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보고 내용과 증언 달라도 너무 달라
입다문 박연수 공범 자초하나
(서프라이즈 / 내가 꿈꾸는 그곳 / 2012-07-11)
천안함 사건 당시 작전관이었던 박연수 대위는
공범(共犯)의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가
천안함 사건 11차 공판 기록을 정리하면서 착찹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착찹한 기분이란 다름이 아니었다. 나라가 온통 매국노들의 후손들이 들끓고 설치는 가운데 천안함 사건 재판이 열린 때문이다.
이들 매국노들이 들끓고 있다는 건, 누구인가 다시 그들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거나, 그들의 지배를 받지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이게 된 운명이 현재 대한민국의 현재 국운 아닌가.
변호인의 반대심문에 '아니오'를 연발하며 꼬박꼬박 대답을 하고 있던 박연수가 그런 것 같았다. 그는 본의 아니게 자신의 양심을 속일 수 있었으며, 스스로 작심하여 양심을 속이는 행위를 통해 작은 이득을 꾀할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됐다.
그는 이미 밝혀진 사실에 대해 전면 부정으로 맞섰다. 그는 ROTC 출신의 해군 장교(대위)의 신분이었지만, 그가 행한 법정 증언의 무게 때문에 대한민국을 쥐고 흔드는 권력자의 신분에 올라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왜 그런가.
그의 증언 한마디가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며, 당시 합참의 우두머리는 물론 해군의 우두머리 내지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의 퇴임 후 까지 좌지우지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뿐 아니다. 그의 증언 한마디면 독재자의 딸이 음흉하게 품고있던 꿈 까지 앗아가게 될 게 뻔했다.
그는 천안함이 침몰할 당시 천안함의 당직 근무자였고, 천안함의 진실 대부분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그가 입을 열면 매국노들의 음흉한 계략이 수포로 돌아가는 한편, 국민들로 부터 돌팔매질을 당하며 쫓겨날 게 뻔해 보였다.
천안함 사건의 진실이 가진 파워는 그 정도 이상으로 판단됐다.
그러나 박연수는 천안함 사건의 공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이후, 일반의 바람과 같은 증언을 하지않았다. 그는 오히려 기존에 드러나 있는 사실을 전면 부정하는 증언을 통해, 천안함 사건의 진실을 원점으로 다시 돌려놓고 말았다.
박연수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
박연수는 천안함 사건 당시 일반에 널리 퍼져있는 '최초좌초' 사실을 전면 부정하고 나섰다.
그는 아시아경제가 단독 보도한 '최초좌초' 사실에 대해 증언한 유가족 이용기 씨의 증언이 "사실과 다르다"며, 해군 작전상황도에서 자신이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킨 최초좌초 위치는 유가족(이용기 씨)이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자의적 판단한 것이라 증언했다.
따라서 변호인 측은 작전상황도를 펼쳐보이며 "천안함이 좌초된 상황이 있는 지" 물었다. 그러나 박연수는 "그런 사실이 없다."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한편 박연수는 언론에 공개된 최초좌초 위치를 부인하는 과정에서 납득이 어려운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빨간점과 최초좌초 위치를 분리해 설명하며, 최초좌초 위치라고 쓰여진 곳을 "최초 사고위치" 내지 '사고해역'이라고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그렇게 하면 사실이 달라질까.
그래서 박연수의 증언에 비추어 이용기 씨의 증언이 얼마나 신뢰성이 있는 지 알아보게 됐다.
희생자 유가족 이용기 씨의 '최초좌초' 증언 배경
천안함 사고 당시 희생자 유가족 이용기 씨가 언론을 통해 국민적 관심을 받게 된 이유는 그의 군이력과 무관치 않다.
희생자 가족인 이용기 씨는 부사관 출신으로 해군에서 조타수로 근무한 사실이 있는 분이다.
그는 천안함이 사고가 날 당시 즉각 2함대 사령부로 달려가 원인규명을 위해 해군측에 사고원인 등을 따지고 든 분이었다.
박형준 전 희생자유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이용기 씨는) 천안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데, 해군에서 근무할 당시 평상시 자주 나갔던 곳이고, 경도와 위도, 조류와 조수 간만의 차이 까지 다 알고 있었다."며 "백령도에는 초계함 같은 배가 왜 기동하게 되었느냐. 내가 근무할 당시엔 백령도에 근접하여 간 사실이 없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경제의 제목 "사고지역은 초계함이 들어갈 지역이 아니다."라는 내용만 봐도 천안함이 저수심에서 작전을 펼치기란 불가능 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박연수는 이용기 씨의 증언을 한 방에 묵살하고 말았다. 그는 이용기 씨가 작전상황도에서 가르킨 지점을 '사고해역'이라 부르고 있었지만, 결코 '최초좌초' 지점이라고 확인해주지 않았다.
이용기 씨의 증언을 전면 부인하고 있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천안함은 좌초되지 않았지만 사고해역에 노출되어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
박연수는 그의 당직 근무 중에 발생한 천안함 사고에 대해 처음 부터 끝 까지 아무런 이상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뺌했다.
따라서 그의 증언과 천안함이 상부로 구조요청 등을 한 최초 보고 내용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당시 언론이 보도한 자료를 뒤적여 보니 이랬다.
천안함 희생자 유가족 이용기 씨가 아시아경제를 통해 증언한 최초좌초 위치 |
박연수는 작심한 듯 변호인 측의 심문에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로 대응하면서, 변호인 측이 "(작전 중)백령도 가까이 간 것 같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 작전구역내에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작전구역 내지 사고해역은 천안함이 최초 이상 징후를 발견한 지점이었다.
천안함은 이용기 씨가 말한 최초좌초 지점 내지 박연수가 두루뭉술 표현한 사고해역에서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것이다.
최초 보고, 천안함 침몰은 배 밑바닥에 생긴 구멍 때문
사고 당시 합참의 발표를 참조하면, 박연수는 전쟁터에서 총살형을 당해도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는 형편없는 지휘관(작전관)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천안함 사고 직후인 2010년 3월 27일 합동참모본부(정보작전처장 이기식 해군준장)에 따르면, 천안함은 "함정의 선저(바닥)가 원인 미상으로 파공되어 침몰한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또 KBS와 (찌라시로 불리우던)중앙일보에서는 "군당국이 천안함이 26일 백령도 서남방 해상에서 작전 중 침몰한 원인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에 집중하고 있다.
