으로라도 원초적 본능을 달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종은 동성연애 궁녀들에게 70대 또는 100대의 곤장을 치는 벌을 내리기도 했지만, 근절되지 않자, 「삼강행실도」를 배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궁녀들의 갇힌 생활양식이, 마구 분출하는 본능을 정상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또한 미봉책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본능’을 인위적으로 강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권력계층은 자기들 맘대로 여자를 즐기면서, 궁녀들의 본능을 단속하는 것은 공평치 못한 횡포요, 아이러니인 셈이었다.


세종과 소헌왕후가 맞아들인 세자 향(珦)의 후궁들 중에 세자빈으로 승격된 권씨는, 두 명의 공주를 낳은 뒤, 1441년(세종23) 7월, 드디어 왕세손을 생산했다.

폐출시킨 첫 세자빈 김씨와 혼인한 지 14년, 역시 폐출된 둘째 부인 봉씨를 거친 후, 권씨와의 사이에서 늦게나마 세자가 아들을 얻게 되자, 세종은 왕세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대사면령(大赦免令)을 즉시 내렸다.

그러나 교지(敎旨)를 다 읽자마자 공교롭게도 전상(殿上)을 밝히던 촉대(촉臺)가 땅에 떨어져 버렸다.

 “이 무슨 해괴한 징조인가?”

그 다음 날 세자빈 권씨는 산후 조리를 잘못하여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 태어난 아이가 비운의 임금 단종(端宗)이며, 죽은 권씨는 9년 후인 1450년, 세자 향 문종이 즉위한 뒤 현덕왕후(顯德王后)로 추존되었다.


호색가 아버지 세종과는 달리 문종은 그다지 여색을 좋아하지 않아, 어린 외아들 단종만 바라보며 혼자 지냈다. 세종이 비록 여색을 좋아하긴 했으나 찬란한 업적들을 남기게 된 배경에는 부인 심씨의 내조가 컸음을 세종도 잘 알고 있었다.

1463년(세종18) 10월, 세종은 사정전(思政殿)으로 나아가 부인 심씨에 대해 칭송했다.

“우리 조정 아래로 가법이 지극히 바로잡혔고, 내 몸에 미쳐서도 중궁의 내조에 힘입었다. 중궁은 성품이 매우 유순하고 언행이 훌륭하여 투기 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태종께서 매양 나뭇가지가 늘어져 아래에까지 미치는 덕이 있다고 칭찬하였었다.”

자신을 희생하여 부덕(婦德)을 갖추었던 심씨에 대해 세종은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눈물로 평생을 보낸 심씨


세종의 정비 심씨는, 나이 열네 살에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군 세종과 혼인하여, 마음에도 없었던 왕비가 됨으로써 아버지와 숙부를 잃게 되었고, 어머니는 관노비로 전락되는 비극을 겪었으며, 아들의 후궁들 문제까지 속을 끓였던 한평생이었다.

그야말로 눈물과 한숨의 파란 많은 일생을 보낸 소헌왕후 심씨는, 1444년(세종 26)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이듬해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마저 스무 살 안팎의 나이로 요절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1422년 시아버지 태종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어머니 안씨를 관노비에서 해방시켜 준 것이 심씨로서는 그나마 친정에 속죄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심씨는 두 아들마저 잇따라 세상을 버리자, 몸져 누워 있다가 결국 1년 만인 1446년(세종 28) 3월, 둘째아들 수양대군(세조)의 잠저(潛邸)에서 춘추 52세로 승하하였다.

세종도 심씨 별세 4년 후인 1450년 2월, 여덟째 아들 영응대군의 별궁에서 보령 54세로 승하하였다. 이들은 현재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 영릉(英陵)에 합장되어 누워있다.


평생의 한을 불교를 통해 씻어보려 했던 심씨, 그녀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세종은 궁궐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세웠다.

