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모두가 패자인 현대전

道雨 2010. 12. 9. 16:48

 

 

 

            모두가 패자인 현대전 
공포에 바탕한 오판이 낳는 ‘4세대 전쟁’에 승자는 없어…
피해자 목소리 듣는 민주주의가 전쟁 방지
 

 

 

1914년 8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낙엽이 떨어지기 전에 러시아를 격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세계대전으로 번진 전쟁은 잎이 지고 돋기를 거듭한 1918년 11월에야 끝났다.

 

1951년 5월,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38선을 돌파해도 중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중국은 20만여 병력을 투입해 한국전에 뛰어들어 유엔군에 치명타를 날렸다.

 

2003년 5월,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항공모함 에이브러햄링컨호에서 이라크전 종료를 선언했다. 오판이었다. 지금까지도 내전은 더 심해졌고, 미군 사상자는 계속 발생하고 있다.

 

 

 

 

베트남, 체첸, 헤즈볼라

 

“전쟁에는 실수가 있다.”

중동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부총리가 2006년에 말했다. 정치가도 군인도 사람인 만큼 이런저런 오판을 내린다는 뜻이다.

페레스는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그러나 가장 큰 실수는 전쟁 그 자체다.”

 

연평도 사태 이후, 이명박 대통령은 “몇 배의 화력으로 응징하겠다”고 말했다. 북한이 어떤 공격을 하든 ‘몇 배’로 되돌릴 군사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투다.

실제로 몇배의 화력을 되돌려줄 수도 있겠지만, 위정자들이 원하는 ‘상대의 패퇴’는 결코 이룰 수 없다.

현대전의 특징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을 통한 응징은 단 한 번도 완전히 성공한 적이 없다.

 

 

미국 예비역 대령이자 전쟁학자인 토머스 하메스는 현대전을 ‘4세대 전쟁’이라 부른다.

1세대 전쟁은 근대국가가 상비군을 확립한 19세기의 전쟁이다. 기계화된 화력을 집중시킨 제1차 세계대전이 2세대 전쟁이라면, 전략지역에 대한 전격 침략을 도모한 제2차 세계대전이 3세대 전쟁이다.

1~3세대 전쟁의 목표는 적의 군사력을 분쇄하고 군사력 재창출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승자와 패자가 명확히 구분됐다.

 

그런데 20세기 중반부터 등장한 4세대 전쟁은 다르다.

강대국이 주도한 1~3세대 전쟁과 달리 4세대 전쟁의 주도권은 약소국에 있다.

“전쟁의 전략적 목표가 결코 달성될 수 없으며, 달성된다 해도 지급 대가가 엄청 크다는 것을 상대 나라의 정치적 결정권자들이 인식하도록 (약소국이 저항)하는 것”이 4세대 전쟁이다.

 

미국과 베트남, 소련과 체첸,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전쟁에서 군사강국은 군사적 약소집단을 온전히 패퇴시키지 못했다.

4세대 전쟁은 “몇 달 또는 몇 년이 아니라 수십 년이 걸리는 장기전”이다. 전격전을 벌인다 해서 금세 끝나지 않는다.

강대국이 약소국의 기존 정권을 무너뜨리고 ‘허수아비 정권’을 세운다 해도, 그 정권을 전복하려는 반군과 게릴라의 저항이 계속된다.

 

하메스는 “(고가의 첨단무기를 내세워) 어느 나라가 본래부터 (군사적으로) 상대보다 우월하다고 자만한다면 곧바로 재앙의 길로 접어든다”고 지적했다.



 

전쟁 불사는 용기가 아니라 오판

 

» 2009년 2월11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차량 폭탄 테러가 일어난 직후 미군이 사고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7명의 시민이 사망하고 37명의 시민이 부상 당했다. 승자 없이 수십 년 동안 계속되는 ‘4세대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민간인이다.연합 AP/ HADI MIZBAN

그럼에도 전쟁을 불사하는 용기가 평화를 지킨다는 환상은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미국 샌디에이고대학 존 스토신저 교수는 그 이유를 ‘오인’에 있다고 본다.

“현실이 아니라 공포에 기초를 두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희망에 기초해” 전쟁을 시작하지만, 결국 “전쟁 이전보다 악화된 결과만 남겨놓는다”는 것이다.

