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관련

최초 보고 내용과 박연수 증언 달라도 너무 달라

道雨 2012. 7. 11. 13:51

 

 

 

 

 

       최초 보고 내용과 증언 달라도 너무 달라
 

 입다문 박연수 공범 자초하나

(서프라이즈 / 내가 꿈꾸는 그곳 / 2012-07-11)


 


천안함 사건 당시 작전관이었던 박연수 대위는
공범(共犯)의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가


천안함 사건 11차 공판 기록을 정리하면서 착찹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착찹한 기분이란 다름이 아니었다. 나라가 온통 매국노들의 후손들이 들끓고 설치는 가운데 천안함 사건 재판이 열린 때문이다.

이들 매국노들이 들끓고 있다는 건, 누구인가 다시 그들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거나, 그들의 지배를 받지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이게 된 운명이 현재 대한민국의 현재 국운 아닌가.

변호인의 반대심문에 '아니오'를 연발하며 꼬박꼬박 대답을 하고 있던 박연수가 그런 것 같았다. 그는 본의 아니게 자신의 양심을 속일 수 있었으며, 스스로 작심하여 양심을 속이는 행위를 통해 작은 이득을 꾀할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됐다.

 

그는 이미 밝혀진 사실에 대해 전면 부정으로 맞섰다. 그는 ROTC 출신의 해군 장교(대위)의 신분이었지만, 그가 행한 법정 증언의 무게 때문에 대한민국을 쥐고 흔드는 권력자의 신분에 올라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왜 그런가.

그의 증언 한마디가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며, 당시 합참의 우두머리는 물론 해군의 우두머리 내지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의 퇴임 후 까지 좌지우지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뿐 아니다. 그의 증언 한마디면 독재자의 딸이 음흉하게 품고있던 꿈 까지 앗아가게 될 게 뻔했다.

 

그는 천안함이 침몰할 당시 천안함의 당직 근무자였고, 천안함의 진실 대부분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그가 입을 열면 매국노들의 음흉한 계략이 수포로 돌아가는 한편, 국민들로 부터 돌팔매질을 당하며 쫓겨날 게 뻔해 보였다.

천안함 사건의 진실이 가진 파워는 그 정도 이상으로 판단됐다.

 

그러나 박연수는 천안함 사건의 공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이후, 일반의 바람과 같은 증언을 하지않았다. 그는 오히려 기존에 드러나 있는 사실을 전면 부정하는 증언을 통해, 천안함 사건의 진실을 원점으로 다시 돌려놓고 말았다.

 

 


 

 

박연수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

 

박연수는 천안함 사건 당시 일반에 널리 퍼져있는 '최초좌초' 사실을 전면 부정하고 나섰다.

그는 아시아경제가 단독 보도한 '최초좌초' 사실에 대해 증언한 유가족 이용기 씨의 증언이 "사실과 다르다"며, 해군 작전상황도에서 자신이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킨 최초좌초 위치는 유가족(이용기 씨)이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자의적 판단한 것이라 증언했다.

따라서 변호인 측은 작전상황도를 펼쳐보이며  "천안함이 좌초된 상황이 있는 지" 물었다. 그러나 박연수는 "그런 사실이 없다."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한편 박연수는 언론에 공개된 최초좌초 위치를 부인하는 과정에서 납득이 어려운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빨간점과 최초좌초 위치를 분리해 설명하며, 최초좌초 위치라고 쓰여진 곳을 "최초 사고위치" 내지 '사고해역'이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그렇게 하면 사실이 달라질까.

그래서 박연수의 증언에 비추어 이용기 씨의 증언이 얼마나 신뢰성이 있는 지 알아보게 됐다.

 


희생자 유가족 이용기 씨의 '최초좌초' 증언 배경

 

천안함 사고 당시 희생자 유가족 이용기 씨가 언론을 통해 국민적 관심을 받게 된 이유는 그의 군이력과 무관치 않다.

희생자 가족인 이용기 씨는 부사관 출신으로 해군에서 조타수로 근무한 사실이 있는 분이다.

그는 천안함이 사고가 날 당시 즉각 2함대 사령부로 달려가 원인규명을 위해 해군측에 사고원인 등을 따지고 든 분이었다.

박형준 전 희생자유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이용기 씨는) 천안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데, 해군에서 근무할 당시 평상시 자주 나갔던 곳이고, 경도와 위도, 조류와 조수 간만의 차이 까지 다 알고 있었다."며 "백령도에는 초계함 같은 배가 왜 기동하게 되었느냐. 내가 근무할 당시엔 백령도에 근접하여 간 사실이 없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경제의 제목 "사고지역은 초계함이 들어갈 지역이 아니다."라는 내용만 봐도 천안함이 저수심에서 작전을 펼치기란 불가능 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박연수는 이용기 씨의 증언을 한 방에 묵살하고 말았다. 그는 이용기 씨가 작전상황도에서 가르킨 지점을 '사고해역'이라 부르고 있었지만, 결코 '최초좌초' 지점이라고 확인해주지 않았다.

이용기 씨의 증언을 전면 부인하고 있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천안함은 좌초되지 않았지만 사고해역에 노출되어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

박연수는 그의 당직 근무 중에 발생한 천안함 사고에 대해 처음 부터 끝 까지 아무런 이상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뺌했다.

따라서 그의 증언과 천안함이 상부로 구조요청 등을 한 최초 보고 내용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당시 언론이 보도한 자료를 뒤적여 보니 이랬다.

 

 

 천안함 희생자 유가족 이용기 씨가 아시아경제를 통해 증언한 최초좌초 위치

 

 

박연수는 작심한 듯 변호인 측의 심문에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로 대응하면서, 변호인 측이 "(작전 중)백령도 가까이 간 것 같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 작전구역내에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작전구역 내지 사고해역은 천안함이 최초 이상 징후를 발견한 지점이었다.

천안함은 이용기 씨가 말한 최초좌초 지점 내지 박연수가 두루뭉술 표현한 사고해역에서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것이다.

 


최초 보고, 천안함 침몰은 배 밑바닥에 생긴 구멍 때문

 

사고 당시 합참의 발표를 참조하면, 박연수는 전쟁터에서 총살형을 당해도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는 형편없는 지휘관(작전관)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천안함 사고 직후인 2010년 3월 27일 합동참모본부(정보작전처장 이기식 해군준장)에 따르면, 천안함은 "함정의 선저(바닥)가 원인 미상으로 파공되어 침몰한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출처: http://media.daum.net/politics/dipdefen/newsview?newsid=20100327013004022&srchid=IIM%2Fnews%2F29644910%2Fdf21273535602457669a09dd4ffce1a0#A20100327052104407.jpg)

 

또 KBS와 (찌라시로 불리우던)중앙일보에서는 "군당국이 천안함이 26일 백령도 서남방 해상에서 작전 중 침몰한 원인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에 집중하고 있다.

합동참모본부에 따르면 천안함은 이날 오후 9시 45분쯤 임무 수행 중 갑자기 함정의 밑바닥에 구멍이 나면서 침몰하기 시작했다. 천안함 승조원들은 배 밑바닥에 생긴 구멍을 막으려 했지만 수습하지 못했다고 해군 관계자는 전했다."라고 쓰고 있다. (출처: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081806&cloc=home|sonagi|click)

최초 사고 당시 보고에 따르면 숨진 승조원 다수가 배 밑바닥에 생긴 구멍을 막으려다 숨진 것으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당직사관 박연수는 법정에서 태연하게 허위사실을 말하며, 46위의 호국영령들의 명예를 심히 훼손하는 등, 법정 모욕과 함께, 천안함 사건 희생 유가족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변호인측은 당시 언론에 보도된 보고 내용을 통해 "선저 바닥에 원인 미상의 파공을 합참에 보고한 사실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박연수에게 질문하자 그는 "잘 모른다"고 짧게 대답했다.