합동참모본부에 따르면 천안함은 이날 오후 9시 45분쯤 임무 수행 중 갑자기 함정의 밑바닥에 구멍이 나면서 침몰하기 시작했다. 천안함 승조원들은 배 밑바닥에 생긴 구멍을 막으려 했지만 수습하지 못했다고 해군 관계자는 전했다."라고 쓰고 있다. (출처: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081806&cloc=home|sonagi|click)
최초 사고 당시 보고에 따르면 숨진 승조원 다수가 배 밑바닥에 생긴 구멍을 막으려다 숨진 것으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당직사관 박연수는 법정에서 태연하게 허위사실을 말하며, 46위의 호국영령들의 명예를 심히 훼손하는 등, 법정 모욕과 함께, 천안함 사건 희생 유가족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변호인측은 당시 언론에 보도된 보고 내용을 통해 "선저 바닥에 원인 미상의 파공을 합참에 보고한 사실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박연수에게 질문하자 그는 "잘 모른다"고 짧게 대답했다.
천안함 사건의 진실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로 부터 시작되는 지 단박에 드러난 셈이다.
그의 귓볼이 갑자기 검붉게 변해지기 시작했다. 박연수가 짜증투로 심문에 임한 것도 이때 쯤이다.
박연수의 증언은 국민적 배반이자 숨진 승조원 배신 행위
천안함 사건 관련 포스트를 쭈욱 읽어오신 분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박연수의 증언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단박에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가 애써 태연한척 최초좌초를 부인하며 언론 내지 국민을 통째로 기망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마도 그는 자신의 의사는 물론, 의지에 반하는 행동으로 군 생활을 하고 있을 지 모르며, 자신의 양심을 속이며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거짓된 증언으로 말미암아 46위의 천안함 용사들의 명예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히 훼손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시라. 보도에 따르면 숨진 승조원 다수가 배 밑바닥에 생긴 구멍을 막으려다가 몰살을 당한 마당에, 다행히도 생존자 그룹에 낄 수 있었던 그가, 국민들을 기망하는 간신배 내지 뼈속 까지 친일.친미 행태로 일관하는 매국노들 편에 서 있었으니 말이다.
천안함 사건 재판 11차 공판에 증인으로 나선 박연수는 진실의 길을 외면한 채 공범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최초 천안함이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려 매우 급박한 구조요청을 한 사실을 부정하는 대신, 천안함 사고 2주기가 지난 어느날 법정 증언을 통해 "최초좌초 사실은 없었고, 사고 직전 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는 취지로 이를 지켜보는 방청인들을 실망시키고 있었다.
그렇다고 천안함이 폭침되었다는 증언을 한 사실도 없었다. 그는 자의적 판단으로 천안함이 어뢰에 피격되었을 것이라 했지만, 어뢰 폭발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화약냄새는 물론 섬광이나 물기둥을 전혀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우리가 이런 지휘관 내지 이런 밥통군대나 정권에 나라와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맡기고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법률에 무식한 글쓴이가 발끈하여 공범이 무엇인지 뒤적거려보니,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공범이란, "단독으로 규정되어 있는 구성요건을 여러사람이 가공(加功)하는 범죄"라고 말하고 있었다.
천안함 사고 당시의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을 박연수 작전관은 어느새 나라와 국민을 배신한 대가로 알량한 목숨을 부지하며, 범죄조직에 가담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의 행위는 천안함의 진실을 잠시 늦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영원히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천안함 사건 방청기는 계속이어진다.
내가 꿈꾸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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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공판] 사고해역 수심 20m 내외… 합조단 주장 “46m”와 달라 조현호 기자 | chh@mediatoday.co.kr
충격 증언, 천안함 작전관이 말한 사고 지점은 달랐다
천안함 사고해역의 수심에 대해 사건당시 당직사관이었던 천안함 작전관이 “수심은 20m 내외였다”고 증언해 ‘북한 어뢰를 맞고 함미가 침몰한 곳의 수심이 45~47m’라는 국방부 합조단 발표와 크게 차이가 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수심 20m인 곳은 어뢰피격지점이라고 발표한 지점으로부터 크게는 2km 이상 떨어져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수심 20m인 곳 가운데엔 작전상황도상 ‘최초좌초’라 기재된 백령도 해안가도 포함돼있다.
또한 사고직전 천안함 후타실 CCTV 장면인 것으로 오인케 했던, 천안함 합조단 최종보고서 상의 사진에 등장하는 승조원 가운데 생존장병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보고서에 있는 사진은 천안함 사고 직전 상황은 아니라는 증언도 나왔다.
천안함 사고 당시 천안함 작전관이자 당직사관이었던 박연수 해군대위는 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박순관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에 대한 천안함 12차 공판에서 ‘사건직후 어뢰피격으로 판단한 이유’에 대해 “수심이 20m 내외였고, 수상 특이접촉물이 없었으며, 절단면을 확인한 결과 이런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은 어뢰 뿐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사건직후 수심이 20m라 판단한 근거에 대해 박 전 작전관은 “배에 측심기가 작동하고 있었고, 그를 보고 판단한 것”이라고 밝혔다. ‘쾅’하는 소리가 나기 직전에 확인한 것이냐는 변호인측 신문에 그는 “(수심에 대한 상황을) 수시로 본다”고 답했다.
박 작전관은 ‘사고시간이 2010년 3월 26일 21시20분 이후’라고 판단한 근거에 대해 “매시간 30분마다 문자정보망을 이용해 기상보고를 하는데, 보통 5분 전에 미리 작성한다. (당직장병이) 문자정보망을 작성하는 것을 봤다”며 “그 시간은 내가 추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천안함 작전상황도에 박영선 민주당 의원의 천안함 항적자료를 기입한 것.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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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박 작전관은 천안함이 백령도 서남해안에서 A지점(21시05분)에서 B지점(21시09분)으로 유턴(변침)했다는 박영선 민주당 의원의 항적자료 상 위치를 사고 다음날 유가족에게 상황 설명을 했던 ‘작전상황도’에 적용할 경우, 천안함이 사고시각(21시22분)에 ‘최초좌초’(백령도 서방근해) 지점까지 간 것 아니냐는 변호인 신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답했다. 지난달 최원일 전 천안함장이 밝혔던 ‘가능성이 있다’는 답과 동일했다.