첫째 아들 문종도 임금이 된 후, 평생을 눈물 속에서 살았던 어머니 심씨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외할아버지 심온을 신원(伸寃 : 원통한 일을 푸는 것)하여 드렸다. 심씨가 아무런 정치적 의지를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행을 당했던 것은, 조선이 족벌왕조국가 구축 과정에서 권력 무게의 핵(核 : 중심)은 분산 또는 분배되어질 수 없다는, 태종의 확고한 의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세종 즉위 이전부터, 태종은 외척 세력을 잔혹하게 제거하고, 공신들도 대대적으로 숙청하여 안정된 통치 기반을 세종에게 넘겨주었다.

왕권을 계승한 세종은 많은 여성을 편력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공식적으로만 여섯 명의 후궁들을 거느리고, 무려 22명의 자녀를 두었던 대단한 호색가였다.

조선의 역대 왕 중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긴 성군 세종대왕이 있기까지의 이면에는, 한과 눈물로 한 세상을 보낸 왕비 소헌왕후 심씨의 내조가 있었던 것이다.

세종이 받았던 화려한 조명(spot light) 뒤에는, 한 여인의 슬픔과 인내와 희생이 받쳐주고 있었던 것이다.



@ 세종의 자녀들


* 생년 : 1397년 ~ 1450년

* 재위 : 1418년(20세) ∼1450년(52세)


장녀(적1녀-1412년生) : 정소공주 - 소헌왕후生

장남(적1남-1414년生) : 문종 향 - 소헌왕후生

2녀(적2녀-1415년生) : 정의공주 - 소헌왕후生

2남(적2남-1417년生) : 수양대군(세조) - 소헌왕후生

3남(적3남-1418년生) : 안평대군 - 소헌왕후生

   - 1418년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조선 4대왕 세종 즉위

   - 같은 해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되어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 사사

4남(적4남-1420년生) : 임영대군 - 소헌왕후生

   - 조선 3대왕 태종 사망, 세종 친정 시작

3녀(서1녀-1424년生) : 정현옹주 - 상침송씨生

5남(적5남-1425년生) : 광평대군 여 - 소헌왕후生

6남(서1남-1425년生) : 화의군 영 - 영빈강씨生

7남(적6남-1426년生) : 금성대군 유 - 소헌왕후生

8남(서2남-1427년生) : 계양군 증 - 신빈김씨生

9남(적7남-1427년生) : 평원대군 임 - 소헌왕후生

10남(서3남-1428년生) : 의창군 공 - 신빈김씨生

11남(서4남-1429년生) : 한남군 어 - 혜빈양씨生

12남(서5남-1430년生) : 밀산군 침 - 신빈김씨生

6녀(서2녀-1430년生) : 옹주 - 사기차씨生

13남(서6남-1431년生) : 수춘군 현 - 혜빈양씨生

14남(서7남-1431년生) : 익현군 운 - 신빈김씨生

15남(적8남-1434년生) : 영응대군 염 - 소헌왕후生

16남(서8남-1434년生) : 영풍군 전 - 혜빈양씨生

17남(서9남-1435년生) : 영해군 당 - 신빈김씨生

7녀(서3녀-1438년生) : 정안옹주 - 숙원이씨生

18남(서10남-1439년生) : 담양군 거 - 신빈김씨生



세종이 즉위하기 전에는 충녕대군에게는 오직 부인 소헌왕후 밖에는 없었고, 둘 사이의 금슬도 연달아 아이들을 내리 5명을 낳는 등 아주 좋았습니다.

양녕대군이 폐세자 되고, 충녕대군이 세자가 된 후, 3개월 만에 태종의 양위로 인해 세종이 조선 4대 왕으로 등극하게 되면서, 평범하고 단란했던 두 부부는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을 겪게 되지요.

 

세종에게도, 소헌왕후에게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1419년, 세종 즉위년에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과 삼촌인 심정이 사사되고,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세종의 장인이자 정치적 스승이었던 심온의 집안이, 외척을 극도로 경계하던 태종에 의해서 억울하게 옥사를 당해 죽게 된 후, 아무래도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는 예전과 같지 않은 어려움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 사건 후로, 왕실의 번창을 위해서 아버지 태종에 의해 들어온 여러 명의 후궁들까지 생겼으니, 아무리 세종이 소헌왕후를 지극하게 사랑한다고 해도 당시 상황이 소헌왕후에게만 총애를 쏟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들어온 후궁들이 모두 명문대가에서 간택해 들어온 딸들이었으니 무시할 수는 없었거든요.