천안함 사건의 진실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로 부터 시작되는 지 단박에 드러난 셈이다.

그의 귓볼이 갑자기 검붉게 변해지기 시작했다. 박연수가 짜증투로 심문에 임한 것도 이때 쯤이다.

 



박연수의 증언은 국민적 배반이자 숨진 승조원 배신 행위

 

천안함 사건 관련 포스트를 쭈욱 읽어오신 분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박연수의 증언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단박에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가 애써 태연한척 최초좌초를 부인하며 언론 내지 국민을 통째로 기망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마도 그는 자신의 의사는 물론, 의지에 반하는 행동으로 군 생활을 하고 있을 지 모르며, 자신의 양심을 속이며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거짓된 증언으로 말미암아  46위의 천안함 용사들의 명예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히 훼손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시라. 보도에 따르면 숨진 승조원 다수가 배 밑바닥에 생긴 구멍을 막으려다가 몰살을 당한 마당에, 다행히도 생존자 그룹에 낄 수 있었던 그가, 국민들을 기망하는 간신배 내지 뼈속 까지 친일.친미 행태로 일관하는 매국노들 편에 서 있었으니 말이다.

 

천안함 사건 재판 11차 공판에 증인으로 나선 박연수는 진실의 길을 외면한 채 공범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최초 천안함이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려 매우 급박한 구조요청을 한 사실을 부정하는 대신, 천안함 사고 2주기가 지난 어느날 법정 증언을 통해 "최초좌초 사실은 없었고, 사고 직전 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는 취지로 이를 지켜보는 방청인들을 실망시키고 있었다.

 

그렇다고 천안함이 폭침되었다는 증언을 한 사실도 없었다. 그는 자의적 판단으로 천안함이 어뢰에 피격되었을 것이라 했지만, 어뢰 폭발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화약냄새는 물론 섬광이나 물기둥을 전혀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우리가 이런 지휘관 내지 이런 밥통군대나 정권에 나라와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맡기고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법률에 무식한 글쓴이가 발끈하여 공범이 무엇인지 뒤적거려보니,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공범이란, "단독으로 규정되어 있는 구성요건을 여러사람이 가공(加功)하는 범죄"라고 말하고 있었다.

천안함 사고 당시의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을 박연수 작전관은 어느새 나라와 국민을 배신한 대가로 알량한 목숨을 부지하며, 범죄조직에 가담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의 행위는 천안함의 진실을 잠시 늦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영원히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천안함 사건 방청기는 계속이어진다.

 

내가 꿈꾸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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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격 증언, 천안함 작전관이 말한 사고 지점은 달랐다

 

[천안함 공판] 사고해역 수심 20m 내외… 합조단 주장 “46m”와 달라

 

조현호 기자 | chh@mediatoday.co.kr  

 

 

천안함 사고해역의 수심에 대해 사건당시 당직사관이었던 천안함 작전관이 “수심은 20m 내외였다”고 증언해 ‘북한 어뢰를 맞고 함미가 침몰한 곳의 수심이 45~47m’라는 국방부 합조단 발표와 크게 차이가 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수심 20m인 곳은 어뢰피격지점이라고 발표한 지점으로부터 크게는 2km 이상 떨어져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수심 20m인 곳 가운데엔 작전상황도상 ‘최초좌초’라 기재된 백령도 해안가도 포함돼있다.

 

또한 사고직전 천안함 후타실 CCTV 장면인 것으로 오인케 했던, 천안함 합조단 최종보고서 상의 사진에 등장하는 승조원 가운데 생존장병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보고서에 있는 사진은 천안함 사고 직전 상황은 아니라는 증언도 나왔다.

 

천안함 사고 당시 천안함 작전관이자 당직사관이었던 박연수 해군대위는 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박순관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에 대한 천안함 12차 공판에서 ‘사건직후 어뢰피격으로 판단한 이유’에 대해 “수심이 20m 내외였고, 수상 특이접촉물이 없었으며, 절단면을 확인한 결과 이런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은 어뢰 뿐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사건직후 수심이 20m라 판단한 근거에 대해 박 전 작전관은 “배에 측심기가 작동하고 있었고, 그를 보고 판단한 것”이라고 밝혔다. ‘쾅’하는 소리가 나기 직전에 확인한 것이냐는 변호인측 신문에 그는 “(수심에 대한 상황을) 수시로 본다”고 답했다.

 

박 작전관은 ‘사고시간이 2010년 3월 26일 21시20분 이후’라고 판단한 근거에 대해 “매시간 30분마다 문자정보망을 이용해 기상보고를 하는데, 보통 5분 전에 미리 작성한다. (당직장병이) 문자정보망을 작성하는 것을 봤다”며 “그 시간은 내가 추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천안함 작전상황도에 박영선 민주당 의원의 천안함 항적자료를 기입한 것.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

 

또한 박 작전관은 천안함이 백령도 서남해안에서 A지점(21시05분)에서 B지점(21시09분)으로 유턴(변침)했다는 박영선 민주당 의원의 항적자료 상 위치를 사고 다음날 유가족에게 상황 설명을 했던 ‘작전상황도’에 적용할 경우, 천안함이 사고시각(21시22분)에 ‘최초좌초’(백령도 서방근해) 지점까지 간 것 아니냐는 변호인 신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답했다. 지난달 최원일 전 천안함장이 밝혔던 ‘가능성이 있다’는 답과 동일했다.

 

 

박 전 작전관은 사고 당일 천안함이 경비구역에 대해 남동~북서 방향으로 변침하며 1시간 당 2회 정도씩 순환기동했으며, 기동 속도는 6~7노트(시속 12km)였다고 밝혔다. 이를 계산한 대략적인 항적의 총 길이가 6km 되느냐는 변호인의 분석에 대해 박 전 작전관은 “그렇다”고 시인했다. 사고당시 해상상태는 파고 2.5m 내외였으며 시정은 3마일이었다고 그는 전했다.
 

   
박연수 전 천안함 작전관(해군 대위)이 9일 오후 재판을 마치고 재판정을 나서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이를 두고 신 대표의 변론을 맡고 있는 김형태 변호사는 “어뢰피격지점의 평균수심이 47m라는 것이라면 박 작전관의 수심 20m 증언은 사고지점이 전혀 다르다는 뜻”이라며 “국방부 합조단 보고서상 사고위치와 전혀 맞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언”이라고 지적했다.

 

최문순 당시 민주당 천안함 특위 위원과 함께 지난 2010년 8월 백령도 사고 해역 탐사를 진행했던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는 9일 밤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당시 백령도 서방과 서남방쪽의 수심이 20m인 곳에서 함미 침몰지점(어뢰피격지점)인 수심 45~47m 지점까지는 적어도 2km 이상은 떨어져있었다”며 “어뢰를 맞고 6~7노트의 속도로 기동했다해도 10분은 걸리며, 어뢰에 맞고 엔진이 정지된 상태에서 표류한 채 그리로 간다는 것은 당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조류 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 대표는 “‘어뢰맞은 자리가 20m 해역’이라는 박 전 작전관의 증언대로라면 침몰해역 수심이 45~47m라는 국방부의 사고지점 발표는 또 틀리다는 얘기”라며 “백령도 해역 탐사 때 조사한 바로는 오히려 작전상황도상 ‘최초좌초’라 찍힌 곳이 수심 20m 해역”이라고 지적했다.

