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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돈 아끼려다 일본 손에 넘거간 걸작-몽유도원도

道雨 2009. 9. 29. 15:34

 

돈 아끼려다 일본 손에 넘거간 걸작-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의 꿈속 낙원 그린 안견의 유일한 眞作
1893년 가고시마에서 발견 가져올 기회 놓쳐 日 국보로

 

 조선전기 회화의 금자탑으로 불리는 안견의〈몽유도원도〉.

현실세계와 무릉도원을 그린 네 개의 경군(景群)들이

떨어져 있으면서도 시각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산수화로 시·서·화의 세 가지 예술이 종합적으로 구현된 작품이다.

일본 덴리대가 소장하고 있다

 

 

 

 

 

1447년(세종 29년) 4월 20일 밤 세종대왕의 셋째 왕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1418~1453)은 꿈에 무릉도원(武陵桃源)을 봤다. 당시 문화계의 총수였던 안평대군은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安堅)에게 꿈에 본 정경을 그리게 했고, 그 결과로 태어난 작품이 불후의 명작인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안평대군은 안견의 그림이 완성된 뒤에 스스로 그 경위를 밝히는 제기(題記)를 적고, 신숙주·성삼문·박팽년 등 최고 문사 21명에게 찬시(讚詩)를 짓게 하였다. 이로써 안견의 그림, 안평대군의 글씨, 21명 문사의 시가 어우러졌다. 세종조의 시(詩)·서(書)·화(畵)가 한데 어울려 기념비적인 종합예술품이 탄생한 것이다.

그림을 태어나게 한 안평대군의 꿈은 도가(道家)적인 색채가 짙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영향을 듬뿍 받은 결과임이 제기(題記)에 잘 드러나 있다. 〈

몽유도원도〉는 신라의 솔거(率居), 고려의 이녕(李寧)과 더불어 한국회화사상 3대가(大家)로 불리는 안견의 유일한 진작(眞作)이라는 점에서도 그 가치를 헤아리기 어렵다.

조선시대 회화 가운데 연도가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알려졌으며 동양적 이상향의 구현체였던 〈몽유도원도〉는 얘기의 전개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통상적인 두루마리 그림과 달리 왼편 하단부에서 시작하여 오른편 상단으로 보이지 않는 대각선을 이루며 펼쳐지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다른 어떤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구성이다

 

   그림은 왼편으로부터

           ①현실세계

           ②도원(桃源)의 바깥쪽 입구

           ③도원의 안쪽 입구

           ④도원 등 네 개의 경군(景群)들로 짜여져 있다.

현실세계는 야트막한 야산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도원과 관계되는 세 개의 경군은 환상적인 바위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네 개의 경군들은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시각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원(高遠), 평원(平遠), 심원(深遠) 등 삼원법(三遠法)도 자연스럽게 갖추어져 있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안평대군이 수양대군에게 희생된 계유정난(1453년) 이래 행방이 묘연했다가 1893년 일본의 최남단 가고시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소장자 시마즈 히사시루시(島津久徵)는 가고시마 영주이자 임진왜란 때 출정한 왜장의 후손이다. 1939년 몽유도원도는 일본 국보로 지정됐고, 1950년대 초 덴리대(天理大)가 구입해 소장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덴리대에 넘어가기 전 우리가 이 그림을 가져올 기회를 놓쳤다는 점이다.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재원 박사가 1946~1947년 일본에 갔을 때 <몽유도원도>가 매물로 나왔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수천 달러를 호가하는 가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후 1950년 어떤 골동상이 부산에 가져왔지만 이를 구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꽤 많은 사람이 이 걸작을 보았으면서도 국내에 잡아두지 못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일보/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전 문화재위원장 2009.9.28>

 

 

 

몽유도원도 발문

 

 

 

도원경

 

'진나라 때 무릉에 살던 한 어부가 우연히 산의 작은 구멍을 발견해 들어가니 찬란한 경치가 펼쳐져서 너무나 놀라 실컷 주육으로 대접받고 나온 후 나중 거기서 살기 위해 어부와 많은 사람들이 찾았으나 다시는 찾지 못했다.’
이것이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로 이 글이 뿌리가 되어 ‘도원경’하면 이상향이 되어 왔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로 명필이며 풍류객인 안평대군이 어느날 도원명의 도원경을 찾아드는 꿈을 꾸었다.
그 꿈에 흡사한 지금 서울 세검동의 무계에 터를 잡고 정자를 크게 지어 ‘무계정사’라 이름지었다. (지금은 비록 복개로 흔적도 없지만......)
그리곤 안견에게 꿈에본 도원경을 그리게 했다.
그것이 '몽유도원도’이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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