박 전 작전관은 사고 당일 천안함이 경비구역에 대해 남동~북서 방향으로 변침하며 1시간 당 2회 정도씩 순환기동했으며, 기동 속도는 6~7노트(시속 12km)였다고 밝혔다. 이를 계산한 대략적인 항적의 총 길이가 6km 되느냐는 변호인의 분석에 대해 박 전 작전관은 “그렇다”고 시인했다. 사고당시 해상상태는 파고 2.5m 내외였으며 시정은 3마일이었다고 그는 전했다.
박연수 전 천안함 작전관(해군 대위)이 9일 오후 재판을 마치고 재판정을 나서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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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두고 신 대표의 변론을 맡고 있는 김형태 변호사는 “어뢰피격지점의 평균수심이 47m라는 것이라면 박 작전관의 수심 20m 증언은 사고지점이 전혀 다르다는 뜻”이라며 “국방부 합조단 보고서상 사고위치와 전혀 맞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언”이라고 지적했다.
최문순 당시 민주당 천안함 특위 위원과 함께 지난 2010년 8월 백령도 사고 해역 탐사를 진행했던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는 9일 밤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당시 백령도 서방과 서남방쪽의 수심이 20m인 곳에서 함미 침몰지점(어뢰피격지점)인 수심 45~47m 지점까지는 적어도 2km 이상은 떨어져있었다”며 “어뢰를 맞고 6~7노트의 속도로 기동했다해도 10분은 걸리며, 어뢰에 맞고 엔진이 정지된 상태에서 표류한 채 그리로 간다는 것은 당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조류 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 대표는 “‘어뢰맞은 자리가 20m 해역’이라는 박 전 작전관의 증언대로라면 침몰해역 수심이 45~47m라는 국방부의 사고지점 발표는 또 틀리다는 얘기”라며 “백령도 해역 탐사 때 조사한 바로는 오히려 작전상황도상 ‘최초좌초’라 찍힌 곳이 수심 20m 해역”이라고 지적했다.
천안함 함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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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사고당시 수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천안함 당직사관이 사고해역 수심을 20m라고 증언한 것은 국방부 합조단의 보고서 내용을 반박한 의미이기도 하다고 이 대표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와 함께 이날 재판에서는 사고 순간 ‘꽝~꽈앙’(1~2초 간격)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함수가 우현 방향으로 90도 각도로 기울어졌다는 국방부 합조단 주장의 진위도 도마에 올랐다.
박연수 전 작전관은 사고 순간 ‘쾅’ 하는 소리와 자신이 20~30cm 떠올랐다가 넘어졌고, 배가 순식간에 오른쪽으로 90도 각도로 기울어졌다고 증언했다. 특히 그는 “내 체감한 것으로는 그렇다”며 “우현쪽 바닥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에 반해 사고당시 천안함 함교 우현에서 견시업무를 했던 공창표 하사는 이날 재판에 나와 “(쾅하는 소리와 함께) 충격이 생긴 순간에 (함교쪽에 있는) 봉을 잡고 (발로) 난간을 받치고 있어서 튀어나가지 않았다”며 “(충격시 떠오른 것은) 못느꼈다”고 밝혔다.
공하사는 함수가 기울어지는 순간에 대해 “허벅지까지 물이 찼고, 기울어지는 과정에서 물이 빨리 들어왔다”며 “이광희 중사가 문을 열고 나오라고 해서 나갔는데, 우현에서 좌현으로 중앙문을 통해 좀 많이 밟고 가야 했다. 몇도인지는 모르지만 90도로 기운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한편, 천안함 최종보고서상에 사고직전 천안함 후타실에 최후장면인 것으로 오인할 수 있는 CCTV 사진 속 등장인물과 관련해 박연수 전 작전관은 “이 중 한 명은 김용현 병장”이라며 “마지막장면은 아니다. 이 사진이 녹화된 것의 마지막인지, 사고 1분전인지 모르겠으나 사고순간이라면 맞지 않다”고 밝혔다.
천안함 함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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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사실 뒤집은 증언 왜 그랬을까
유가족 이성잃게 만든 박연수 작전관의 증언
(서프라이즈 / 내가 꿈꾸는 그곳 / 2012-07-10)
천안함 사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심정은 어떨까.
어제(9일)오후 2시 부터 서울중앙지법 서관 524호 법정에서 천안함 사건 제11차 공판이 속개됐다. 11차 공판은 방청객들이 입추의 여지 없이 방청석을 가득 메우고 취재진이 복도에 쪼구려 앉아 취재를 할 정도로 일반의 관심이 폭발한 공판이었다. 이 공판의 중요성을 보여준 공판의 모습이다. 이날 공판은 천안함 사건의 향방을 결정해 줄 중요한 공판이었는 데, 증인으로 출석한 당시 천안함 작전관 박연수 대위가 그 중심에 있었다.검게 그을린 얼굴에 상기된 표정 때문에 귓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박연수는, 증언 내내 변호인단과 방청객의 기대를 비켜가고 있었다. 이날 박연수의 증언을 통해서 본 천안함은 한마디로 '밥통해군'의 면모를 200% 드러냈다고나 할까.
박연수는 아시아경제가 보도한 최초좌초 위치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한편, 천안함 사고 직후 <아시아 경제>를 통해 밝혀진 '최초좌초' 위치는 유가족이 이성이 잃은 상태에서 자의적으로 판단한 것이라 말해, 향후 유가족과 마찰을 피할 수 없게 된 한편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박연수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언론이 오보를 한 셈이자, 22전대장 이원보 대령(최원일 함장 직속 상관)을 궁지에 빠뜨리고 말았다.
유가족 이용기 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원보 대령이 천안함 사고 브리핑에서 해군작전상황도를 펼쳐놓고 유가족을 향해 최초좌초 위치를 설명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박연수의 증언에 따라 유가족 이용기 씨는 (이성을 잃은)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최초좌초 위치를 가공한 인물인가. 천안함 사건 재판이 시작된 이래 생존자들이 (재판과정에서)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다.
