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전쟁의 바다를 평화의 바다로

道雨 2010. 12. 9. 15:22

 

 

 

     전쟁의 바다를 평화의 바다로 
분쟁의 ‘선’을 평화의 ‘면’으로 바꾸는 ‘10·4 공동선언’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계획을 돌아보다
 

 

 

점은 선을 당해내기 힘들다.

연평도에 화력이 좋은 최첨단 무기를 배치한다 하더라도, 해안선을 따라 남을 향하고 있는 북의 해안포와 장사정포에 비하면 점에 불과하다.

선이 점 하나를 향해 집중하는 힘과, 점이 선을 향해 분산해야 하는 힘은 다를 수밖에 없다.

 

선은 끊임없이 긴장과 갈등을 유발한다. 선에 대한 이쪽과 저쪽의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는 더욱 그렇다.

서해 바다 위의 보이지 않는 선인 북방한계선(NLL)은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에는 관련 내용이 없는 선이다. 정전협정 2조 13항은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후도 등 서해 5도의 유엔군 관할만을 명시하고 있다.

 

NLL은 당시 유엔군사령관인 마크 클라크가 정전협정 체결 이후인 8월30일 임의로 설정한 선이다.

이 불씨가 번져 서해 5도 주변 해역에서 남북 간의 갈등이 높아지기 시작한 시점은 1973년이다. 북은 군사정전위에서 “서해 5도 도서 주변 수역은 북한의 관할 수역”이라고 주장했다.

1999년 9월 1차 서해교전 이후엔 서해 5도 통행로를 제외한 주변 수역을 북쪽 관할권에 둔 서해 해상군사분계선을 일방적으로 선포하기에 이른다.

 

 

 

분쟁의 불씨를 품은 모호한 경계

 

»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은 너무 늦게 만났다. 2007년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조성 등을 담은 10·4 공동선언에 합의했으나 이를 추진할 힘과 시간이 없었다.연합

모호한 선과 그로 인한 긴장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초 소비에트연방의 해체와 동유럽의 붕괴로 냉전체제가 종식되던 무렵 노태우 정부는 남북관계의 개선을 시도한다.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앞두고 남북은 고위급 회담을 열어 해상불가침경계선을 논의했다.

 

협의는 평행선을 달렸다. 북은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 경계선을 서쪽으로 연장한 선을 주장했고, 남은 정전협정 이후 20년 가까이 북이 본격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던 NLL을 그대로 인정하라고 주장했다.

결국 합의는 또 모호했다.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 구역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해온 구역으로 합의한다.” ‘쌍방 관할 구역’은 각각의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남북의 평화와 교류협력의 물꼬를 튼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선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합의한 ‘6·15 선언’은 △통일 문제 자주적 해결 △이산가족 상봉 △경제협력 등 교류협력 활성화 등을 5개항에 담았다.

‘우리 민족끼리’와 ‘연방제’ 등 몇몇 민감한 표현을 두고 한나라당과 조·중·동 등 보수를 자처하는 냉전세력들이 공세를 폈지만 6·15 선언은 1994년 북핵 위기 이후 높아진 전쟁의 기운을 누그러뜨리고 일시에 방향을 전환하는 출발점이 됐다.

 

선에 대한 남북 간의 합의는 노무현 정부에서 진전됐다.

노무현 정부는 6·15 선언의 성과를 바탕으로 진행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이 가져온 안보 환경의 변화에 주목했다.

금강산 관광이 활성화되면서 북한의 동해군단은 고성 위쪽으로 올라갔다. 개성공단 쪽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당시 남침의 주요 경로였던 개성에는 북한군 2개 사단이 전진 배치돼 있었다. 개성공단이 만들어진 이후 이들은 개성의 뒤쪽으로 옮겨졌다.




서해의 폭탄을 제거하는 평화지대

 

»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조성 계획

노무현 전 대통령은 긴장과 갈등의 선을 평화와 협력의 면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10·4 선언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계획이 그것이다.

 

당시 청와대에서 노 전 대통령을 보좌했던 한 인사의 증언이다.

 

1990년대 초 소비에트연방의 해체와 동유럽의 붕괴로 냉전체제가 종식되던 무렵 노태우 정부는 남북관계의 개선을 시도한다.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앞두고 남북은 고위급 회담을 열어 해상불가침경계선을 논의했다.

 

 

 

“노 전 대통령은 NLL 문제를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강했다.

평화선이라는 이름으로 북과 합의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는데 당장 남한 내부에서부터 반대의 벽에 부딪힐 게 뻔했다.

그렇다면 NLL 문제를 테이블에서 아예 치워버리자, 평화지대를 만들고 서해를 전체적으로 개성공단화하면 남과 북 모두에 이익이 되는 것 아니냐, 그렇게 서해에서 우발적 충돌의 가능성이라는 폭탄을 제거하는 쪽으로 정리가 됐고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로 구체화됐다.”

분쟁의 씨앗인 선을 면과 공간으로 녹여버리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구상은 10월2일부터 사흘 동안 평양에서 진행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의 3항과 5항으로 문서화됐다.

