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로자 파크스와 세상을 바꾸는 길

道雨 2011. 10. 28. 12:30

 

 

 

        로자 파크스와 세상을 바꾸는 길 

 

투표에 참여하는 게 다가 아니다. 불복종·직접행동을 할 권리도 있다.
로자 파크스가 한 것도 그것이다

 



 

» 장귀연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교수
보궐선거를 이틀 앞둔 24일 안철수씨가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캠프를 방문해 편지를 건넸다.

언론에 공개된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1955년 12월1일 목요일이었습니다. 미국 앨라배마주의 로자 파크스라는 한 흑인 여성이 퇴근길 버스에 올랐습니다.”

 

미국 흑인민권운동의 불씨를 지핀 로자 파크스의 일화를 소개하며 시작한 편지는 선거 참여를 간곡히 당부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안철수씨가 든 사례는 정확히 걸맞은 것이 아니다. 로자 파크스는 투표를 한 게 아니었다.

인종분리를 규정한 몽고메리시 조례에 따를 것을 요구받자 “싫어요”라고 대답했고, ‘당연히도’ 경찰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법을 잘 지키는 ‘착한’ 시민이었고 흑인 참정권 시행을 기다려 투표에 참여함으로써 세상을 바꾸자고 마음먹었다면, 민권운동의 불을 댕기지 못했을 것이고 흑인들의 투표권도 절로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로자 파크스의 행동은 오히려 시민불복종 행동이라고 봐야 한다.

 

미국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투표장에서 대표를 선출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완전한 시민의 자격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없다 했다.

소로는 반문한다.

 

“당신이 선거로 대표자에게 나랏일을 결정할 권리를 위임했다고 해서 당신의 양심도 위임한 것인가?”

 

그는 법과 정부의 정책 결정을 따르는 것보다 우선하는 게, 양심을 따르는 것이라고 보았고, <시민불복종>이란 책을 썼다.

 

이는 저항권의 정신과도 이어진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생명과 자유, 행복추구라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가졌다고 전제한 뒤, 이를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는 언제든지 폐지하고,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정부를 조직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이제 자문해보자.

글자 그대로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나라인가?

 

월가 점거 시위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금융자본주의라고 일컬을 만큼 이윤은 금융적 이익을 따라 순환하고, 노동자들의 고용과 임금을 위해 투자되지 않는다.

“1%에 저항하는 99%”라는 시위 구호처럼, 소수 자산가들에겐 유리하지만 스스로 일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기에는 몹시 불리한 구조다.

 

그리고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각종 노동과 복지 지표들에서 단연 미국과 더불어 수위를 다투고 있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그리하여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거부했던 분리정책은, 반세기가 넘어 태평양을 건넌 나라에서 다시 실현된다. 통근버스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자리가 분리되어 있는 회사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그렇기에 로자 파크스를 언급한 안철수씨의 편지가 곧이어, 이번 선거가 부자와 빈자의 대립도 진보와 보수의 대립도 아니며 이념과 정파를 넘어선 화합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규정한 건 더 생뚱맞다.

 

대립과 갈등보다 화합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나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화합이 이루어지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소로가 말했듯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미국 독립선언문이 규정하듯 인민의 행복을 지키지 못하는 정부는 존재 의의가 없다.

 

 

선거는 한 방법이다.

그러나 투표에 참여하고 그 결과에 만족하거나 실망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올바르지 않은 법과 정책에 불복종하거나 직접행동을 할 권리도 있다.

 

로자 파크스가 한 것도 그것이며, 실은 선거란 제도도 수많은 혁명과 시위, 파업을 거쳐 만들어졌다.

당신의 양심에 비춰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투표 외에도 많은 참여 방법이 있다.

 


 

[ 장귀연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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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글은 군 전역(1988. 2) 후 제가 쓴 일기의 한 부분입니다.

 

                   어느 날의 일기 (1989. 5. 16)

 

 

  도로우의 [市民의 不服從]을 읽었다.

  원 제목은 [Civil disobeydence]


 미국의 멕시코 침략을 반대하며, 政府의 정의롭지 못한 정책이나 부당한 행위에 대해서 市民은 복종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세워두는 軍隊」는 「세워두는 政府」의 한쪽 팔(무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한편으로는 공감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세워두는 軍隊」마저 없었기에 임진왜란에서 그토록 처참하게 당하지 않았던가 하고 문득 뇌리에 스친다.

  

그 「세워두는 軍隊」란 현재의 한국군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은 아닌가 곰곰히 생각해 본다.

  軍, 경찰 모두가 ···

  

국가 방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는 긍지보다는, 軍人(將校)이라는 것이 자꾸만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짙어가기에 軍服을 벗은 것이 아니었던가?

 

 戰爭이 나면 언제라도 다시 나설 수 있다는 각오는 돼 있지 않은가?

 

  화천에 근무시 헌병대 정문에 씌어 있던 글귀가 생각난다.

  1. 참된 헌병이 되자.    1. 멋있는 헌병이 되자.    1. 힘있는 헌병이 되자.

 

  우리의 政府도 이런 표어와 유사하게끔 되었으면 ··· 하고 바란다.

 

 

 

***  나는 헌병 병과가 아닌 야전포병 출신이다.

  위의 글귀 중 '헌병'을 '군인' 또는 '군대'로 해석하면 좋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