 

 

   
천안함 함미

 

특히 사고당시 수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천안함 당직사관이 사고해역 수심을 20m라고 증언한 것은 국방부 합조단의 보고서 내용을 반박한 의미이기도 하다고 이 대표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와 함께 이날 재판에서는 사고 순간 ‘꽝~꽈앙’(1~2초 간격)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함수가 우현 방향으로 90도 각도로 기울어졌다는 국방부 합조단 주장의 진위도 도마에 올랐다.

박연수 전 작전관은 사고 순간 ‘쾅’ 하는 소리와 자신이 20~30cm 떠올랐다가 넘어졌고, 배가 순식간에 오른쪽으로 90도 각도로 기울어졌다고 증언했다. 특히 그는 “내 체감한 것으로는 그렇다”며 “우현쪽 바닥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반해 사고당시 천안함 함교 우현에서 견시업무를 했던 공창표 하사는 이날 재판에 나와 “(쾅하는 소리와 함께) 충격이 생긴 순간에 (함교쪽에 있는) 봉을 잡고 (발로) 난간을 받치고 있어서 튀어나가지 않았다”며 “(충격시 떠오른 것은) 못느꼈다”고 밝혔다.

공하사는 함수가 기울어지는 순간에 대해 “허벅지까지 물이 찼고, 기울어지는 과정에서 물이 빨리 들어왔다”며 “이광희 중사가 문을 열고 나오라고 해서 나갔는데, 우현에서 좌현으로 중앙문을 통해 좀 많이 밟고 가야 했다. 몇도인지는 모르지만 90도로 기운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한편, 천안함 최종보고서상에 사고직전 천안함 후타실에 최후장면인 것으로 오인할 수 있는 CCTV 사진 속 등장인물과 관련해 박연수 전 작전관은 “이 중 한 명은 김용현 병장”이라며 “마지막장면은 아니다. 이 사진이 녹화된 것의 마지막인지, 사고 1분전인지 모르겠으나 사고순간이라면 맞지 않다”고 밝혔다.

   
천안함 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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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보도 사실 뒤집은 증언 왜 그랬을까

  

유가족 이성잃게 만든 박연수 작전관의 증언

(서프라이즈 / 내가 꿈꾸는 그곳 / 2012-07-10)


천안함 사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심정은 어떨까.

어제(9일)오후 2시 부터 서울중앙지법 서관 524호 법정에서 천안함 사건 제11차 공판이 속개됐다. 11차 공판은 방청객들이 입추의 여지 없이 방청석을 가득 메우고 취재진이 복도에 쪼구려 앉아 취재를 할 정도로 일반의 관심이 폭발한 공판이었다. 이 공판의 중요성을 보여준 공판의 모습이다. 이날 공판은 천안함 사건의 향방을 결정해 줄 중요한 공판이었는 데, 증인으로 출석한 당시 천안함 작전관 박연수 대위가 그 중심에 있었다.검게 그을린 얼굴에 상기된 표정 때문에 귓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박연수는, 증언 내내 변호인단과 방청객의 기대를 비켜가고 있었다. 이날 박연수의 증언을 통해서 본 천안함은 한마디로 '밥통해군'의 면모를 200% 드러냈다고나 할까.

박연수는 아시아경제가 보도한 최초좌초 위치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한편, 천안함 사고 직후 <아시아 경제>를 통해 밝혀진 '최초좌초' 위치는 유가족이 이성이 잃은 상태에서 자의적으로 판단한 것이라 말해, 향후 유가족과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된 한편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박연수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언론이 오보를 한 셈이자, 22전대장 이원보 대령(최원일 함장 직속 상관)을 궁지에 빠뜨리고 말았다.

유가족 이용기 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원보 대령이 천안함 사고 브리핑에서 해군작전상황도를 펼쳐놓고 유가족을 향해 최초좌초 위치를 설명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박연수의 증언에 따라 유가족 이용기 씨는 (이성을 잃은)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최초좌초 위치를 가공한 인물인가. 천안함 사건 재판이 시작된 이래 생존자들이 (재판과정에서)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다. 

*천안함 사고 당시 천안함의 작전관이었던 박연수 대위는 '최초좌초'라는 위치가 적시된 '아시아경제'의 보도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나서는 한편, 박연수 자신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최초좌초 위치는 유가족이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자의적으로 판단한 것이라 증언했다. 상식 밖의 일이 법정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울러 이날 공판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천안함이 사고 직후 즉각 90도 각도로 우현으로  쓰러진 게 아니란 점도, 박연수와 함께 증언에 나선 공창표 하사(사고 당시 당직)의 증언으로 밝혀지며 천안함 사건 재판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변호인단의 끈질긴 질문 끝에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천안함의 항적이 어렴풋이 드러나기도 했다. 사고 당시 천안함은 백령도 서북쪽으로 이동하며 작전을 펼치고 있었고 작전반경은 대략 6km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박연수와 당직 하사 공창표의 증언 등에 따르면, 사고 당시 천안함은 눈을 감고 작전을 감행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천안한 함교 좌우현에 위치한 견시 업무 당직자들이 백령도의 위치 조차 식별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연수와 공창표의 증언 다수는 증인들이 (이미 드러난 사실 등에 대해)거짓말을 하거나 '모른다. 기억이 안 난다' 등으로  발뺌을 하기도 했다. 또 증인 두 사람 모두 (1번 어뢰(?)가 폭발할 당시)물기둥이나 섬광을 본 적도 없다고 말해 당시 합조단 관계자들이 가공한 <1번 어뢰>의 존재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울러 피고인(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민간위원)이 박연수에게 심문한 내용을 통해 드러난 사실에 따르면, 합조단의 <천안함 사건 보고서>는 급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빨간 거짓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합조단이 발간한 천안함 사건 보고서에서 이미 고인이 된 후타실의 승조원 중 '김 모 병장은 생존자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관련기사[천안함 제12차 공판] 함미 후타실 마지막 영상 속에서 생존자 확인 박연수는 신 씨의 이같은 취지의 질의 내용에 대해 "사고 순간이라면 맞지 않다. (신 씨의 말)에 동의한다"라고 말해 합조단이 발간한 천안함 사건 보고서가 명백한 거짓임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날 공판은 대략 2시간 4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변호인단과 증인의 열띤 질문과 답변으로 인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는데, 눈에 띄는 대목이 박연수의 증언으로부터 나왔다. 박연수는 작심한 듯 유가족의 증언을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깔아뭉게며 최초좌초 사실을 부인하고 있었는데, 박연수나 공창표의 증언을 참조하면 천안함은 사고 직전 까지 근무자에게 이상징후가 발견되지 않았고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는 것이다. 천안함은 한 순간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사고 직후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유독 박연수가 확인해 본 천안함 절단면은 스스로 어뢰의 공격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박연수는 변호인단이 작전구역 변경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귀찮은 듯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상급부대의 위협 때문에 바꿀 수 있지. 임의로 못 바꾼다"

46명의 승조원을 앗아간 천안함 사건은 사고 직전 상급 부대의 지시에 따라 작전구역을 벗어나게 된 것일까. 박연수는 재판이 끝난 후 법정 앞에서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이 건넨 명함을 뿌리치고 먼저 자리를 떳다. 앞 뒤 맞지 않는 증언 등 방대한 자료의 방청기는 따로 정리해 소개해 드린다.<계속>

 

내가 꿈꾸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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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함 사고위치 사고원인 바뀌나? 

 천안함 당직사관 박연수, "수심 20m 내외" 법정증언

(통일뉴스 / 김치관 기자 / 2012-07-11)


천안함 사고 당시 당직사관이었던 박연수 전 작전관이 법정에서 천안함 사고해역의 수심이 20m 내외라고 증언해 천안함 사고지점이 바뀔지 주목된다. 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 역시 법정증언 시 수심 20m 이상을 언급한 바 있으며, 사고지점이 바뀔 경우 사고원인도 달라질 개연성이 높다. 