*천안함 사고 당시 천안함의 작전관이었던 박연수 대위는 '최초좌초'라는 위치가 적시된 '아시아경제'의 보도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나서는 한편, 박연수 자신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최초좌초 위치는 유가족이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자의적으로 판단한 것이라 증언했다. 상식 밖의 일이 법정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아울러 이날 공판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천안함이 사고 직후 즉각 90도 각도로 우현으로 쓰러진 게 아니란 점도, 박연수와 함께 증언에 나선 공창표 하사(사고 당시 당직)의 증언으로 밝혀지며 천안함 사건 재판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변호인단의 끈질긴 질문 끝에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천안함의 항적이 어렴풋이 드러나기도 했다. 사고 당시 천안함은 백령도 서북쪽으로 이동하며 작전을 펼치고 있었고 작전반경은 대략 6km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박연수와 당직 하사 공창표의 증언 등에 따르면, 사고 당시 천안함은 눈을 감고 작전을 감행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천안한 함교 좌우현에 위치한 견시 업무 당직자들이 백령도의 위치 조차 식별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연수와 공창표의 증언 다수는 증인들이 (이미 드러난 사실 등에 대해)거짓말을 하거나 '모른다. 기억이 안 난다' 등으로 발뺌을 하기도 했다. 또 증인 두 사람 모두 (1번 어뢰(?)가 폭발할 당시)물기둥이나 섬광을 본 적도 없다고 말해 당시 합조단 관계자들이 가공한 <1번 어뢰>의 존재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울러 피고인(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민간위원)이 박연수에게 심문한 내용을 통해 드러난 사실에 따르면, 합조단의 <천안함 사건 보고서>는 급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빨간 거짓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합조단이 발간한 천안함 사건 보고서에서 이미 고인이 된 후타실의 승조원 중 '김 모 병장은 생존자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관련기사[천안함 제12차 공판] 함미 후타실 마지막 영상 속에서 생존자 확인 박연수는 신 씨의 이같은 취지의 질의 내용에 대해 "사고 순간이라면 맞지 않다. (신 씨의 말)에 동의한다"라고 말해 합조단이 발간한 천안함 사건 보고서가 명백한 거짓임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날 공판은 대략 2시간 4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변호인단과 증인의 열띤 질문과 답변으로 인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는데, 눈에 띄는 대목이 박연수의 증언으로부터 나왔다. 박연수는 작심한 듯 유가족의 증언을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깔아뭉게며 최초좌초 사실을 부인하고 있었는데, 박연수나 공창표의 증언을 참조하면 천안함은 사고 직전 까지 근무자에게 이상징후가 발견되지 않았고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는 것이다. 천안함은 한 순간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사고 직후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유독 박연수가 확인해 본 천안함 절단면은 스스로 어뢰의 공격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박연수는 변호인단이 작전구역 변경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귀찮은 듯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상급부대의 위협 때문에 바꿀 수 있지. 임의로 못 바꾼다"
46명의 승조원을 앗아간 천안함 사건은 사고 직전 상급 부대의 지시에 따라 작전구역을 벗어나게 된 것일까. 박연수는 재판이 끝난 후 법정 앞에서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이 건넨 명함을 뿌리치고 먼저 자리를 떳다. 앞 뒤 맞지 않는 증언 등 방대한 자료의 방청기는 따로 정리해 소개해 드린다.<계속>
내가 꿈꾸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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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사고위치 사고원인 바뀌나?
천안함 당직사관 박연수, "수심 20m 내외" 법정증언
(통일뉴스 / 김치관 기자 / 2012-07-11)
천안함 사고 당시 당직사관이었던 박연수 전 작전관이 법정에서 천안함 사고해역의 수심이 20m 내외라고 증언해 천안함 사고지점이 바뀔지 주목된다. 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 역시 법정증언 시 수심 20m 이상을 언급한 바 있으며, 사고지점이 바뀔 경우 사고원인도 달라질 개연성이 높다.
박연수 해군 대위는 9일 오후 2시부터 서울중앙지법 서관 523호에서 제36형사부(재판장 박순관) 심리로 열린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의 천안함 관련 12차 공판에서 천안함에 장착된 측심기에 나타난 수심은 “20m 내외였다”고 증언했다.
박 대위는 “배의 함교에 측심기가 있다. 항상 기동항해를 할 때 측심기를 계속 작동시켜놓고 수시로 확인한다”며 사고 지점 수심을 “20m 내외로 기억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민군합동조사단은 천안함 사건 최종보고서에는 “수심 47m” 지점에서 사건이 발생했다고 특정하고 있어 상당한 차이가 난다.(176쪽)
“수심 20m 내외”와 “수심 24m”
▲ 천안함 작전관으로 사건 당시 당직사관이었던 박연수 대위가 9일 오후 증언을 마치고 재판정을 나서고 있다. [사진 - 미디어오늘 이치열 기자] |
최원일 전 함장도 지난 6월 11일 법정진술에서 좌초설을 부인하면서 “(천안함) 홀수는 높이가 3m고 수심이 20m 이상인데 어디서 암반이 올라와서 박겠느냐”고 말한 바 있다.
이같은 “수심 20m 내외” 증언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다른 정황도 있다. 사건 하루 뒤인 3월 27일 국회 국방위에 출석한 이기식 합참 정보작전처장은 “어제 3월 26일 21시 30분 백령도 서남방 1마일 해상에서 아 초계함이 원인미상으로 침몰된 상황 관련 보고”라면서 “사고지점은 수심 24m”라고 보고했고, 29일 국방부 일일브리핑에도 24m, 30일 해양경찰청 보고에 25m가 등장한다.
사고지점 수심이 47m가 아니라 20m 내외라면 그만큼 천안함이 백령도에 근접해 운항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고 백령도 서남방 1마일이라며 1.6km로 사고지점으로 발표된 2.5km 보다 훨씬 근해임을 알 수 있다.
