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의 자본친화성
최근 기본소득 논의가 뜨겁다. 경기도가 지급한 재난기본소득은 이 논의를 더 뜨겁게 만들고 있다.
기본소득이,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온 ‘노동’을 분배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동윤리’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선 그 찬반이 극명히 갈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2018년 한국리서치의 여론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수의 차이가 클수록 좋다’는 입장이 66%인 반면, ‘적을수록 좋다’는 27%에 불과했다. 한편 부양가족 수에 대한 고려에서 ‘임금 차이를 둘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58%, ‘큰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6%였고, 더하여 ‘가정형편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69%, ‘큰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4%에 불과했다.
이런 필요를 외면하고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른 차등분배를 선호하는 경향은, 전 계층 및 전 사회집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이런 통계는 우리 사회가 노동윤리와 승자독식의 원칙을 내면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른 분배에 그다지 관심이 없음을 보여준다.
이런 ‘노동중심’ 사회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이처럼 뜨거워지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결국 그 전환점은 장기화되고 있는 ‘팬데믹’이란 생각이다. 열심히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음을 많은 이들이 실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국민 재난지원금을 통해 그 효과를 체감해본 것도 주요한 요인으로 보인다.
이 기본소득 논의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사회적 상속제도인 ‘기초자산’, 더 확장된 사회적 보험제도로서 ‘전국민 고용보험’과 같은 제도들이 함께 검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논의는 상당히 바람직하다. 각각의 제도가 가진 장단점을 비교하는 과정을 통해, 더 나은 분배 대안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최근 기본소득 논의를 지켜보며 아쉬운 점은, 일부 정치인과 언론이 ‘기본소득’을 ‘포퓰리즘’이란 용어로 매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연구를 보면, 우리 사회에서 ‘포퓰리즘’이란 용어가 그 원래 의미를 잃고, ‘정파적’ 입장에서 혁신적 제도나 정치적 정적을 비방하기 위한 용도로 쓰여왔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포퓰리즘이란 비판을 넘어, 기본소득이 사회주의자들의 발상이라는 원색적 비난을 가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이 ‘포퓰리즘’이고 ‘사회주의’라는 비판은 옳은 것일까? 정작 최근에 기본소득주의자들의 고민은 오히려 반대다. 기본소득이 지나치게 ‘자본친화적’이라는 것이다.
우선 기본소득을 가장 강력히 지지하는, 영향력 있는 집단을 보자. 테슬라와 스페이스엑스(X)의 일론 머스크,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 구글 딥마인드의 경쟁자인 오픈에이아이(AI)의 샘 올트먼 등은 기본소득의 열렬한 지지자들이다. 빌 게이츠 역시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기본소득을 실시할 수 있을 만한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며, 기본소득의 지지 대열에 사실상 합류했다. 하나같이 당대 자본주의의 중심인 디지털 울트라리치들이다.
‘소비력이 있는’ 대량 접속자들이 이끌어가는 아이티(IT) 산업에서, 기본적 소비력을 주는 이 제도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비록 우연이긴 하지만, 기본소득은 도래하고 있는 디지털 자본주의의 요구에 부합하는 제도가 되었다.
원래 기본소득은 토지·대기·빅데이터 등에서 만들어지는 ‘공유부’를, ‘모두에게’ ‘균등하게’ ‘노동기여 유무와 상관없이’ ‘권리의 형태’로 나눔으로써, 개인의 존엄성과 실질적 자유를 실현하려 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보듯이, 현재 기본소득 논의가 ‘개인의 존엄성’은 외면한 채, ‘얼마만큼 국가의 소비력을 진작시키는지’로 흘러가고, 디지털 울트라리치들에 의해 미래 자본주의를 유지할 핵심제도로 평가받으면서, 원래 의도는 희석되어버린 실정이다.
그렇다 보니 최근엔 기본소득이 강조하는 노동을 통한 기여 유무를 따지지 않는다는 ‘무조건성’을 버리고, 그동안 평가받지 못한 돌봄노동 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분배하는 ‘참여소득’이 관심을 받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정리하자면, 지금 기본소득의 문제는 ‘포퓰리즘’이나 ‘사회주의’적이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자본친화적’이고 ‘소비지향적’이라는 데 있다.
쓸데없는 정파적 이익이나 이념 논쟁 대신, 제도 그 자체에 대한 효과의 문제를 놓고 기본소득 논의가 진행되길 바란다.
김만권 |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82940.html#csidx8596c27f09334d2a0d39216f43f4b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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