박연수 해군 대위는 9일 오후 2시부터 서울중앙지법 서관 523호에서 제36형사부(재판장 박순관) 심리로 열린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의 천안함 관련 12차 공판에서 천안함에 장착된 측심기에 나타난 수심은 “20m 내외였다”고 증언했다.

박 대위는 “배의 함교에 측심기가 있다. 항상 기동항해를 할 때 측심기를 계속 작동시켜놓고 수시로 확인한다”며 사고 지점 수심을 “20m 내외로 기억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민군합동조사단은 천안함 사건 최종보고서에는 “수심 47m” 지점에서 사건이 발생했다고 특정하고 있어 상당한 차이가 난다.(176쪽) 


“수심 20m 내외”와 “수심 24m”
 

   
▲ 천안함 작전관으로 사건 당시 당직사관이었던 박연수 대위가 9일 오후 증언을 마치고 재판정을 나서고 있다. [사진 - 미디어오늘 이치열 기자]
특히 박 대위는 “10일전 작전투입 됐다”, “같은 구역에서 계속 항해했다”며 약 6km 구간을 평균 시속 6~7노트(12km)의 속도로 북서-남동 방향으로 한 시간에 두 번 꼴로 당일에만도 30여 차례 왕복했다고 구체적으로 증언해 그가 기억하는 “수심 20m 내외” 증언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최원일 전 함장도 지난 6월 11일 법정진술에서 좌초설을 부인하면서 “(천안함) 홀수는 높이가 3m고 수심이 20m 이상인데 어디서 암반이 올라와서 박겠느냐”고 말한 바 있다. 

이같은 “수심 20m 내외” 증언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다른 정황도 있다. 사건 하루 뒤인 3월 27일 국회 국방위에 출석한 이기식 합참 정보작전처장은 “어제 3월 26일 21시 30분 백령도 서남방 1마일 해상에서 아 초계함이 원인미상으로 침몰된 상황 관련 보고”라면서 “사고지점은 수심 24m”라고 보고했고, 29일 국방부 일일브리핑에도 24m, 30일 해양경찰청 보고에 25m가 등장한다. 

사고지점 수심이 47m가 아니라 20m 내외라면 그만큼 천안함이 백령도에 근접해 운항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고 백령도 서남방 1마일이라며 1.6km로 사고지점으로 발표된 2.5km 보다 훨씬 근해임을 알 수 있다. 


대청해전과 “백령도 서남방 1마일”
 

‘백령도 서남방 1마일’은 28일 국방부 일일브리핑과 29일 국방부 민주당 당정협의회 보고, 심지어 4월 7일 합조단 발표 시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천안함 사건 발생 직후부터 군 내부 소식통으로부터 나온 ‘정부 발표와 달리 천안함은 백령도 1㎞ 이내까지 근접했다가 10m 이내의 저수심 지역에서 사고가 났다’는 제보가 보다 신빙성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천안함이 백령도에 근접한 저수심 지역을 운항한 이유에 대해 최원일 전 함장은 법정 증언에서 “대청해전 이후 북한군의 해안포 위협에 대비해서 음영구역이라고 설정된 곳에서 은폐차원에서 경비한 것”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박 대위도 “전년도(2009년)”에 “상급부대에서 ‘어떠어떠한 적의 위협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구역을 바꿨다’라고 지시를 했고 지시에 의해서 바뀐 것”이라고 증언했다. 
대청해전이 2009년 11월 10일 발생했고, 이를 교훈삼아 상급부대에서 백령도 음영구역을 이용하도록 지시했다면 천안함이 백령도 인근해역으로 항로를 설정한지 몇 달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건이 발생한 셈이다. 


별표지점은 백령도에서 '1.12km' 거리

천안함은 왜 백령도 방향으로 유턴(변침)했나?

   
▲ 박연수 대위는 자신이 사고해역을 지목했다고 증언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최초 좌초 별표지점을 특정해 구글어쓰를 통해 거리를 확인한 결과 1.12km로 나타났다. [사진 - 통일뉴스]

박 대위는 사고 다음날인 27일 유가족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작성했던 작전도 사진 중 손가락으로 가리킨 지점과 관련 “‘사고해역은 이 근방이다. 백령도 남서쪽 이 해역이다’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씀드린 적 있다”고 확인했다. 

또한 유족 중의 한 명인 이용기 씨가 ‘최초 좌초’라며 별표로 표시한 지점과 관련 ‘별표지역을 지나갔을 가능성도 있느냐’는 변호인 신문에 “있다”고 답했다. 

최원일 전 함장도 법정 증언에서 ‘천안함이 사고 직전 별표지점 쪽으로 지나갔던 것 아니냐’는 변호인 신문에 “좌초라고 표기된 데를 지나갔을 수도 있는데, 거기는 암초가 없다”고 통과 가능성을 시인한 바 있다. 

박 대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지점이나 박 대위와 최 함장이 모두 통과 가능성을 인정한 별표지점은 백령도 인근 해역으로 박 대위가 평소 항로라고 증언한 ‘2~2.5마일’(3.2~4km)이나 합조단이 사고지점으로 발표한 2.5km 보다 훨씬 가까운 지점이다. 

별표지점을 특정해(37-56-30N, 124-36-50E) 구글어쓰의 거리측정 기능을 이용해 측정해보면 1.2km 이내임을 알 수 있다. 

   
▲ 천안함은 A지점(21:05시)에서 B지점(21:09시)으로 마지막 유턴(변침)을 했다. 신상철 대표는 바다 쪽이 아닌 수심이 낮은 백령도 쪽으로 변침한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캡쳐사진 - 통일뉴스]

신상철 대표는 박영선 의원이 군측으로부터 입수해 공개한 KNTDS(해군전술지휘통제시스템) 좌표를 근거로 천안함이 마지막 유턴(변침)시 바다 쪽으로 하지 않고 백령도 쪽으로 변침한 대목을 지적했지만 박 대위는 그래도 문제가 없었다고 답했다. 

박 대위는 천안함이 정해진 작전구역 운항시 ‘1,000 야드’(0.9km) 정도의 범주 내에서 운항한다고 밝혀 실제로 천안함이 남동쪽에서 마지막 변침시 백령도에 상당히 근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신 대표는 <통일뉴스>와의 통화에서 “바람이 북서풍이면 회전반경(터닝써클)이 길어져 유능한 항해사라면 수심이 깊은 바깥 쪽으로 돌려야 한다”며 “항해 경험이 별로 없어 백령도 쪽으로 터닝해 결국 별표지점 같은 저수심에 들어선 것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수심 24미터라면 어뢰나 계류 기뢰 가능성 없어”
 

또한 천안함 사고해역의 수심이 20m 내외에 불과하다면 정부가 발표한 북한 어뢰에 의한 수중폭발 논리도 재검토될 필요성가 있다. 

합조단은 최종보고서 발표 기자회견에서 “가스터빈실 중앙 좌현 3m, 수심 6~9m에서 고성능 폭약 250kg이 폭발하여 천안함이 피격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확언한 바 있다. 

   
▲ 합조단 최종조사보고서 어뢰 공격도. 수심이 20m 내외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캡쳐사진 - 통일뉴스]

수심 47m 지점에서 수심 6~9m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것과 수심 20m 내외의 지점 수심 6~9m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것은 많이 다를 수 있다. 

