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은 진정 공부하기를 좋아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대구에서 잠시 공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사회 밑바닥을 전전하며 굶기를 밥 먹듯 했지만 자신의 배고픔보다 동생들의 배고픔을 더 아파했다.
청계천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재단사로서 자신의 처지보다 바로 옆에서 ‘미싱’을 돌리는 여공들의 처지를 더 아파했다. 얼마 안 되는 임금으로 풀빵을 사서 점심을 거르는 여공들에게 나누어주고 정작 본인은 버스 값이 없어 멀고 먼 집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그가 평화시장에서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던 모임 이름이 ‘바보회’였으니 그는 원조 바보인 셈이다.
그는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노동자들의 처우를 조금이라도 개선해보고자 여기저기 호소하고 온몸으로 항거하다가 결국 최후의 선택을 했다.
전태일이 일하던 청계천의 평화시장은 2만명의 노동자를 고용해서 각종 옷을 만들고 있었는데, 1970년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을 조사한 미국의 인권단체는 이렇게 보고했다.
“14~16살의 어린 소녀들이 마룻바닥에 꿇어앉아서 아침 8시에서 밤 11시까지 하루 평균 15시간을 일해야 했다. 노동자들은 한 달에 이틀만 쉴 수 있었다. 할 일이 매우 많을 때는 철야작업까지 했다. 이런 가혹한 노동에 대한 임금은 월 1500원에서 3000원 사이였다. 그들의 하루 임금은 다방 커피 한잔 값이었다.”
저임금의 배후에는 독재가 있었다.
하버드대의 경제학자 대니 로드릭은 독재일수록 임금이 낮고, 민주화와 함께 임금은 상승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을 예로 든다.
실제로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은 노동운동을 극단적으로 탄압하며 자본의 편에 섰다. 초기 노동청장 10명 중 7명이 경찰 간부 출신이었고, 5·16 직후 중앙정보부는 직접 한국노총의 간부를 지명하면서 그 설립을 주도했다.
매사추세츠 공대(MIT)의 경제학자 앨리스 암즈덴도 한국의 고도성장 과정에서 노동이 배제되고 극도의 탄압을 받았음을 지적했다.
“한국의 중앙정보부는 노동 문제에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고임금, 저임금의 구별 없이 노동자는 모두 생명조차 위협받는 탄압을 받고 있었다.”
그 탄압에 온몸으로 맞선 사람이 전태일이었다. 그의 죽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로소 노동 문제에 눈뜨게 만들었으니 그는 진정 시대의 선각자요 순교자였다.
오늘 비정규직이 노동자의 절반에 이르고,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으니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전태일 보기가 부끄럽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
아!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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