대청해전과 “백령도 서남방 1마일”
‘백령도 서남방 1마일’은 28일 국방부 일일브리핑과 29일 국방부 민주당 당정협의회 보고, 심지어 4월 7일 합조단 발표 시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천안함 사건 발생 직후부터 군 내부 소식통으로부터 나온 ‘정부 발표와 달리 천안함은 백령도 1㎞ 이내까지 근접했다가 10m 이내의 저수심 지역에서 사고가 났다’는 제보가 보다 신빙성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천안함이 백령도에 근접한 저수심 지역을 운항한 이유에 대해 최원일 전 함장은 법정 증언에서 “대청해전 이후 북한군의 해안포 위협에 대비해서 음영구역이라고 설정된 곳에서 은폐차원에서 경비한 것”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박 대위도 “전년도(2009년)”에 “상급부대에서 ‘어떠어떠한 적의 위협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구역을 바꿨다’라고 지시를 했고 지시에 의해서 바뀐 것”이라고 증언했다.
대청해전이 2009년 11월 10일 발생했고, 이를 교훈삼아 상급부대에서 백령도 음영구역을 이용하도록 지시했다면 천안함이 백령도 인근해역으로 항로를 설정한지 몇 달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건이 발생한 셈이다.
별표지점은 백령도에서 '1.12km' 거리
천안함은 왜 백령도 방향으로 유턴(변침)했나?
▲ 박연수 대위는 자신이 사고해역을 지목했다고 증언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 최초 좌초 별표지점을 특정해 구글어쓰를 통해 거리를 확인한 결과 1.12km로 나타났다. [사진 - 통일뉴스] |
박 대위는 사고 다음날인 27일 유가족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작성했던 작전도 사진 중 손가락으로 가리킨 지점과 관련 “‘사고해역은 이 근방이다. 백령도 남서쪽 이 해역이다’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씀드린 적 있다”고 확인했다.
또한 유족 중의 한 명인 이용기 씨가 ‘최초 좌초’라며 별표로 표시한 지점과 관련 ‘별표지역을 지나갔을 가능성도 있느냐’는 변호인 신문에 “있다”고 답했다.
최원일 전 함장도 법정 증언에서 ‘천안함이 사고 직전 별표지점 쪽으로 지나갔던 것 아니냐’는 변호인 신문에 “좌초라고 표기된 데를 지나갔을 수도 있는데, 거기는 암초가 없다”고 통과 가능성을 시인한 바 있다.
박 대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지점이나 박 대위와 최 함장이 모두 통과 가능성을 인정한 별표지점은 백령도 인근 해역으로 박 대위가 평소 항로라고 증언한 ‘2~2.5마일’(3.2~4km)이나 합조단이 사고지점으로 발표한 2.5km 보다 훨씬 가까운 지점이다.
별표지점을 특정해(37-56-30N, 124-36-50E) 구글어쓰의 거리측정 기능을 이용해 측정해보면 1.2km 이내임을 알 수 있다.
▲ 천안함은 A지점(21:05시)에서 B지점(21:09시)으로 마지막 유턴(변침)을 했다. 신상철 대표는 바다 쪽이 아닌 수심이 낮은 백령도 쪽으로 변침한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캡쳐사진 - 통일뉴스] |
신상철 대표는 박영선 의원이 군측으로부터 입수해 공개한 KNTDS(해군전술지휘통제시스템) 좌표를 근거로 천안함이 마지막 유턴(변침)시 바다 쪽으로 하지 않고 백령도 쪽으로 변침한 대목을 지적했지만 박 대위는 그래도 문제가 없었다고 답했다.
박 대위는 천안함이 정해진 작전구역 운항시 ‘1,000 야드’(0.9km) 정도의 범주 내에서 운항한다고 밝혀 실제로 천안함이 남동쪽에서 마지막 변침시 백령도에 상당히 근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신 대표는 <통일뉴스>와의 통화에서 “바람이 북서풍이면 회전반경(터닝써클)이 길어져 유능한 항해사라면 수심이 깊은 바깥 쪽으로 돌려야 한다”며 “항해 경험이 별로 없어 백령도 쪽으로 터닝해 결국 별표지점 같은 저수심에 들어선 것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수심 24미터라면 어뢰나 계류 기뢰 가능성 없어”
또한 천안함 사고해역의 수심이 20m 내외에 불과하다면 정부가 발표한 북한 어뢰에 의한 수중폭발 논리도 재검토될 필요성가 있다.
합조단은 최종보고서 발표 기자회견에서 “가스터빈실 중앙 좌현 3m, 수심 6~9m에서 고성능 폭약 250kg이 폭발하여 천안함이 피격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확언한 바 있다.
▲ 합조단 최종조사보고서 어뢰 공격도. 수심이 20m 내외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캡쳐사진 - 통일뉴스] |
수심 47m 지점에서 수심 6~9m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것과 수심 20m 내외의 지점 수심 6~9m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것은 많이 다를 수 있다.
서재정, 이승헌 등 재미학자들은 2010년 10월 17일 합조단 보고서를 반박하는 보고서에서 “사고지점의 수심이 24미터라면 어뢰가 오작동 등의 이유로 해저에 충돌하며 폭발했을 가능성을 제외하고는 어뢰나 계류 기뢰의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며 “대신 천안함을 타격한 원거리 폭발물은 해저에 고정되어 있거나 해저에 가까운 곳에 있었던 폭발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한겨레> 6월 23일자 보도에 따르면 안수명 박사는 어뢰가 천안함 선체 밑에 머무르는 순간 버블젯 폭발을 일으킬 확률을 0.0000001% 수준으로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분석했는데, 수심이 더욱 낮은 곳에서 절묘하게 적정한 수심에서 터져줄 확률은 더욱 줄어든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후타실 CCTV 김 모 병장은 생존자
박연수.공창표, ‘물기둥 보지 못했다’ 증언
이날 재판정에서 박 대위는 ‘항해하는 동안 백령도가 육안으로 식별가능 했느냐’는 질문에 “불빛이 육안으로 식별됐다”고 답했으며, 사고 순간 선광이나 물기둥은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 합조단이 천안함 최후의 모습이라고 공개했던 CCTV 녹화 장면은 사고 한참 전의 모습인 것으로 확인됐다. 함미에 위치한 후타실 사진에 나타난 앞쪽 김 모 병장은 생존자로 확인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또한 최원일 전 함장이 유일하게 신상확인을 하지 않았던 후타실 CCTV 사진에 나타난 김 모 병장의 실명을 확인했으며, 김 병장은 생존장병 명단에 포함됐기 때문에 “사고 순간 (사진)이라면 맞지 않다”고 증언했다.