서재정, 이승헌 등 재미학자들은 2010년 10월 17일 합조단 보고서를 반박하는 보고서에서 “사고지점의 수심이 24미터라면 어뢰가 오작동 등의 이유로 해저에 충돌하며 폭발했을 가능성을 제외하고는 어뢰나 계류 기뢰의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며 “대신 천안함을 타격한 원거리 폭발물은 해저에 고정되어 있거나 해저에 가까운 곳에 있었던 폭발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한겨레> 6월 23일자 보도에 따르면 안수명 박사는 어뢰가 천안함 선체 밑에 머무르는 순간 버블젯 폭발을 일으킬 확률을 0.0000001% 수준으로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분석했는데, 수심이 더욱 낮은 곳에서 절묘하게 적정한 수심에서 터져줄 확률은 더욱 줄어든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후타실 CCTV 김 모 병장은 생존자 
박연수.공창표, ‘물기둥 보지 못했다’ 증언
 

이날 재판정에서 박 대위는 ‘항해하는 동안 백령도가 육안으로 식별가능 했느냐’는 질문에 “불빛이 육안으로 식별됐다”고 답했으며, 사고 순간 선광이나 물기둥은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 합조단이 천안함 최후의 모습이라고 공개했던 CCTV 녹화 장면은 사고 한참 전의 모습인 것으로 확인됐다. 함미에 위치한 후타실 사진에 나타난 앞쪽 김 모 병장은 생존자로 확인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또한 최원일 전 함장이 유일하게 신상확인을 하지 않았던 후타실 CCTV 사진에 나타난 김 모 병장의 실명을 확인했으며, 김 병장은 생존장병 명단에 포함됐기 때문에 “사고 순간 (사진)이라면 맞지 않다”고 증언했다. 

천안함 우현 견시를 담당했던 공창표 하사는 사고 당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며 “물기둥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으며, ‘물벼락을 맞았느냐’는 질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봉을 잡고 있었고 튕겨져 나가지 않았다”며 “발로 나무 난간을 밝고 있어서 오른쪽 무릎 인대가 파열됐다”고 설명하고 “허벅지까지 물이 찼다”고 증언했다. 

공 하사는 ‘쾅’ 소리와 함께 배가 기울었지만 허벅지까지 물이 찼고, “구조물을 밟고” 함교를 지나 좌현 쪽으로 이동했다고 진술해 천안함이 단번에 90도로 기울었다는 박연수 대위의 증언과 차이를 보였다. 만일 천안함이 바로 90도로 기울었다면 후현에 있었던 공 하사는 그대로 바다에 수장됐을 것이다. 

공 하사는 5월 24일부터 6월 2일까지 “진해 해군사령부에서 집단교육을 받았다”며 “6월부터 발령을 앞두고 적응을 위해 심리안정, 주로 정서교육을 받았다”고 증언하고 “퇴원하고 나서 다시 자대배치 받고 나서 2010년 7,8월경 국방부에 가서 조사받았다”고 추가조사 사실을 밝혔다. 

이날 공판에서 박 대위와 공 하사는 일부 사실관계 외에는 “모르겠다”는 답변으로 일관했으며, 박 대위의 경우 증언태도가 문제가 있다는 변호인 측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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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교해 본 두 증언 의외의 사실 드러나

            

  경계근무 실패 보다 더 무서운 거짓말

(서프라이즈 / 내가 꿈꾸는 그곳 / 2012-07-13)


 

 

법정에 출두한 증인들의 심리상태는 어떤 모습일까.

맨 처음 등장하는 그림 한 장을 먼저 설명하고 법정에 출두한 증인들의 심리상태 등 본론에 들어가기로 한다. 잘 닦여 광택이 반들반들 나는 '자이로 컴퍼스(Gyro Compass)'는 용산의 전쟁기념관에 비치된 참수리호 함교에서 촬영된 장면이다. 이 자료는 국방부와 합조단이 발간한 <천안함 피격사건> 합동조사보고서를 통해, 천안함을 폭침 시켰다고 하는 <1번 어뢰>의 실체를 확인해 보기 위해 들렀다가 촬영한 사진이다. 당시 참수리호의 함교에 들러서 사진촬영을 할 때 기분은 참 묘했다.

함교의 조타수나 함장 등 승조원들이 이곳에서 북한의 경비정과 전투 중에 6명이 사망하고 15명의 부상자를 남기고 침몰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이로 컴퍼스가 위치한 참수리호 함교는 그런 아픈 상처를 간직한 곳이었다. 전쟁기념관에 비치된 참수리호는 비록 실물은 아니었지만 함정 곳곳에 비치된 소품이 실물 이상의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잘 만들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여러컷 카메라에 담아 왔는데 해가 바뀌어도 그 장면만 보면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했다. 그 때가 대략 2010년 11월 4일경 쯤 된 것으로 기억한다.

참수리호에 비치된 자이로 컴퍼스는 자침(磁針)이 남북을 가리키는 특성을 이용하여 방향을 알 수 있게 만든 (항해)도구이다. 요즘은 위성항법장치(GPS)가 발달하여 자이로 컴퍼스의 존재가 무색해졌지만, GPS가 고장나는 등 비상시에는 여전히 천문기구인 육분의(六分儀,sextant)를 이용해 함정의 좌표를 확인하거나 항로를 수정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한 치 앞을 모를 전투를 치루어야 할 고속함정에도 자이로 컴퍼스가 비치되어 있는 걸 보면, 만약의 사태가 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난 7월 9일 오후 2시, 서울 중앙지법 524호실에서 속개된 천안함 사건 11차 공판에서 변호인 측은 두 증인에게 사고 당시 천안함의 속도나 항로나 기상 조건 등에 대해 반대심문을 계속하고 있었다. 천안함이 어떤 작전을 하며 작전구역의 경계근무를 하고 있었는 지 등에 대해 질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변호인 측의 반대심문 요지는 사고당시 천안함의 작전관의 직책으로 당직 근무 중이었던 박연수 대위가 어떤 임무를 수행중에 천안함이 침몰되었는 지 사고당시 정황 등을 캐 묻는 것이었다.

박연수 등 천안함의 지휘관들이 최초 해군 당국 내지 정부가 발표한 사실과 전혀 다른 증언을 통해 천안함의 진실을 은폐하고 있는 정황이 파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호인 측은 사고 당시의 일거수 일투족을 세세히 따지듯 심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변호인 측 심문 내용과 증인의 심문내용을 비교해 보기 위해 우선 천안함이 침몰하기 직전 천안함에서 최초 군 당국에 보고한 내용을 먼저 확인해 보도록 한다.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천안함이 최초 사고 당시 상부에 보고한 내용

천안함은 사고 직후인 2010년 3월 27일 합동참모본부(정보작전처장 이기식 해군준장)의 발표에 따라 "함정의 선저(바닥)가 원인 미상으로 파공되어 침몰한 것"이다.

(출처: http://media.daum.net/politics/dipdefen/newsview?newsid=20100327013004022&srchid=IIM%2Fnews%2F29644910%2Fdf21273535602457669a09dd4ffce1a0#A20100327052104407.jpg)

이러한 사실은 KBS와 조중동 등이 보도한 사실이 있다.

이랬다. 

 

"군당국이 천안함이 26일 백령도 서남방 해상에서 작전 중 침몰한 원인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에 집중하고 있다.

합동참모본부에 따르면 천안함은 이날 오후 9시 45분쯤 임무 수행 중 갑자기 함정의 밑바닥에 구멍이 나면서 침몰하기 시작했다. 천안함 승조원들은 배 밑바닥에 생긴 구멍을 막으려 했지만 수습하지 못했다고 해군 관계자는 전했다."라고 쓰고 있다.

(출처: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081806&cloc=home|sonagi|click)

 

천안함은 배 밑바닥에 구멍이 생겨 물이 새 들어오는 긴박한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승조원들이 펑크난 구멍을 막으려던 도중 (종류 미상의)물체에 부딪쳐 세 동강이 나면서 침몰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이날 법정에 출두한 두 증인의 증언은 어땠을까. 그 현장 모습을 취재 노트를 뒤적여 가며 재구성 해 보며 위증의 흔적을 찾아내는 게 본 포스트의 핵심이다.

