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 자랑(계월향) | |
조선의 의기(義妓), 계월향 논개는 유명해져 큼직한 무덤에 사당을 두 개나 지어 받았는데, 일개 노류장화의 기생으로 적장을 껴안고 순절했다는 사실때문아닙니까? 그렇지만 논개는 기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점은 조금 시정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진짜 기생으로 적장을 죽이고 나라를 구한 제 애인 계월향은 논개 못지않은 추앙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김 할머니는 또 기름 냄새가 진동하던 대원각을 일면식도 없는 법정(法頂) 스님에게 시주해 일약 부처님의 자비를 전하는 도량 ‘길상사’로 탈바꿈시킨 일도 있었습니다. 김할머니는 전직이 기생으로 스무 살에 백석을 만나 ‘자야(子夜)’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3년 간을 같이 살았다 합니다. 옛 말에 ‘정의 문을 열면 마음은 괴로운 가운데 행복하고, 정의 문을 닫으면 마음은 한가한 가운데 외롭다’라고 했으니 꼭 그 일을 두고 한 말처럼 들립니다. 아니 지금 뭐라고 했어요? 장애인이라고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몸이 유연하여 높은 나무도 훨훨 날아다니며 선조 16년에 당당히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이 되었으나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파직을 당했지요. 정말 열 불이 났지만 장부답게 꾹 참았어요. 고백하건대, 저에게는 만년을 두고 변치 않을 애인이 있었어요. 바로 평양 제일의 명기 계월향인데 우리는 마음으로 굳게 언약을 한 사이였지요. 하지만 어이없게도 평양성이 왜군에게 함락 당해 계월향은 왜장의 술 시중을 들고 있었어요. “졸장부. 서방님은 글을 배운 선비이니 대의가 무엇인지를 알 겁니다. 나는 어차피 왜놈에게 몸을 더럽혀진 계집이니 차라리 나를 죽이고 가세요. 어서요?” 아! 무정하고 야속한 세상, 계월향은 왜군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내 칼에 죽고 싶다며 악을 바락바락 썼어요. “병신, 머저리, 쪼다. 그럼 내가 저 더러운 왜놈의 손에 몸이 찢기어 죽어야 속이 편하겠어요. 이 놈아.” 와! 황당. “아! 천지신명 님이여. 어쩌다가 저런 졸장부를 나에게 보내 주셨나이까. 제 목숨 하나는 아깝지 않으나 왜놈에게 짓밟히는 만 백성은 누가 구원하겠습니까? 주여, 저희 백성을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아 박절하고 원통한 내 신세. 적장을 잃은 왜군은 힘없이 평양성을 내주고는 한양으로 후퇴하였고 저는 훗날 병마절도사로 승진했습니다. 그 러나 계월향없는 내 인생은 너무나 삭막했어요. 사랑의 단절이 가져다 준 상실감은 나날이 고통스러워 오로지 계월향의 명복만을 빌며 세상을 살았어요. |
* 윗 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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