스토신저 교수는 20세기 이후 참전을 결정한 국가 지도자의 공통점을 살핀다. 그들은 상대를 ‘악마’로 보면서 두려워한다. 동시에 상대를 얕잡아보고 대담한 선제 조처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전쟁의 가장 큰 원인은 국가 지도자의 이런 오판이다.

 

실제로 몇배의 화력을 되돌려줄 수도 있겠지만, 위정자들이 원하는 ‘상대의 패퇴’는 결코 이룰 수 없다. 현대전의 특징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을 통한 응징은 단 한 번도 완전히 성공한 적이 없다.

 

“상대가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전쟁의 확률이 높아진다. 양쪽 지도자 모두 이처럼 인식한다면 전쟁은 필연적이다.”

스토신저 교수의 분석 방식을 따르자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확률은 대단히 높은 셈이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호전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만일 김정일 정권도 한국 정부의 ‘전쟁 의지’를 확신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실제 전쟁이 일어나는 보증수표다. 다만 이때의 전쟁은 예고 없이 시작한다.

“전쟁은 일종의 우연적 사고에서 시작된다”고 스토신저 교수는 말한다. 군사훈련, 오발 사고 등 사소한 불씨가 상대의 호전성을 의심하는 양쪽 지도자의 전쟁 결단으로 이어진다.

 

 

미국의 네오콘과 한국의 뉴라이트는 무력을 동원한 적대국가의 정권 교체, 즉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를 공공연한 대안으로 내놓고 있지만, 현실에서 이에 성공한 예는 아직 없다.

 

숱한 전쟁을 치른 미국조차 ‘정권 교체’를 목표로 전쟁을 감행한 경우는 아들 부시 대통령 시절의 이라크전뿐이다.

전쟁의 애초 명분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개전 이후 이라크엔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점이 드러났다.

후세인이 독재자인 것은 분명했으나 알 카에다 또는 빈 라덴과는 연계하지 않았고, 오히려 라이벌 관계였다.

어쨌든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이라크는 더 큰 혼란에 빠져들었고, 주민들의 반미 감정은 더 높아졌다. 이에 편승한 알 카에다 세력은 오히려 전쟁 이후 이라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7년여 전쟁의 거의 유일한 성과는 후세인을 체포했다는 것인데, 2003년 9월부터 2년 동안만 따져도 이라크 전쟁에서 죽은 민간인은 3781명에 이른다.

근거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미군이 ‘(테러) 용의자’로 딱지 붙인 2040명, 언론인·비정부기구(NGO) 활동가 63명, 민간업자 358명, 외교관·공무원·경찰 181명 등을 더하면 ‘비군인’ 사망자는 6400명이 넘는다. 반면 전사한 군인은 연합군 833명, 이라크·쿠르드군 814명이었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테러 위협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반미집단이 성장하는 가운데, 전쟁 때문에 황폐해진 이라크 유전에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길도 막막해 7년 동안 쏟아부은 막대한 예산을 회수할 방법조차 사라졌다.

 

이것이 승리한 전쟁일까.

 

“나는 후세인이 전쟁 없이도 무너졌을 것으로 믿는다. 나는 후세인이 연합군 병사 한 사람의 목숨과도 바꿀 값어치가 없다고 믿는다”고 스토신저 교수는 말했다.

 

 

 

 

가난한 자들에게 집중된 전쟁 피해

 

» 베트남전쟁 당시 미 해병대원들이 베트콩 용의자를 연행하고 있다. 1960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진 베트남전은 미군 1만 명, 남베트남군 25만 명, 북베트남군 100만 명,민간인 200만 명의 사상자를 남겼다.<20세기 세계와 한국>

이 대목에 관한 한 전쟁을 연구한 정치·역사학자들의 평가는 대개 일치한다.

영국 런던정경대 매리 캘도어 교수는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일본을 점령한 방식대로 이라크에서 새로운 정권을 세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오히려 새로운 전쟁의 수렁에 빠졌다”고 말한다.

 

현대 전쟁의 결과는 예외 없이 “극단적 종파정치의 탄생”이다. 이런 분쟁은 전쟁에 참가한 양쪽 모두에서 시작한다.