천안함 우현 견시를 담당했던 공창표 하사는 사고 당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며 “물기둥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으며, ‘물벼락을 맞았느냐’는 질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봉을 잡고 있었고 튕겨져 나가지 않았다”며 “발로 나무 난간을 밝고 있어서 오른쪽 무릎 인대가 파열됐다”고 설명하고 “허벅지까지 물이 찼다”고 증언했다.
공 하사는 ‘쾅’ 소리와 함께 배가 기울었지만 허벅지까지 물이 찼고, “구조물을 밟고” 함교를 지나 좌현 쪽으로 이동했다고 진술해 천안함이 단번에 90도로 기울었다는 박연수 대위의 증언과 차이를 보였다. 만일 천안함이 바로 90도로 기울었다면 후현에 있었던 공 하사는 그대로 바다에 수장됐을 것이다.
공 하사는 5월 24일부터 6월 2일까지 “진해 해군사령부에서 집단교육을 받았다”며 “6월부터 발령을 앞두고 적응을 위해 심리안정, 주로 정서교육을 받았다”고 증언하고 “퇴원하고 나서 다시 자대배치 받고 나서 2010년 7,8월경 국방부에 가서 조사받았다”고 추가조사 사실을 밝혔다.
이날 공판에서 박 대위와 공 하사는 일부 사실관계 외에는 “모르겠다”는 답변으로 일관했으며, 박 대위의 경우 증언태도가 문제가 있다는 변호인 측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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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사망 처리한 합조단 보고서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김용현 병장의 기막힌 사연
(서프라이즈 / 내가 꿈꾸는 그곳 / 2012-07-12)
누가 억울하게 숨진 천안함 장병들을 욕되게 하는 것일까.
천안함 사건 재판 기록 등 천안함 관련 포스트를 끄적이면서 느끼게 되는 점 몇 가지가 있다. 천안함 사건을 끄적이고 있노라면 대한민국의 참혹한 정치현실이 한순간에 오버랩 되면서 천안함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왜 숨졌는지 조차 모른 채 억울하게 숨진 승조원들의 명예를 되찾게 되면, 그 보다 더 뿌듯한 일이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일을 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적지않다. 그분들은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하고 있는 분들이다. 그분들은 법정에서 천안함의 진실을 밝히고 있는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민간위원과 변호인단이다.
글쓴이는 인터넷 포털을 통해 천안함의 진실을 매우 제한적으로 알리고 있는 셈인데, 대다수 언론과 방송들이 눈과 귀를 막고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동안 대한민국은 이런 나라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래서 포스트를 끄적이면서 한편으로는 뿌듯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슬픈 생각과 함께 분노가 치미는 것이다.
사람들이 진실에 목말라 있을 때 그들은 거짓과 위선의 편에 서서 사회적 약자를 더욱더 힘들게 만드는 한편, 그들 스스로 권력이 되어 사실을 왜곡.호도 하며 국민들의 알권리를 심히 방해하거나 훼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행하고 있는 불편부당한 일들 때문에 국민들이 만들어 낸 권력은 어느새 국민들을 짓밟는 도구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천안함 사고는 그런 부조리한 현실이 극에 달했을 때 일어난 비극이라고나 할까.
천안함 사고는 군 당국이나 이명박 정권의 합조단이 발표한 보고서와 달리 대부분의 사실이 거짓으로 은폐되고 있었는데, 그 역할 대부분을 군 당국의 관련자들이 하고 있었다. 군이 특정 정권과 한 통속이 되어 천안함 사고를 조직적으로 은폐한 사건이 천안함 침몰사건이 잉태한 비극인 것으로 사료되는 것이다.
글쓴이는 그 비극이 극적으로 반전되어 억울하게 숨져간 46위의 천안함 승조원들이 영면하기를 학수고대하고 하며 포스트를 끄적이고 있다.
지난 9일 오후 2시 경, 서울 중앙지법 서관 524호 법정에서 속개된 11차 천안함 사건 공판에서는 전혀 뜻하지 않았던 증언이 글쓴이를 놀라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가리켜 천우신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글쓴이를 놀라게 만든 증언은 이날 증인으로 나선 박연수 작전관(대위)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는 신 전 위원의 조용하고 나직한 반대심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김 병장은 생존자가 맞다. (신 씨의 주장에) 동의 한다. 사고 순간의 영상이라면 맞지 않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발간한 <천안함 피격사건> 합동조사결과 보고서에서 발췌한 그림 |
신 씨는 법정에서 PPT를 통해 천안함 사고 당시의 후타실 장면이 담겨져 있는 사진(영상켑쳐)을 박연수에게 보여주며, 천안함의 사고 순간과 장병들의 이름을 묻게 된 것이다. 사진 속에서 확인이 안 된 장병 이름은 '김용현 병장'이라고 박연수가 단박에 확인해 주었다.
신 씨가 제시한 사진은 합조단에서 발간한 <천안함 피격사건> 합동조사결과 보고서에 적시된 장면이었다. 처음 천안함 사건을 접하신 분들은 이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 지 잘 모르실 것 같다. 따라서 '구사일생으로 생존하게 된 김용현 병장의 기막힌 사연'을 통해, 천안함 사건이 군 당국이나 민간의 사이비 과학자 등으로 부터 어떻게 조직적으로 은폐되고 있었는 지 확인해 보는 게 본 포스트의 핵심이다.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김용현 병장의 기막힌 사연
박연수가 신 씨의 반대심문에 답변하게 된 건 심문이 거의 끝나갈 때 쯤이었다. 박연수는 변호인측의 계속된 질문에 피곤한 모습이 역력했다. 이런 사정은 변호인측이나 방청석에서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나 재판부 모두 같은 사정으로 보였다.
