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스크랩] 일제 잔재 사라진 범어사 삼층석탑

道雨 2009. 9. 29. 15:24

 

달라진 동래 범어사 삼층석탑

 

보물 제 250호 범어사 삼층석탑의 기존 모습

일제시대 석탑의 기단이 변형되고, 왜색 난간대가 설치되었다.

 

 

 

 조선총독부 패말

 

 

범어사 경내의 금송

일제 잔재 청산 후 범어사 삼층석탑의 모습

 

 

 '보물 제 250호 범어사 삼층석탑'. 오래 전 신라인에 의해 만들어진 탑 한 기는 한반도의 눈물과 웃음을 바라보며, 천추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왔다.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걸쳐 오늘에 이르기 까지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는 일에 귀 기울이며, 인자하게 우리 곁에 존재해 왔다. 다른 이들의 웃음을 승하고 눈물을 나누는 동안, 이 탑은 자신의 몸에 패망에 역사가 남겨지는 고통을 당했다.

 

  우리에게는 모든 걸 부정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역사인 일제강점기가 있다.

이는 1910년 8월 국권 피탈에서 1945년 8월 광복에 이르기까지 무단통치, 문화통치, 민족 말살 통치라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 정책 하의 치욕스럽고도 고통스러웠던 35년을 말한다. 이 시기에 우리는 역사의 단절과 민족 문화의 왜곡, 정체성의 상실 등을 경험 했다. 그렇기 때문에 패망 역사의 흔적은 오늘날까지 그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보물 제250호 범어사 삼층 석탑'에서도 일제 잔재는 발견된다.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1936년 차상명은 범어사 주지가 된다. 그는 이듬해인 1397년에 중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두 차례에 걸쳐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제를 개최하고, 국방헌금과 위문금을 걷어 납부했다. 이 때 범어사는 전국 31대본산 가운데 경기도 용주사 다음으로 많은 헌납을 하였다. 또한 일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목적과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기 위해 역사 왜곡을 자행 했다.

대웅전 앞마당의 삼층석탑 옆에 조선총독부 표지석을 만들었다. 그리고 원래 난간이 없는 삼층 석탑에 난간을 만들었다. 성을 쌓듯이 쌓는 것이 한국의 전통인데, 끼워 쌓는 방식의 일본식을 택하였다.

친일 행위를 한 주지 차상명 등에 의해, 삼층석탑의 기단이 변형되었고, 왜색 난간대가 설치되었다. 이로 인해 신라인의 예지와 우리 전통 문화가 일제의 흔적 속에 묻히게 되었다.

 

범어사 삼층석탑의 옛 모습 찾기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

 

 

이런 사연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범어사 삼층 석탑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 250호로 지정되어 문화재로써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역사적 성찰과 고찰 없이 '문화재, 보물'과 같은 수식어만을 달아 주었다.

 

지난 달 광복절을 맞이하여, 범어사는 역사 속 과오를 인정하고 바로잡는 일을 진행 하였다. '조선총독부' 표지석을 제거하고, 삼층 석탑 하단 기단부와 난간을 뜯어내었다. 이로 인해 '보물 제 250호 범어사 삼층석탑'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일제 흔적 청산만이 최선인가라는 부정적인 반응과 못 다한 일제 청산을 해내었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무엇이 옳은가는 여전히 풀리지 못한 과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번 범어사 삼층석탑의 일제 잔재 청산은 문화재라는 수식어 아래 예찬만을 하는 풍조에 대한 성찰과 문화재라는 이름표에 걸맞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고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말이 없는 묵묵한 탑 한 기. 그러나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한다. 석조 건축의 아름다움, 선조들의 예지, 치욕스러운 역사 속 교훈…….

그렇다. 문화재는 말이 없지만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문화재라는 거창한 수식어 묻혀 미적인 아름다움만을 바라 볼 것이 아니라, 그 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어 보는 것은 어떨까.

 

 

 

 

 

 

***************************************<문화재청 대학생블로그기자 정하영 2009.9.24>

 

 

2009.8.13 철거에 들어간 난간석

 

 

범어사의 왜색형 건축과 가람배치 변형 등은 1927년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7층 사리보탑을 대웅전 우측의 관음전 자리에 이전하면서 상단영역을 훼손하고 대웅전 전면에 있는 3그루의 금송은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또한 대웅전과 관음전 전면과 보제루 뒤의 일본식 난간대를 비롯한 84미터 난간도 왜식이다.

그리고 천왕문에서 불이문 영역에 있는 우리나라의 소나무를 베어내고 일본 신사주변에 심는 편백나무와 삼나무를 심었다.

일본식 석축 쌓기와 축성법, 전통에 어긋나는 석등을 세웠는데 이번에 금송 세 그루 제거하고 난간은 철거하여 재건축하고 석등은 다시 세울 계획이다

 

1700년에 건립된 보제루는 사방이 트인 개방된 2층 누각으로 누하주를 통해 진입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보제루 사방 벽면에 일본식 벽체가 쳐지고 회벽으로 바뀌어 단청만 빼면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범어사는 민족문화복원 및 중.장기발전계획을 2014년까지 진행하며, 우선 1차 사업으로 2011년까지 50억 원 규모로 진행할 방침이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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