20세기 초까지 전쟁에서 민간인과 군인의 사상자 비율은 1 대 8이었다. 반세기 만에 그 비율은 정확히 역전됐다. 무고한 민간인이 죽으면 그에 따른 적개심과 복수심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현대 전쟁은 분쟁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화한다.

 

 

실패가 분명해 보이는데도 이른바 ‘정의로운 무력 개입’이 발생하는 배경에는 민주주의의 실패가 있다고 캘도어 교수는 분석한다.

 

“서로 다른 인간 존재 방식이 있다고 믿는 시민주의와 달리, 이른바 ‘인도주의적 무력 개입’은 세계가 동질해야 한다고 믿는 욕망에서 비롯한다.

반대자를 배제하는 엘리트 집단 안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움직일 때, 전쟁의 결과에 관한 이런 그릇된 정보와 오도된 환상이 확산된다.”

 

캘도어 교수가 보기에 민주주의 체제일수록 전쟁에 휩쓸릴 가능성이 적다.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전쟁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전쟁 피해자의 발언권이 배제당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피해는 아래를 향해 가중된다.

다케나카 치하루 일본 릿쿄대 교수는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가 아니라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분석한다.

미국과 이라크가 전쟁을 하면, 미국이 아니라 이라크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한-미 연합군이 전쟁을 한다면, 그 전투 역시 미국 본토가 아닌 한반도에서 일어날 것이다. 4세대 전쟁 피해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민간인 사망자는 오로지 한민족의 몫이 될 것이다.

 

 

 

원조·개발 프로그램이 진정한 무기

 

‘풍요로운 세계’와 ‘가난한 세계’의 구분은 한 나라 안에도 존재한다.

이라크 땅 안에서도 각 종파 지도자들은 비교적 안전했지만, 바그다드 시민들은 항상적인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한국이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의 서민들이 겪는 희생을 공유한다면 전쟁 선포는 쉽지 않은 일이 된다. 삶의 터전을 잃고 찜질방에 웅크린 사람의 고통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 정치권력이 있다면,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할 만하다.

 

이런 공감 능력은 전쟁에 임하는 전근대적 군주와 현대 지도자의 차이다.

 

<전쟁론>의 저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유혈사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낌없이 힘을 사용하는 사람이 적에 비해 우위에 설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라고 생각한 그는 통치자의 의지를 구현하는 전쟁의 ‘수단적 가치’를 긍정했다.

 

그러나 “희생자가 얼마나 됐건 서슴없이 공격하라”는 클라우제비츠에 솔깃해지는 지도자가 있다면 ‘시대착오적 인물’이다. 클라우제비츠는 19세기 초반에 활약한 프로이센 장교였다.

 

 

200년이 지난 현대에 이르러 전쟁을 연구한 정치학·역사학자들은 다른 주문을 내놓는다.

 

“다른 국가들과 강력한 동맹관계로 묶이는 원조·개발 프로그램은 갈등 제거를 위한 진정한 무기다.”(영국 전쟁사학자 존 키건)

 

"‘외교’를 이해한 나라만 역사에서 생존했다. 일단 무력에 의존하면 그 나라는 급격히 쇠퇴한다. 민주주의는 전쟁이 아니라 ‘모범’에 의해 가장 잘 전파된다.”(스토신저 샌디에이고대 교수)

 

“침략을 막는다는 선의의 명분으로 시작한 전쟁이라 해도 전쟁 전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내고 양쪽 모두에 그 전보다 더 심한 야만성을 가져다준다.”(하워드 진 보스턴대 명예교수)

 

 

 

한반도의 위정자들은 지금 21세기의 충고와 19세기의 유혹 사이에 놓여 있다. 유혹에 흔들려 오판하면, 한반도는 19세기로 돌아갈 것이다.

참고 문헌: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연세대 출판부), <새로운 전쟁과 낡은 전쟁>(그린비), <오만한 제국>(당대),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갈라파고스), <정의로운 전쟁은 가능한가>(철학과현실사), <전쟁과 우리가 사는 세상>(지호), <전쟁의 탄생>(플래닛미디어), <21세기 전쟁>(한국국방연구원)

안수찬 기자 a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