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결과를 평등하게

道雨 2019. 10. 16. 10:09




결과를 평등하게





100명으로 구성된 한 학교가 있다고 하자. 이 학교 졸업생 중 성적이 좋은 10명은 중산층 이상의 보장된 소득을 평생 얻게 된다. 나머지 90명은 평생 불안정하게 각자도생해야 한다.

10명 안에 들려는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졌다. 수업의 질이 낮아 사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는 기회가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시험문제가 들쭉날쭉해 과정이 불공정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쟁 과열로 속임수와 편법이 판을 치게 됐다.


새로운 교장이 이런 상황을 바꾸려고 개혁에 나섰다. 10명을 고르는 시험을 좀더 나은 방식으로 바꿔 과정의 공정성을 높였다. 국내 최고 교사들을 특별채용해 수업의 질을 높이면서 기회의 평등성을 높였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 사회는 더 나빠져 상위 10명과 나머지 90명 사이의 격차는 더 커졌다. 기회는 커지고 과정도 공정해졌는데, 결과의 차이는 더 벌어진 셈이다.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을까?


그럴 리는 없다. 학생들의 능력이 전체적으로 모두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결국 성공하는 것은 10명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경쟁만 더 거세졌을 뿐이다. 우리 사회가 꼭 이 학교 같다.


요즘 우리는 울분에 가득 찬 나라에 사는 것 같다. 입시에 취업에 시달리던 청년들은 사회가 불공정하다며 분노를 토로하고, 중장년층은 헌신해온 과거를 보상받지 못하고 있다며 억울해하고, 노년층은 생계 고통과 노인 혐오 정서를 탓하며 울분을 쏟아낸다.


유명순 서울대 교수 연구팀이 발표한 ‘한국의 울분’ 조사를 보면, 한국인 중 심한 울분을 느끼는 사람의 비중은 독일인의 네배가 넘었다. 누구보다 20~30대 젊은층이 강한 울분을 느꼈다.

이런 사회에서는 변화를 지향하는 제도는 논의조차 힘들다. 다양한 기회를 보장하려 만든 입시제도가, 정의로운 결과를 구현하려 추진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모두를 똑같은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으니 불공정하다며 지탄을 받는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억울하고 불공정한 사회에 살고 있을까?

핵심은 우리 중 상당수가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비해 덜 보상받고 있으며 오히려 차별받는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그런데 나는 아마도 우리 사회 대부분의 개인이 수십년 전과 비교하면 더 능력이 좋아졌고 더 열심히 노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능력의 신장은 많은 지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이 대학에 가고,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책과 영상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며, 더 많은 사람이 외국어를 하고 세계여행을 하며 전 세계의 지식을 빨아들이고 그곳을 무대로 활동한다.


노력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제발전 시기 주 60시간 동안 생계를 위해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며 야근하는 것이 노력이었던 것처럼, 디지털 전환 시대에 취직 안 하고 게임 앱을 개발하고 유튜브에 영상을 올린다며 밤을 새우는 것도 노력이다. 진학과 취업 노력은 말할 것도 없다.


간혹 그렇지 않다면서, 이직이 잦고 자립이 늦어진 젊은층을 탓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은 능력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노력의 방향이 다채로워졌을 뿐, 절대 수준 자체가 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모두의 능력이 신장되고 있다면 어떤 보상 체계가 가장 공정할까. 모두가 골고루 더 많은 보상을 얻는 체계다. 결국 소득을 더 평등하게 나눠야 억울함이 해소된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거꾸로다. 소득은 점점 더 상위 10%에 쏠린다. 자산은 상위 1%가 독점하는 추세로 굳어지고 있다. 지나치게 보상받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능력과 노력에 따른 보상을 받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과정을 공정하게 만들려 애써도, 다들 억울한 사회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 결과의 불평등이 커지니 기회의 창도 넓어지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입시제도 공정성을 높이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과정을 다듬어도, 결과의 불평등이 너무 심하면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만 힘을 쏟게 된다.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한 게임이다. 결과의 불평등은 더 커지고 경쟁에 쏟아부을 자원 격차가 더 커지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방향을 틀 때가 됐다. 결과를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을 줄이는 게 핵심이다. 좀더 줄어든 소득 불평등이, 좀더 많은 사람에게 다양한 기회까지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이원재
LAB2050 대표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13290.html?_fr=mt0#csidxbcbfd8c4faf942fa2f8c9cbe96e4e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