특히 박연수의 입장에서는 지루하기 짝이없는 시간이었을 것 같다. 그는 <천안함 피격사건> 합동조사결과 보고서를 숙지하고 있었는 지, 천안함 사고 당시에 일어난 내용들에 대해서는 합동조사결과 보고서 내용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답변으로 사실을 전면 부정하고 있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천안함은 사고 직전 까지 좌초 등 비상상황과 같은 이상징후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답변하고 있던 중이었다. 따라서 천안함은 침몰 직전 까지 경계근무를 소홀히 한 적 없었다고 항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연수 스스로 자신의 증언 때문에 자승자박할 줄 누가 알았겠던가.
박연수가 변호인 측의 심문에 딱 걸려든 것은 그가 확인해 준 김용현 병장의 생존 사실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국방부가 발간한 '천안함 피격사건 합동조사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김용현 병장이 사망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마땅했겠지만, 김병장은 버젓이 생존자의 명단에 등극해 있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합조단이 공개한 '후타실 CCTV' 무엇이 문제인가?
지난 6월 11일에 속개된 천안함 사건 10차 공판 당시 글쓴이는 해외에 체류 중이었으므로, 합조단이 공개한 후타실 CCTV 내용이 재판에서 거론된 사실은 귀국 후에 알게 됐다. 따라서 당시 재판 기록을 통해 국방부와 합조단이 발간한 합동조사결과 보고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위 <자료1>를 잘 살펴봐 주시기 바란다.
PPT자료에 적시된 것 처럼 천안함의 후타실에서 숨진 승조원들은 모두 4명(중사,하사,병사,상병)이다.
그러나 최종보고서 211페이지에 나오는 동영상(켑쳐자료)에는 하사 2명과 병장 2명 상병 1명 및 근무자 포함하여 모두 6명의 대원이 CCTV에 촬영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최종 보고서 129페이지에 적시된 사실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보고서의 자료는 국방부와 합조단 등이 실수로 잘못 기재한 것일까.
합동조사결과 보고서<자료2>를 펼쳐 다시 한 번 확인해 봐도 후타실에서 숨진 승조원은 모두 4명이며, 신 씨가 작성한 PPT 자료와 일치한다.
국방부와 과학자들이 <1번 어뢰> 포함하여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천안함 피격사건 최종보고서>에서, 이 같은 오류가 발생하게 된 건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천안함 사고 당시 군 당국은 일반의 바람과 달리 구조작전을 차일피일 미루며 엉뚱한 짓을 하고 있었다. 차가운 바다속에 수장된 천안함 승조원들은 이미 숨졌을 시간에 엉뚱한 장소에서 구조활동을 펼치는 등 의혹을 부풀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해군 2함대 사령부가 언론에 공개한 내용이 천안함 실종자들의 위치였다.
<자료3>출처: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0/03/29/0200000000AKR20100329001300061.HTML?did=1179m |
위 <자료3>은 천안함이 침몰한 지 사흘째 되던 날 해군 2함대 사령부가 언론에 공개한 자료를 연합뉴스가 그래픽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천안함 침몰 당일인 3월 26일 현재 실종된 승조원별 근무위치를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희생자유가족 내지 실종자 유가족들은 이 내용을 접하고 실신하거나 거의 실신 지경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생존자를 제외하면 이 명단은 이미 숨진 승조원들의 명단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 때 후타실에는 언급한 김용현 병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후타실에 위치한 5명의 승조원들은 <자료3>과 같다.
해군2함대사령부는 이날 자료를 발표하면서 "평소 해당 시각 승조원들의 근무위치,생존자들의 진술 등을 종합해 추정했다"며 "천안함 사고시점인 9시 30분 당시 실종자 46명의 근무위치를 밝혔다."고 연합뉴스가 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합조단의 최종보고서에는 김용현 병장이 왜 후타실에서 발견된 것일까.
주지하다시피 천안함 사건 재판은 당시 국민적 관심사였던 <천안함 사고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불거진 여러 원인 들 중에 이 분야의 전문가 위치에 있던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민간위원이 '최초좌초' 등을 언급하면서 시작된 사건이다.
당시 글쓴이는 피로파괴를 주장하고 있을 정도로 이 사건을 둘러싼 원인 추적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또 초유의 사건이었으므로 언론들이 거의 매일 특종을 만들어 내며 앞 다투어 보도에 참여한 보기 드문 사건이었다.
<자료4> |
특히 천안함 사건이 일반의 관심을 부추긴 건 우리 해군 승조원들이 숨지거나 초계함이 침몰된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군 당국이나 정부가 이 사건의 원인 등을 숨기기 위해 정보를 조작하는 의혹이 쉽게 들 정도로, 일반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조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천안함의 후타실이 관심을 끈 이유는, 천안함이 최초 좌초되었다는 언론의 보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 보도는 군 당국으로 부터 일반에 전해졌으므로 천안함이 조타장치 등 기동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또 당시 일반의 관심이 후타실에 집중된 건 당시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천안함 가족들의 통화 및 문자내용을 공개<자료4>하면서, 국방부 발표시간 이전에 비상상황이 있었다는 사실을 언론에 공표한 시점이었다. 사고 당시 후타실에 5명이 있었다는 해군(발표)의 추정이 후타실의 존재를 부각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후타실은 배의 엔진과 스크루가 연결돼 방향을 잡는 조타장치가 있는 배의 가장 후미 부분에 있는 것으로, 한 해군 전역 장교는 언론을 통해 "후타실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평소 승조원들이 들어가는 경우가 흔치않다"고 말한 곳이었다.
<자료5> |
이 기사를 취재한 노컷뉴스의 한 기자는 "실제로 지난해(2009년) 해경 경비함 취역 행사때 해경 함장과 기관장으로 부터 후타실에 직접 들어가, 그곳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 있다"라고 말하며, 당시 해경 기관장도 "후타실에는 배의 엔진과 연결된 스크루 등에 이물질 등이 끼이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만 들어가는 곳으로, 시끄러운 엔진 소리 때문에 비상시를 제외하고는 승조원들도 웬만해서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출처 http://www.joongdo.co.kr/jsp/article/article_view.jsp?pq=201004010118 >
후타실은 그런 곳이었다. 배의 조타장치가 고장 나면 수동으로 배의 방향을 조종할 수도 있지만 그 때는 '비상상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언론의 관심이 후타실에 집중되자, 국방부는 무엇을 감추고 싶었는 지 적극적인 해명에 나서면서 당시 "후타실에 있는 대원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발표를 하게 된다.
