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쿠바, 53년만에 역사적 국교수교 선언
오바마 "낡은 접근방식 끝내고 양국관계 정상화할 것"
미국과 쿠바가 53년 만에 역사적인 국교정상화에 나선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17일(이하 현지시간) 특별 성명을 통해 "미국은 대(對) 쿠바 관계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한 역사적 조치들을 취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존 케리 국무장관에게 즉각 쿠바와의 외교관계 정상화 협상을 개시하라고 지시했다.
미국이 쿠바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한 것은 1959년 1월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통해 공산정부를 수립한 지 2년만인 1961년 1월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수십 년간 미국의 국익을 증진해나가는 데 실패해온 낡은 (대 쿠바) 접근방식을 끝내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해나갈 것"이라며 "미국은 그동안 쿠바의 고립을 목표로 한 정책을 추진해왔으나, 쿠바 정부가 자국민들을 억압하는 명분을 제공하는 것 외에는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밝혔다.
앞서 백악관도 대변인실을 통해 내놓은 성명에서 "미국의 쿠바 봉쇄는 민주적이고 번영하며 안정적인 쿠바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했음이 분명해졌다"며, "오히려 미국의 봉쇄 정책은 중남미 지역과 전 세계의 파트너 국가들로부터 미국이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밝혔다.
이는 미국이 반세기 이상 유지해온 대 쿠바 봉쇄정책이 실패했음을 공식으로 시인한 것으로 평가된다.
오바마 대통령은 "국교를 단절한 1961년과 마찬가지로 쿠바는 여전히 카스트로 일가와 공산당이 통치하고 있다"며, "우리는 똑같은 정책을 계속 하면서 다른 결과를 낳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쿠바를 붕괴로 몰아가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도, 쿠바 국민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어떤 나라를 실패한 국가로 몰아붙이는 정책보다 개혁을 지지하고 독려하는 것이 더 낫다는 교훈을 어렵게 얻었다"고 덧붙였다.
케리 국무장관도 별도의 성명을 내고 "오늘 우리가 내디딘 발걸음은 조류의 방향을 바꾸는 데 따르는 위험과 비용이, 우리가 스스로 만든 '이념의 시멘트'에 계속 갇혀 있는데 따르는 위험과 비용보다 훨씬 낮다는 우리의 확고한 믿음을 반영한다"며, "나는 60년 만에 쿠바를 방문하는 첫 국무장관이 되길 학수고대한다"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현행 대 쿠바 봉쇄정책을 대폭 완화한다는 방침하에, 수개월 내에 쿠바 수도 아바나에 미국 대사관을 재개설하고, 양국 정부의 고위급 교류와 방문을 담당하도록 했다.
이를 위해 로베르타 제이콥슨 국무부 서반구 담당 차관보가 이끄는 대표단이 내년 1월 아바나를 방문해 미·쿠바 이민대화에 착수할 예정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이민문제에 이어 의료, 마약퇴치, 환경보호, 인신매매, 재난대응 등 상호 관심사도 쿠바 정부와 적극적으로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 케리 국무장관에게 쿠바의 테러지원국 해제를 검토할 것을 지시했으며, 케리 장관은 곧바로 국무부 관련 팀에 검토를 지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와 함께 미국 재무부와 상무부로 하여금 쿠바 여행과 송금과 관련한 규제를 개정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가족방문이나 공무출장, 취재, 전문연구, 교육, 종교, 인도적 지원 등 미국 정부가 인정하는 12개 분야에서 출입국 허가증을 받은 미국인은 쿠바를 방문할 수 있게 됐다. 다만, 기업과 민간 분야의 여행은 당분간 규제가 유지될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연간 500달러로 제한된 기부성 송금한도도 2천 달러로 인상됐다.
쿠바 방문허가를 받은 미국인은 400달러 상당의 물품을 수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중 담배와 주류는 모두 합쳐 100달러 이내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이어 미국 기관들이 쿠바 금융기관에 계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미국 국영 또는 공기업들이 제3국에서 쿠바인들과 금융거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쿠바 국민의 정보통신망 접근을 확대하기 위해 미국 통신사업자들이 쿠바에서 상업용 정보통신 및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필요한 인프라와 시설을 구축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에 앞서 오바마 대통령은 16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20여분간 전화통화를 갖고, 국교정상화 추진과 수감자 석방 및 교환문제를 논의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국교정상화 선언 직후 카스트로 의장은 이날 전국 라디오방송으로 중계되는 특별 성명을 통해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전화 통화로 양국 관계 정상화를 논의했다"고 밝혔다.
카스트로 의장은 이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는 체제의 자주성과 국가 주권에 대한 편견이 없는 기반에서 이뤄져야 한다"며, "이러한 토대에서 서로 존중하는 대화가 이뤄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쿠바 정부는 이날 5년간 수감해온 미국개발원조청(USAID) 계약직원 앨런 그로스를 석방했으며, 그로스는 미국 자택으로 귀가했다. 또 미국내 쿠바 스파이들을 적발하는데 도움을 주다 붙잡혀 20년간 쿠바 감옥에 복역해온 쿠바인 한 명도 풀어줬다.
미국도 1998년 플로리다에서 첩보 활동을 한 죄로 투옥된 쿠바 정보요원, 이른바 '쿠바인 5명' 가운데 남아있는 라몬 라바니뇨와 헤라도 에르난데스, 안토니오 게레로를 곧 풀어줄 예정이라고 카스트로 의장이 밝혔다.
이 같은 국교정상화 추진에 따라 오바마 대통령이 조만간 쿠바를 공식 방문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분명히 오바마 대통령의 쿠바 방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겠다"며 "그러나 당장 일정이 정해진 것은 없다"고 말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이날 뉴욕 유엔본부에서 한 송년 기자회견에서 미국과 쿠바의 국교정상화 선언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소식으로 진심으로 환영한다"며, "유엔은 양국의 우호 관계가 증진되도록 지원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국교정상화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에서, 사상 첫 남미 출신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과 가톨릭 교회의 역할에 감사한다고 말했으며, 바티칸은 이날 성명을 내고 "양국 정부가 최근 역사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는 역사적 결정을 내린 것을 축하한다"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번 발표에 대해 미국 공화당 내에서는 오바마 행정부가 카스트로 정권에 일방적으로 양보했다는 비판론이 제기됐다.
공화당 소속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은 이날 성명을 내고 "잔인한 독재자에게 어리석은 양보를 해준 또 하나의 사례"라며 "쿠바 국민이 자유를 만끽하기 전에는 카스트로 정권과의 관계는 정상화는커녕 재검토조차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공화당 잠룡 중 한 명이자 쿠바 출신인 마르코 루비오(플로리다) 상원의원은 "백악관이 얻은 것은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을 쿠바에 양보했다"고 비판하면서 주쿠바 미국 대사관 개설 및 대사 임명에 반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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