 

 


박연수와 공창표의 서로 다른 증언 재구성

그동안 관련 포스트를 읽어오신 분들은 박연수 작전관이 작심하고 위증의 늪 속으로 돌진하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천안함이 사고 당시 긴급한 상황에 노출되어 긴급구조 요청을 한 사실이 있고, 상급부대 내지 합참에서는 이 사실을 언론을 통해 전 국민들에게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른다. 기억이 잘 안난다"며 변호인이나 방청객들을 실망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박연수는 "선저 바닥에 원인 미상의 파공을 합참에 보고한 사실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잘 모른다"고 짧게 대답했다.

 

방청석에서 박연수의 답변을 듣게 되자 갑자기 더워지는 한편, 이 사건이 '누구인가로 부터 조직적으로 은폐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기도 했다.

사고 당시 당직 근무자(사관)였던 박연수가 국방부와 합조단이 발간한 <천안함 피격사건> 합동조사보고서를 숙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박연수의 증언에 기대할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지루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천안함이 사건 발생 직전 까지 아무런 비상상황 없이 정상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다가 갑작스런 폭발로 선체가 절단되어 침몰하였다 주장 사실을, 변호인 측에 확인해 주기 위해 증인으로 출두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의 증언은 완벽해 보였다. 최소한 천안함에서 '사고 당시 상부에 보고한 내용'이 변호인 측으로 부터 제시되기 전 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박연수는 최초 사고 당시 보고 내용 등이 담긴 자료가 PPT로 재연되자 귓볼이 붉은 색 이상으로 검어지고 있었다.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그 이전 까지 박연수는 그가 감당할 수도 없는 내용 등에 대해 증언을 하고 있었는데, 최초좌초 유무를 묻는 변호인 측의 질문에 대해서는 당돌하게도 "천안함이 북한의 잠수함에 의해 피격되기 전 까지 좌초된 적이 없다"고 대답할 정도였다.

사실이 그러했다면 피격한 잠수함 내지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되는 이상의 엄청난 대가를 감수했을 것이지만, 주지하다시피 국제사회에서는 북한이 천안함을 공격했다는 그 어떤 확인도 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천안함의 일반적인 항적 등에 대해 변호인 측의 심문에 무덤덤 하게 대답했는데 증언들을 한데 모아 <그림 1>에 담아보니 대략 이런 모습이었다.

 

 <그림 1 >

 

박연수의 증언을 토대로 <그림 1>을 대략 설명하면 이러하다.

 

천안함은 사고 당시 백령도 남서쪽으로 부터 2.5마일 정도 이격된 거리(합참의 공식 발표는 1.8km)에서 반경 2.5~3마일 정도(대략 6km)의 작전구역을 속도 2~7노트로 왔다 갔다 왕복을 하며 경계근무를 하고 있었다. 이 때 바다의 파고는 대략 2.5m 내외 정도 되었고 평균적으로 좋지 않은 상태였다.

사고 직전 천안함은 북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며, 출동 전에는 장애물 상태를 확인한 후 해도를 참조하여 기동했다. 이렇게 작전반경을 이동한 회수는 1시간에 2회정도였다.

 

천안함의 주임무는 특이동향 파악과 기존의 경계근무였다. 사고 당일 시정은 약 3마일 정도였다. 또 사고 당일 달빛은 없었지만 백령도의 불빛이 육안으로 식별 가능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사고 당시 천안함이 백령도에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작전구역(반경)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박연수는 )사고 당시 쾅 하는 소리(1번)와 함께 몸이 떠 오르면서 넘어졌다. 그는 사고 직전 까지 함수 전방으로 응시(견시)하고 있었다. 함수 전방이라 함은 북서쪽을 가리킨다.

 

함교에서 견시업무는 전방과 죄우를 수시로 번갈아 가면서 한다. 사고 당시 불빛이나 섬광 내지 믈기둥은 본 적 없고 화약 냄새를 느끼지 못했다. 또 쾅 소리가 나기 직전 선저 하부가 긁히거나 충격을 받은 일이 없고 후진 사실도 없다. 사고 직후 공창규 하사가 함교로 물이 차오른다고 말했다. 사고 직후 함교에서 좌현으로 수밀문을 열고 탈출했다. 그 때 대원들이 계속 탈출 중이었다. 사고 당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함체가 우현으로 90도로 기울어졌다.

 

박연수의 증언을 일단 여기 까지만 대략 정리하겠다. 위 내용 속에서 위증의 향기가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위 내용 중에서 굵게 밑줄을 그어놓은 곳을 주목하면서 또 다른 증인의 증언을 들어보기로 한다.

 


박연수 대위의 증언과 엇갈린 공창규 하사의 증언

 

 

 

이날 공판에는 두 명의 증인이 채택됐다. 사고 당시 당직 근무자였던 박연수 대위와 공창규 하사가 증인 선서를 한 것이다.

증인석에서 증인심문은 한 사람만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박연수가 증언을 하는 동안 공창규는 법정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법정 경위가 호출하면 그 때 증인석에 앉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증언을 마친 박연수는 방청석에서 공창규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이미 그는 기회 전부를 써 먹은 상태이므로 법정 바깥에 있거나 법정내에 있거나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박연수는 법정에서 공창규의 증언을 듣게 됐다.

 

아마도 그는 공창규가 증언을 마칠 때 까지 거의 숨이 멎을 듯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정은 증언에 임하는 공창규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제아무리 입을 맞춰도 변호인들의 심문이 늘 같지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공창규는 씩씩했다. 박연수가 변호인측의 심문에 뜸을 들이며 대답하는 것과 달리 공창규 하사의 답변은 시원했다. 하지만 답변 내용은 너무 세련되어 마치 국방부가 발간한 합동조사보고서를 읽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증인석에 앉아 반대심문에 직면하면 머리에 쥐가나는 지 공창규의 내공이 변호인 측의 필살기에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공창규는 사고 당시 천안함 우현 견시 근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의 근무 시간은 오후 8시 부터 12시(자정) 까지였지만 사고로 업무가 중단된 것이다.

공창규의 증언에 따르면 견시 업무는 '함정의 눈'과 같은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는 오후 9시 5분 쯤 시계를 확인한 이후 20여 분이 지난 시간에 쾅 하는 소리를 들게 됐다.

그는 우현 견시 근무 중에 일어난 폭발로 우측 인대에 손상을 입게 됐다. 따라서 활동이 부자연스럽게 되어 "살려달라"로 소리쳤다. 이때 이강희 중사가 좌현 견시 위치 쪽으로 인도해 주었다.


우현 견시근무 망각한 공창규 하사의 증언

그는 2009년 9월  22일 발령을 받은 이후 사고 직전 까지 (6개월 정도) 줄곧 함교 우현 쪽 견시 근무를 담당해 왔다.

견시를 할 때 복장은 <그림>의 복장에 방한복을 착용한다고 했다. 3월의 백령도 앞 바다 날씨는 여전히 추웠을 것이며 바깥이라 더했을 것이다. 또  CO2 재킷은 착용하지 않고 핼맷을 쓰고 휴대용 망원경을 착용한다고 했다. 증언을 듣는 순간 참 고생스러운 근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공창규는 언제부터인가 씩씩한 답변 대신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는 사고 당시 천안함의 기동 속도에 대해서 "초임 하사라서 잘 모른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천안함이 사고 당시 진행방향을 묻는 질문에 "기억이 잘 안난다"라고 대답하며 "벌써 2년 전인데..."라고 중얼 거렸다.

