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문경란, 유남영, 조국, 그리고 현병철

道雨 2010. 11. 22. 16:01

 

 

 

   문경란, 유남영, 조국, 그리고 현병철 
 
» 손준현 사회부문 선임기자

 

 

그동안 맘고생이 심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9월 초 문경란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을 만난 첫 느낌이었다. 후배 여기자와 함께 문 위원과 점심을 먹는 자리였다.

 

그로부터 50여일이 지난 이달 1일 문 위원은 유남영 상임위원과 함께
동반사퇴했다.

 

9월 문 위원을 만난 날의 취재메모를 뒤졌다. 메모를 살피면서 문 위원이 현병철 위원장한테서 얼마나 인간적 모멸감을 느꼈을지 가늠해봤다.

이제야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문 위원은 ‘현 위원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결심을 한 게 분명했다. 이미 그 메모에 ‘현 위원장의 독단적 운영과 상임위원회 무력화 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문 위원은 그때 “현 위원장이 직원들과 상임위원들을 이간질시키고, 직원들이 상임위원들에게 보고하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또 “현 위원장은 나를 ‘좌파’라고 직원들한테 떠들고 다닌다”고까지 했다. 주변에 물어보니, 어느 누구도 문 전 위원이 좌파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문 위원한테 콕 찍어 물었다, 현 위원장이 왜 그렇게 당신을 싫어하는 것 같으냐고.

“현 위원장이 한나라당 추천으로 온 내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으니까 대놓고 나를 욕하는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문 위원을 만난 며칠 뒤 인권위 직원한테서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그 직원은 “여성이 자기주장을 그렇게 강하게 펴는 것을 보지 못했던 현병철 위원장 같은 인물은 아마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느꼈을 것”이라고 했다. 그 직원은 실제로 현 위원장이 “상임위원들에게 보고하지 말라”는 얘기도 했다고 전했다.

현 위원장이 상임위원회의 힘을 빼려는 시도는 이미 ‘운영규칙 개정안’ 상정 훨씬 전부터 있었다는 점이 뚜렷했다. 합의제 형식으로 운영되는 인권위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도 비교적 뚜렷했다.

 

흔히들 ‘빼빼로데이’라고도 부르는 11월11일 유남영 전 인권위 상임위원을 만났다.

사실 나는 유 전 위원이 사퇴한 직후 인터뷰를 할 수 없겠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유 전 위원은 “현 위원장이 독단적으로 인권위를 운영하고 상임위를 무력화하려 한 것은 맞다”면서도 “인권위가 이렇게 망가진 데 책임을 함께 져야 하는 내가 언론에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건 맞지 않다”며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사퇴 열흘 남짓 지나 만난 유 전 위원은 훨씬 젊어졌다. 청바지를 입은데다 검정과 회색 털실을 섞어 짠 스웨터 위에 가죽재킷을 걸치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좀체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다. 지난 6월 ‘양천경찰서 고문사건’을 발표하던 때도 나직하고 느릿느릿한 말투였다. 그는 남쪽 바닷가에 있는 고찰에서 당분간 지낼 것이라고 했다. 주변의 어느 누구도 유 전 위원을 과격한 좌파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문경란, 유남영 전 위원 생각을 하면서 갑자기 떠오른 말이 ‘인간에 대한 예의’였다. 현병철 인권위원장에게 과연 그런 예의가 있는지 자꾸만 묻게 됐다.

 

또 이명박 대통령은 과연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는지 자꾸만 묻게 됐다. 그래서 조국 위원이 사퇴성명에서 밝힌
내용은 의미심장하다.

 

“원래 인권은 진보와 보수를 넘는 것이고, 국가기구의 장관급 수장으로서의 지도력 역시 진보와 보수를 넘는 것입니다. 인권의식 있고 지도력 있는 보수인사에게 인권위원장직을 맡기는 이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위원장 교체는 반대파에게 밀리는 것이라는 식의 소아병적 조언을 하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지 말고, 인권위법의 정신으로 돌아가 결단을 내리길 희망합니다.”

 

<손준현 사회부문 선임기자 dust@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