10·4 공동선언은 ‘남과 북은 6·15 공동선언을 고수하고 적극 구현해나간다’는 1항을 시작으로 6·15 선언보다 훨씬 구체적인 세부 내용을 전문 8개 항에 담았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에 관한 3항과 5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3. 남과 북은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한반도에서 긴장 완화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서로 적대시하지 않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며 분쟁 문제들을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해결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한반도에서 어떤 전쟁도 반대하며 불가침 의무를 확고히 준수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서해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해 공동어로수역을 지정하고 이 수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들기 위한 방안과 각종 협력사업에 대한 군사적 보장 조치 문제 등 군사적 신뢰 구축 조치를 협의하기 위하여 남측 국방부 장관과 북측 인민무력부 부장 간 회담을 금년 11월 중에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의 번영을 위해 경제협력사업을 공리공영과 유무상통의 원칙에서 적극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켜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위한 투자를 장려하고 기반시설 확충과 자원개발을 적극 추진하며 민족 내부 협력사업의 특수성에 맞게 각종 우대조건과 특혜를 우선적으로 부여하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해주 지역과 주변 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 선박의 해주 직항로 통과, 한강 하구 공동 이용 등을 적극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개성공업지구 1단계 건설을 빠른 시일 안에 완공하고, 2단계 개발에 착수하여 문산~봉동 간 철도화물 수송을 시작하고, 통행·통신·통관 문제를 비롯한 제반 제도적 보장 조치들을 조속히 완비해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공동으로 이용하기 위해 개보수 문제를 협의 추진해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안변과 남포에 조선협력단지를 건설하며 농업, 보건의료, 환경보호 등 여러 분야에서의 협력사업을 진행해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남북 경제협력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현재의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부총리급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로 격상하기로 하였다.

 

 

 

인천~해주 직항로가 뚫렸다면

 

»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합의는 물거품이 됐지만 여전히 전쟁의 바다를 평화의 바다로 바꿀 유력한 대안으로 꼽히고 있다. 지난 11월23일 불타는 연평도.주민 제공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해주 지역이다.

해주항은 개성공단에 앞서 유력한 경제특구 후보지로 꼽혔으나 북한 서해함대의 주력부대가 배치된 군사적 요충지여서 무산된 곳이었다.

해주 지역과 주변 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할 경우 개성과 고성의 사례처럼 북의 군사적 거점이 더 북쪽으로 올라갈 수도 있었다. 남쪽의 인천과 북쪽 해주 사이의 직항로가 생겨 민간 선박이 오갈 경우 군함이 다니면서 전쟁 연습을 하기는 어려워진다.

 

 

 

남북 간의 평화협력지대 제안은 처음이었지만 공동어로구역과 평화공원이라는 개념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분쟁국가들이 국경을 뛰어넘어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는 ‘착한’ 해법으로 모색해왔던 것이다.

대표적인 곳이 홍해 아카바 국제해상평화공원이다.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기지와 군함으로 긴장이 고조됐던 아카바만에는 1994년 중동 평화협정을 계기로 해상평화공원과 경제특구가 설치됐다.

유럽의 화약고로 꼽히던 알바니아·몬테네그로·코소보의 접경지역에도, 폴란드·슬로바키아의 접경지역인 타트라 초국경평화공원을 모델로 삼아 발칸평화공원을 만드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식민지배의 상처로 종족 분쟁이 빈번했던 아프리카에서도 이와 유사한 초국경평화공원을 찾아볼 수 있다.

 

“남과 북은 해주 지역과 주변 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 선박의 해주 직항로 통과, 한강 하구 공동 이용 등을 적극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 -10·4 공동선언 5항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으로 평화의 바다 합의를 끌어낸 게 불과 3년 전이다.

노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 직후 서울로 돌아와 남북정상선언 이행종합대책위 회의를 주재하면서 “너무 늦게 정상회담이 이뤄졌다”고 아쉬워하며 “최소한 다음 정부가 세부적인 협의를 하면서 진행을 시켜나갈 수 있도록 남북 간에 필요한 협의는 미리 매듭지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상회담 이후 두 달은 남북관계의 전성기라고 부를 만했다. 총리급 회담과 국방장관 회담이 이뤄지는 등 크고 작은 회담과 행사가 20차례 이상 이어졌다. 상시적 남북 대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선을 면으로 대체하기 위한 그해 11월 국방장관 회담에서 군은 NLL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임기 말 대통령은 힘이 없었다. 시범실시구역조차 합의하지 못했다.

 

 

 

남북평화의 ‘잃어버린 5년’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해 12월 ‘비핵개방 3000’ 구상을 공약으로 내건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남북의 시계는 멈춰버렸다.

지난 정부의 성과를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한 이명박 정부는 이전의 남북 간 합의는 깡그리 무시했다.

NLL을 지키겠다고 선언했으나 북의 포탄이 NLL 남쪽에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가 됐고 급기야 연평도에까지 날아들었다.

국가정보원과 청와대·군 사이에 서해 5도 공격 가능성에 대한 보고가 있었으니 없었느니 하면서 책임을 미루는 것을 보면 안보 중시 정권이라는 스스로의 평가가 무색할 지경이다. 보수 진영에서조차 안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남북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이 여전히 전쟁의 바다를 평화의 바다로 바꿀 수 있는 유력한 방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선을 벗어나 면으로 바꾸면 남북 모두에 이익이 된다”며 “다음에 어떤 성격의 정부가 집권하더라도 캐비닛을 열고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계획을 다시 꺼내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정권이 수년 안에 스스로 무너지고 남한에 흡수통일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이라도, 위기 관리와 지속 가능한 평화체제를 위해 현실 적용 가능성을 검토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렇게 되면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기간이야말로 ‘잃어버린 5년’이 될지도 모른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