이대로 가다간 증인심문이 힘들 것 같을 정도였다. 기억이 잘 안난다는 데 무슨 도리가 있겠나. 그 때였다. 변호인 측의 질문 하나가 공창규의 머리속을 비수 처럼 스쳐 지나갔다.

"증인의 우측에 백령도가 있었나요?"

"음… 기억이 잘 안 납니다."

 

공창규도 박연수와 마찬가지로 작심한 듯 증언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방청석을 쓱 돌아보니 박연수가 긴장한 듯 증인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공창규가 기억이 잘 안난다거나 모르쇠로 일관 하는 게 두려웠는 지도 모르겠다.

초계함의 당직 근무자가 경계근무를 태만히 하거나 아예 눈을 감고 졸지 않는 한 아니 존다고 할지라도, 공창규의 임무인 우현 견시 쪽에서 백령도를 볼 수 없다는 건 어불성설 이하의 (말도 안 되는)경계근무에 실패하고 있었던 장면 아닌가. 정말 큰 일 이었다.

공창규의 증언에 따르면 천안함은 작전구역내에서 항로를 이탈 하여 서서히 백령도 쪽으로 접근하며, 해군작전상황도 상의 최초좌초 위치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과 다름없었다.

천안함의 항적과 관련하여  잠시 모르쇠로 일관하던 공창규의 입을 통해 의외의 증언이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명언이 있다. '전투에서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근무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가 안 된다'라는 말이다. 피해 정도나 군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 등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군의 초계함 근무는 물론 우리 군은 24시간 국민의 생명과 재산과 국토를 방위하기 위해 경계근무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공창표 하사는 자신의 증언이 가져다 줄 파장 등에 대해 아는 지 모르는 지, 사고 이후 탈출 과정을 세세하게 기억해 내며 증언에 임하고 있었다.

 

조금 전 까지 천안함의 항로를 모른다며 발뺌하던 것과 전혀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사고 직전 까지 줄곧 백령도 근해 작전구역내에서 함교 우현 쪽 견시 근무를 담당해 왔지만, 백령도가 어디에 붙어있는 지 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이게 말이나 될 법 한가.)

박연수의 증언에 따르면 사고 당시 천안함은 북서쪽으로 천천히 느린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고, 백령도의 불빛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위치에서 초계근무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박연수 대위는 물론 공창규 하사는 무엇을 숨기고 싶었던 것일까.

 


경계근무 실패 보다 더 무서운 거짓말

법원으로 부터 소환을 받은 형사사건의 증인은 형사소송법(제156조)에 따라 증언을 하기 전에 우선 선서를 하게 된다. 선서의 방식은 증인의 대표가 선서서에 따라 "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고 낭독하고 서명.날인을 한다.

그 다음에 형법 제152조에 따라 선서를 한 증인이 허위의 진술을 하게 되면 위증죄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허위의 진술 중 주관설(객관설도 있다.)에 따르면, 진술 내용이 객관적 진실과 일치하는 지는 불문하고, 다만 증인이 자신의 기억에 반하는 진술을 하는 경우에 '허위의 진술'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판례는 주관설에 따라 '허위의 진술이란 증인이 자기의 기억에 반하는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라고 판시(대법원 1989.1.17,88도580)한 바 있다.

 

글쓴이는 법률에 무식하여 두 증인들이 어떤 위증의 벌을 받게 될 지 잘 모른다. 또 그 벌이란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 영해를 수호하고 있는 초계함 등에 비치된 자이로 콤파스 내지 GPS 등 항해 도구들과 함께, 군함의 견시 근무는 매우 중요하다.

비록 영화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견시 근무에 태만한 결과 타이타닉호는 대서양의 깊은 바다 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천안함의 사고는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려 침몰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천안함의 당직자들이 해군2함대 내지 함참 등지로 전파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군과 정부는 이러한 내용을 왜곡.호도하는 한편, 그 사실을 국민들께 사실대로 전파한 시민을 오히려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천안함 사건 재판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게 다 특정 집단의 이해 때문이라고 한다면, 특정 세력 때문에 대한민국이 좌표를 잃고 표류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당장은 처벌이 두렵고 기득권을 내 주는 게 죽는 것 보다 힘든 선택일 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선조님들과 형제자매들이 대대손손 살아오고 살아가야 할 이 땅을 알량한 매국 집단들의 먹이거리로 전락시켜야 하겠나. 우리 영해를 수호하던 46위의 구국 영령들은 배 밑바닥에 뚫린 구멍을 막으려다 몰살을 당했는 데 말이다.

천안함의 진실을 이실직고 하고 국민들께 널리 용서를 구하라. 그게 당신들이나 나라와 민족이 영원히 사는 길이다.

 

<계속>

 

내가 꿈꾸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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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 함장 최초보고 뒤집은 충격적 증언  

 

 사고 당시 당직근무자 최 함장 최초보고 뒤집어

(서프라이즈 / 내가 꿈꾸는 그곳 / 2012-07-14)


 

 

천안함의 진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저만치 사라지는 것일까.

인터넷을 뒤적이며 천안함의 추억을 되살리다 보니 그 속에 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서해 백령도 앞 바다에서 숨진 46위의 부하들을 떠나보내면서 경례를 하고 있었다. 이 사진 한 장만 놓고 보면 천안함 사건은 우리의 기억으로 부터 저만치 멀어져야 했다. 더 들추어 봐도 천안함의 진실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안 드는 장면이라고나 할까.

대통령이 우는 시늉을 해 가면서 국민적 의혹을 부랴부랴 덮어버린 천안함 사건은, 천안함의 용사들을 국립묘지에 안장을 한 것만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너무도 뻔한 사실을 한 순간에 반전 시킨 거짓말들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 최원일 함장이 있었다. 그는 천안함이 침몰된 직후 희생자 유가족들(당시 실종자 가족) 앞에서 사고 전말을 보고하던 중, 유가족들의 거센 항의로 도망다니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은 거짓말 때문이었다. 그는 해군2함대사령부 안보교육관에서 실종자 가족을 만나 사고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오른쪽으로 90도로 넘어졌고 몸이 50~60cm 정도 공중으로 떳다.폭발음과 함께 모든 통신이 중단되고 전기가 나갔다"

 

 

 

최 함장의 이같은 발언은 천안함이 침몰됐다는 소식이 언론에 전해진 직후 사흘(2010년 3월 28일)만의 일이었다. 최 함장의 발언에 따르면 천안함은 파괴력이 엄청난 폭발에 의해 사고를 당한 것으로 느껴질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최 함장의 보고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유가족들의 표정은 굳어지며 의문이 증폭되고 있었다. 최 함장의 발언은 사흘 전 언론 보도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불과 사흘전만 해도 천안함은 배 밑바닥에 구멍이 생겨 침몰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는 데, 그는 이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최 함장이 유족들의 거센 항의로 도망을 다니게 된 결정적인 발언은 이랬다.

 

"나도 함장실에서 약 5분 동안 갇혀 있었고, 일부 장교들이 망치로 문을 부숴 나올 수 있었다.밖에 나와 보니 배는 이미 반토막이 나 뒤쪽 부분은 1초만에 가라 앉아 보이지 않았다."