그러다가 아버지 태종이 죽고, 세종이 친정을 시작한 후로는 이제 세종의 세상이 왔으니, 마음도 여유도 조금은 생겼을 것이니, 간택 후궁들 외에도 여러 명의 승은 후궁들을 두어서 열심히 왕실의 번창을 위해서 노력했을 겁니다.


1419년부터 5년간의 소헌왕후의 출산 공백은, 아마도 당시 심온 대감의 사사 사건과 맞물려서 들어왔던 후궁들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당시 심온의 옥사를 꾸몄던 조정 중신들이 안그래도 꼬투리를 잡아서 소헌왕후를 내치려고 벼르고 있던 차에, 세종이 지극한 총애를 소헌왕후에게만 쏟는다면 더욱 불안감을 느끼고 설칠까봐 염려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1427년의 7년은 소헌왕후의 나이가 30대 중반이었으니 그동안 계속되어온 임신과 출산으로 몸이 많이 상했을 것입니다. 자식을 9명이나 낳았으니 힘들지 않았을 까요..

아무리 나이가 들고 거듭된 임신과 출산으로 여자로서의 매력은 떨어졌을지라도, 소헌왕후는 여전히 세종에게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주는 조강지처였고, 그 사실은 소헌왕후가 죽고 나서도 변하지 않은 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일반인들이 아니라 왕실이라는 특수한 세계의 사람들이니, 1427년 그때쯤이면 소헌왕후가 잠자리 시중은 다른 젊은 후궁들에게 양보했을 것도 같습니다.

아니더라도 세종은 여색을 상당히 즐긴 왕이었으므로 스스로 젊고 예쁜 후궁들을 찾았을 수도 있구요.


소헌왕후는 조선왕조를 통틀어서 가장 내명부를 잘 다스리고, 왕에게 가장 신뢰와 사랑을 많이 받은 왕비로 뽑힙니다.

‘월인천강지곡’ 아시죠

세종이 소헌왕후 죽고나서 소헌왕후를 기리면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소헌왕후가 세종보다 5년 먼저 죽었는데, 세종이 자신이 죽을 때 꼭 소헌왕후와 함께 묻어달라고 하며, 조선 최초의 합장릉을 만들었죠.

세종이 아무리 후궁들이 많았어도, 세종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조강지처 소헌왕후입니다.

후세의 사가들도 오늘날의 위대한 성군 세종을 만든 1등공신이, 후덕하고 아름다운 성품의 소헌왕후라고 평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영릉 (英陵) 

   

                      - 조선왕조 제4대 임금인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沈氏)의 능.

                      - 사적 제195호.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조선왕조 최초의 합장릉이다.

원래 영릉은 소헌왕후가 죽은 1446년(세종 28) 광주(廣州) 헌릉 서쪽에 조성하여 그 우실(右室)을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 왕이 죽자 합장했다.

 

세조 때 이 영릉이 불길하다는 의논이 대두했으나 서거정(徐居正)이 "천장(遷葬)함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자가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고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 여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 세조의 유언으로 병석과 석실의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灰隔)으로 합장했다. 능 앞에 혼유석 2좌를 놓아 양위(兩位)임을 표시했을 뿐, 상설제도는 단릉(單陵)과 같다.


광릉(光陵)에는 동자석주(童子石柱)에 12지신상을 표시했는데, 이보다 1년 후에 천릉한 영릉에서는 12지(支)를 문자로 기록했고, 그 이후에는 난간에 24방위까지 넣은 새로운 왕릉상설제도를 이루었다.

 

광주에 세워졌던 신도비(神道碑)는 능을 옮길 때 땅에 묻었던 것을 1974년에 발굴해 세종대왕기념관 앞뜰에 옮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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