찌라시로 불리우는 조선일보<자료5> 등이 해명 보도에 나섰다.
김용현 병장이 후타실에 등장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후타실이 거론되면서부터 였다.
<천안함 피격사건 최종보고서>에 적시된 켑쳐영상의 화면 속에는, 천안함 승조원들이 편안한 운동복 차림으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담고 있으므로, 국방부의 주장 처럼 운동 중이었거나 비상상황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국방부가 영상에서 발표한 내용의 인원수는 4월 15일 함미를 인양하고 희생자를 수습할 당시 발표내용과 다르고 계급조차 다르게 나타난다.<자료6 참조>
<자료6> |
해군 당국이나 국방부가 전혀 능력도 없고 관심도 없었던 함미 인양은 천안함이 침몰한 지 거의 20일이 경과하고 있었다.
그동안 국민들의 관심은 줄곧 실종된 승조원들을 향하고 있었지만, 국방부 등은 사실을 감추기 바빴던 지, 언론 보도를 계속 뒤집거나 수정하는 일이 잦았다.
따라서 국민들은 정부의 발표에 대해 의문이 증폭되고 있었다.
천안함 함미가 인양되어 승조원등의 시신이 수습될 당시, 국방부는 시신이 발견된 위치를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 간혹 오보도 있었지만 곧바로 정정하는 등의 조치가 따랐고, 천안함의 후타실에서 최종 발견된 승조원들은 모두 4명(김종헌 중사,이용상 병장,김선호 상병,정범구 상병)이었다.
이 내용은 해군2함대사령부가 3월 29일에 추정 발표한 명단(5명, 손수민 하사,조진영 하사,문영욱 하사,이용상 병장,김선호 상병)과 인원수에서 차이가 나며, 명단과 일치하는 승조원은 2명(이용상 병장,김선호 상병)뿐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예측결과이므로 차이가 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함미 인양 당시(4월 15일) 후타실에서 4명의 희생자 시신이 수습되고 일반에 공개되었는데, 국방부에서는 CCTV 동영상을 복원했다며 최종 <천안함 피격사건 최종보고서>에 인원수와 계급도 다른 영상 켑쳐장면을 무슨 배짱으로 수록하게 됐을까. (단순한 실수…? NO!…!)
박연수는 변호인 측의 반대심문에 초지일관 천안함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증언을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신 씨의 질문에 동의한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김 병장은 생존자가 맞다. (신 씨의 주장에) 동의 한다. 사고 순간의 영상이라면 맞지 않다."
< 천안함 피격사건을 담은 합동조사결과보고서의 치명적인 결함> |
박연수는 최원일 함장이 극구 부인한 사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토하고 말았던 것이다.
박연수는 증언에 앞서 천안함 피격사건 최종보고서를 숙독했는 지 모르겠지만, 앞서 증언한 최원일 함장의 공판 속기록 등은 전혀 참조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 최 함장이 가장 괴로워 한 장면이 변호인 측이 내민 후타실 CCTV에 찍힌 희생장병들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최 함장의 모습을 보도한 조선일보에 따르면 "희생장병의 얼굴을 최 함장 앞에 내밀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고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라는 취지의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
변호인측이 CCTV 화면에 나와있는 승조원들의 이름을 말해달라는 주문에, 최 함장은 재판부를 향해 "종이에 이름을 적어내겠다"고 했지만, 변호인 측이 "실명으로 특정해 달라"고 주문해, 방청석에서 이를 지켜보던 희생자 가족이 변호인을 향해 "죽은 사람을 가지고 뭐 하는 거야. 이 XX들아"라고 외치는 바람에 법정이 소란스러워지는 한편, 법정 경위에 의해 끌려나가기도 했다.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6/12/2012061201597.html)
<자료7: 천안함 피격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11페이지 분석결과 참조 그림 > |
당시 공판 정황을 참조하면, 최 함장의 증언이 이 사건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컷던 것으로 사료되는 바, 국방부와 합조단 등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김용현 병장의 기막힌 사연은, 결국 증인으로 나선 박연수 작전관이 마침표를 찍어주는 아이러니를 연출한 것이다.
그는 재판 내내 천안함은 사건 발생 직전 까지 좌초 등 아무런 비상상황 없이 정상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고 항변했는데, 하필이면 그 내용이 <자료8: 합동조사결과보고서 211페이지,분석결과 참조 그림>에 고스란히 적시되어 있었다.
박연수는 '분석결과'에 따른 내용은 숙지할 수 있었지만, 한겨울과 다름없는 3월의 날씨에 '런닝셔츠'를 입고 영상 속에 나타난 김용현 병장이, 왜 존재하게 됐는 지 등에 대해 눈치채지 못하고 자충수를 둔 것일까. 천안함의 진실이 단박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합동조사결과보고서 211페이지 분석결과 내용을 끝으로 글을 맺는다.
<211페이지 '분석결과' 내용>
"천안함 CCTV를 복원한 결과, 가스터빈실과 디젤기관실의 모습,안전당직자 순찰모습,후타실에서 체력단련모습이 확인되었으며, 관찰된 격실의 정상적인 모습과 승조원들의 복장과 표정,함정의 안정적 운항상태 등을 볼 때, 천안함은 사건 발생 직전 까지 비상상황 없이 정상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다가 갑작스런 폭발로 선체가 절단되어 침몰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다시 한 번 더 언급한다.
천안함 피격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11페이지에 적시된 분석결과를 참조하면, 후타실에 있었던 김용현 병장은 4월 15일 함미가 인양되어 승조원들의 시신이 수습될 당시, 사망자의 명단에 포함돼야 마땅했다.(벌건 대낮, 대명천지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이명박 정권의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들에게 배포한 천안함 피격사건의 합동조사결과보고서의 치명적인 결함으로 인해, 천안함의 진실이 가속도를 더할 전망이다.
천안함 사건 방청기는 계속 이어진다.
* 본문 중에는 글쓴이가 해외에 체류 중에 일어난 사실이 포함돼 있으므로, 신상철 전 민군합동조사단 민간위원의 글과 자료 일부를 인용(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dok2004&uid=557)해 썼습니다. 참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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