 

다수 유가족들은 최 함장이 상식에 어긋나는 발언을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즉각 항의하기 시작했다. 배가 어떻게 "1초만에 가라앉을 수 있느냐"며 따졌던 것이다. 그러자 최 함장은 다시 발언을 정정했다. 그는 "(천안함이) 1초만에 가라 앉았다기 보다는 그만큼 순식간에 배 뒤쪽이 사라졌다는 뜻이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의 해명은 오히려 유가족들을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한 순간에 함미 쪽에 근무하던 승조원들의 생사가 갈리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유족들의 오열이 이어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 당시 정황은 천안함 사건 2주기가 훨씬 지난 시간에 거짓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사고 당시 천안함의 견시 근무자 공창규 하사가 당시 상황을 법정에서 세세하게 증언해 주었기 때문이다. 최 함장은 사고 직후 일찌감치 이 사건의 진실을 감추기 위한 음모에 빠져든 것일까. 지난 7월 9일 오후 2시 부터 속개된 천안함 사건 11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공창규 하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는데 내용이 방대하여 주요 증언만 재구성 해 봤다. 아래 그림 <천안함 우현 견시 근무자 위치 대략>을 참조하시면서 읽어주기 바란다.

 <천안함 우현 견시 근무자 위치 대략>


공창규 하사의 법정 증언 대략
 
증인으로 나선 공창규 하사는 박연수 대위(작전관)에 이어 두번 째 증인으로 증인석에 앉았다.

공창규의 증언이 시작됐다.

 

당직 교대시 특별한 지시사항을 들은적 없다. 함수 쪽을 주로 보고 있었는데, 사고 직전 우현 견시 쪽의 난간과 봉을 붙들고 있었다(고 말했다가 정정) 사고 전에는 (난간과 봉을)잡고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천안함은 사고 전 특이상항이 없었다. 사고 당시 쾅 하는 소리를 느꼈다. 그 소리는 한번이었다. 충격이 느껴졌는 데 어떤 충격인지 잘 모르겠다. 사고 순간 함미의 섬광을 보지못했다. 주변이 (환하게)밝아진 걸 못 봤다. 사고 순간에는 주변이 어두웠다. 사고 당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사고 당시 위험에 빠졌다는 걸 확인할 수 없었다. 사고 직후 나가 떨어지지 않은 이유는 봉을 잡고 있어서 외부로 튕겨나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사고 직후) 발로 난간 나무를 밟고 있었다. 충격 당시 몸이 떠오르는 걸 못느꼈다. 무릎인대 파열로 봐서 심한 충격이라 생각한다. (우측 무릎 인대 파열은)부딪친 게 아니라 충격 때문이다.

 

 

 

배가 기울어지면서 물이 허벅지 까지 차 올랐다. (살려달라고)소리치고 한 5초(긴장 했는지...) 후에 구조됐는지...잘 모르겠다. 사고 직후 바로 구조(우현쪽으로)됐다.(기우뚱한 상태에서 주조되었는 지 묻는 질문에) 90도 기운 상태가 아니었다. 사고 직후 물기둥 못 봤다. (물벼락 등 물에 맞은 적 있는가라는 질문에) 느끼지 못했다. 물벼락을 맞은 게 아니라 기억이 없다. 옷을 갈아 입은 적 없다. 옷을 갈아 입은 건 옷이 젖어서 갈아입은 게 아니다.사고 직후 화약냄새 못 맡았다. 사고 직후 기름냄새 기억나지 않는다.

 

사고 직후 특별한 활동 못했다. 사고 직후 (좌현 갑판에)주저앉아 있었다. 해경함에서 참수리호로 다시 성남함으로 이송됐다. 구조 직후 정신이 없어서 대화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함장의 함구령 기억나지 않는다. 사고 이후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하고 수도병원 의무대에서 치료했다. 진술서는 대략 2~3번 썼는데 병원과 국방부에서 실시됐다.

천안함 승조원들은 병원 퇴원 후 2함대로 갔다. 집단교육 내용은 6월 부터 발령에 대한 적응.심리안정 거의 정서적 교육을 받았다. 대부분 2함대 고속정 생활관에서 지냈고 몇몇은 병원에 있었다.

 

공창규 하사의 증언 취지는 대략 이랬다.

변호인 측의 반대심문이 거의 끝나갈 즈음 피고인(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민간위원)의 반대심문이 짧게 이어졌다. 신 씨는 공창규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송곳 질문에 드러난 천안함의 사고 직후 상태

"사고 직후 (이강희 하사가) 구조 인도 후 함교를 거쳐 좌현으로 가셨다고 했는데 힘들던가요?"

"봉을 잡고 갔다."

사고 당시 공창규 하사는  우현 갑판(견시 쪽)에서 (그림에 표시된) 봉을 잡고 수밀문을 통해 이강희 하사의 인도를 받으며 좌현 갑판 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 때 이동시간은 공 하사가 "(잘 모른다며)해 봐야 알 것 같다."고 대답했는데, 신 씨는 이 순간 공하사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했다.

 

"배가 기울어진(각도) 문제는 중요합니다. 90도로 기울어졌는 지...?"

" ...어느정도 기울었는 지 확인해 줄 수 있습니다. 
(90도로 기울면 우현이 바다속으로 잠기기 때문에)바다에 빠진 건 아닙니다.
(물이 무릎 까지 찬 상태에서)혼자서 비스듬히 기운 좌현 쪽으로 나갔습니다. 
배가 90도로 기운 게 아닙니다."

 

대략 2시간 40분 정도 소요된  천안함 사건 11차 공판의 증인 반대심문은, 공창규가 확인해 준 사고직후 천안함의 상태를 끝으로 마무리 됐다.

 

어떤 분들은 몇 마디 안 되는 증언을 놓고 '충격적'이라는 표현을 쓸 만한 정도이겠는가라고 반문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신 전 위원이 지적한 바와 같이 천안함이 사고 직후 어떤 상태였는 지 등 초기의 자료들은, 이 사건을 보다 구체적으로 (과학적으로)접근 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천안함 사건은 최 함장의 발언 등에 나타나는 것 처럼, 최초의 (수사)자료들 다수가 은폐되거나 왜곡되어 사고의 원인을 엉뚱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위 천안함 사건 자료 이미지 출처는 'Flickr 이웃'으로 부터

 

 

이른바 초동수사(사건이 일어난 바로 뒤에 증거를 모으고 범인을 잡기 위해 행하는 첫 단계의 수사를 말함.)당시, 자료를 조작하거나 은폐 등의 방법으로 증거를 훼손하고 있었던 정황이, 사고 직후 사흘 만에 최 함장의 발언에 묻어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최 함장의 발언 이후 천안함 사건의 침몰원인은 하루가 다르게 왜곡되거나 은폐되는 등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천안함 사건은 북한의 잠수정이 발사한 <1번 어뢰>에 폭침 당하는 놀랍고 충격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국방부와 합동조사단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제 1번어뢰>는 수중에서 버블을 일으키며 천안함의 좌현에 폭발 충격을 가한 것으로 기록 됐다.

이때 수중 폭발된(?) 어뢰의 위치나 폭발력 등은 천안함이 어떤 모습으로 기울어졌는 지 등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것이므로, 천안함의 진실을 가리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는 것이다.

천안함 사건 재판의 중심에 있는 선박 전문가 신 씨가 이런 중요한 순간을 놓칠 수 있겠나.

 

아마도 최원일 함장은 공창규 하사가 자신의 공개적 보고를 뒤집게 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공창규 하사의 증언 한마디로 인해 측근과 친형 이상득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퇴임 말기의 이명박 대통령 등이 습관 처럼 내뱉던 <폭침>이란 근거는, 점점 더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됐다.

이런 걸 '하늘의 도우심'이라고 말해야 할까.

 

최 함장을 비롯한 생존자들이 희생자 장례식에서 46위의 천안함 용사들을 배웅한 지 모르겠지만, 그 영령들은 여전히 천안함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

천안함의 진실이 우리 앞에 다시금 한 발짝 다가서며 부활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천안함 사건 방청기는 계속 이어진다.

 

내가 꿈꾸는 그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